『장자』 2장 제물론(齊物論) 11절
[본문]
옛날 사람에는 그의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던 이가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던가? 처음부터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이가 있었으니, 이것은 지극하고도 완전한 것이어서 여기에 더 무엇을 보탤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다음의 경지는 사물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아무런 구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그 다음의 경지는 사물에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옳고 그른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시비가 드러난다는 것은 도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도가 무너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아끼]는 것이 이루어지는 원인이 형성되는 것이다. 과연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이루어짐과 무너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해설]
장자는 이번 절에서 제물론의 지혜에도 4단계의 높낮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4단계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이르면, 개인이나 사회에 도가 무너져서 시비(是非)가 드러나고 차별이 일상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들은 장자의 시각에 의하면 4번째 단계에 살고 있다. 차별은 우월과 열등(優劣)이 뚜렷한 것이다. 일상에서의 차별은 재산의 많고 적음과 지위(명성,학벌)의 높고 낮음 등이다. 일생에서의 차별은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건강과 병듬 등이다. 이것들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차별은 좋음과 나쁨으로 선과악, 미와 추가 여기에 속한다.
도가 무너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낮은 단계는 사물들의 구별은 하지만 차별은 하지 않는 단계이다. 즉 사물들은 각각의 특징이나 개성이 있어서 각각 다르지만, 이들 사이에 가치차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물들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이분법(二分法)이 필요하다. 이분법은 우리가 인식하려는 사물과 그 사물이 아닌 것인 두 세계로 구별하는 방법이다. 이때 그 사물을 한정하는 형식인 한정형식(限定形式)의 차이를 통해 구별한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모든 사물들이 크기가 다를 수 있고 기능이 다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나 미와 추로 차별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보다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사물들 사이에는 처음부터(원래) 구별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자는 노자와 함께 사물들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이 감성(感性, sensitivity)과 오성(悟性, understanding)으로 그들을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감성의 작동은 오감으로 인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시각으로는 색깔과 모양의 구별을 하고, 청각으로는 소리의 구별을 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오성으로는 다양한 관념들로 구성된 판단을 위해 사물들을 구별한다.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른 사람은 구별할 사물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나도 없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없으며, 생성과 소멸도 없다. 불교 식으로 말하면 열반(涅槃)에 이른 것이며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 부처이다. 도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자유인인 진인(眞人), 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이다.
노자 『도덕경』 1장
[본문]
도(道)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의 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없어야 그 대상의 오묘한 실재(實在,reality)를 보고,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있어야 그 대상의 분명한 현상(現象, appearance)을 본다.
이 실재와 현상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며 이름이 없고 있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양자는 만물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같음’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 경계는 모호해진다. 모호하고 더욱 모호한 곳으로 나아가면 여러 오묘한 궁극적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해설]
도(道)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도와 도가 아닌 것을 이분법으로 구별해야 한다. 우리들은 이분법으로 구별하려면 한정형식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 우리들은 한정형식을 파악할 때 이름(名)으로 한정해서 인식한다. 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기 위해서 세계를 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와 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세계로 양분해야 한다. 이름으로 파악되는 한정형식을 화이트헤드는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이라고 했고, 노자는 상(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름과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은 다르다. 도라는 이름과 도 자체는 다르다. 이것은 사과라는 이름과 사과 자체가 다른 것과 같다. 사과 자체는 두가지 면에서 사과라는 이름과 다르다. 하나는 사과 자체는 생성소멸하는 세계에 속하는데 비해 사과라는 이름은 생성소멸이 없는 영원한 세계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닌 세계와 실제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구별이 되지 않는데 비해, 사과라는 이름은 한정형식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구별된다.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는 사물과 그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 사이에는 변화가 있다. 사물도 유전(流轉)하고, 사물에 붙어 있는 한정형식도 출입(出入)을 한다. 즉 생성된 사물도 소멸되어 가고, 이름도 지명(地名)이 바뀌듯이 바뀌어 간다. 그래서 “도(道)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의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다.”
이때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有名) 구별이 되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無名) 구별이 되지 않는다. 구별이 되는 세계는 현상(現象)의 세계이고, 구별이 되지 않는 세계는 실재(實在)의 세계이다. 구별이 되는 현상세계는 감성과 오성이 작동하는 세계이며, 구별이 되지 않는 실재세계는 감성과 오성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이다. 만물은 우리가 감성과 오성으로 느꼈을 때이기 때문에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세계가 하늘과 땅으로 구별되기 전에는 이름이 없다. 그래서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름 없는 세계인 실재계와 이름 있는 세계인 현상계는 사실상 동일한 세계이다. 다만 우리들의 감성과 오성으로 보는가 보지 않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물들의 차이를 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천지에서 만물로 드러나고, 사물들의 같음을 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모호하지만, 궁극적 실재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모호하고 더욱 모호한 곳으로 나아가면 여러 오묘한 궁극적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고 하였다.
노자는 자신의 사상을 『도덕경』을 통해 제시하면서 같음 방향으로 보아가야 한다는 점을 1장에서 제시하였다. 즉 오리엔테이션을 한 것이다. 장자는 이번 절에서는 같음 방향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지혜의 등급이 높다는 것을 4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노자 『도덕경』 40장
[본문]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고, 약한 것은 도의 쓰임이다. 천하만물은 있음에서 생겼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겼다.
[해설]
장자의 4단계 지혜를 이해하기 위해 ‘같음 방향’과 ‘차이 방향’을 알아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노자 『도덕경』 40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 차이(생성) 방향 : 무 ➝ 유 ➝ 천지 ➝ 만물 𝄆 무
◾ 같음(소멸) 방향 : 만물 ➝ 천지 ➝ 유 ➝ 무 𝄆 만물
〈이어지는 강의 예고〉
▪575회(2024.04.16) : 장자 해설(20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노자가 묻는다』 저자 ▪576회(2024.04.23) :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21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 ▪577회(2024.04.30) :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22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 ▪578회(2024.05.07) : 장자 해설(21회), 이태호(통청원장/철학박사/『노자가 묻는다』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