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qb4K5N-558
본문 시편 119:105-112 제목 : 아! 하나님의 은혜로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6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10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8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 109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110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1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2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설교 전에 불렀던 310장 찬송은 많은 분들이 좋아하지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격합니다. 이 쓸 데 없는 자인 내가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나의 공로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죠. 2절 가사에도 보면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게 지금 믿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때를 따라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또 3절에서는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믿음도 내 능력이나 인격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감동해 주셨기 때문에 이 역시 ‘아!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은 은혜를 깨닫는 신앙이라고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데 이 찬양의 작사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은 자 같아 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인 시편 119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장장 176개절에 이르지요. 이렇게 엄청나게 긴 한 편의 시인데 그 주제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119편 전체에서는 여호와의 율법, 주의 계명, 주의 말씀, 주의 증거, 주의 율례, 주의 법도 이렇게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고백, 말씀과 관련한 여러 경험들, 말씀이 내 삶에서 지니는 의미, 말씀 자체의 위대함과 온전함과 능력을 노래하고, 말씀이 나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노래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105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시작되지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그런데 이런 고백적인 노래는 어떤 상황에서 불렀을까요? 편안한 상황이었을까요? 아니면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 배운 것을 노래로 말하는 걸까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위험한 상황과 위기와 고통의 상황을 만났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걸 의지하고, 저걸 기대야 한다 등등 무수하게 말들을 하는데 나는 모든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겠다는 믿음의 결심을 굳게 다짐하면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시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요? 107절에 보면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109절에도 보면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니’, 그리고 110절에도 보면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이런 표현들을 볼 때 대단히 심각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알 수 있지요. 109절에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다는 말은 말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실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과 초조와 쫓기는 심정일 겁니다. 특히 107절 후반부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살아나게 해달라는 것은 죽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죽은 것과 같아서 더 이상 다시 일어나거나 회복될 가능성조차 없어 보였던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얘기인거죠. 그런 상황에서 본문의 노래가 나온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었지요. 예수께서이 고백을 들으시고 이제 내가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당하고 죽게 될 것이고 부활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거칠게 대항했지요. ‘주님 안됩니다. 이런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대항했다가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라는 엄한 책망을 받고 맙니다. 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기도하실 때에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기도하셨지요. 베드로는 자기가 질 십자가도 아닌데 거칠게 항의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지실 십자가인데도 묵묵히 기도하신 겁니다. 즉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어떤 생각으로 그 상황을 대하는가, 이것이 그 사람의 가치관 인생관 신앙관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아직 사탄의 뜻을 따르는 자기중심의 신앙관이었고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 중심적이셨던 거죠. 그 결과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최악의 실패의 길을 갔고, 예수님은 끝까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향한 구원과 생명의 문을 여셨지 않습니까?
오늘 시편의 시인은 고난이 매우 심하고,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고, 악인들이 자기 앞에 올무를 놓아 해하려 하는 위험이 코 앞에 닥쳐있는 상황에서 놀랍게도 주님의 말씀을 먼저 붙잡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107절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9절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110절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처럼 위기의 상황에서도 주의 말씀과 법과 법도를 붙들겠다고 다짐하지요.
그 외에도 106절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111절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112절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이렇게 본문 전체는 한절도 예외 없이 주님의 말씀을 언급합니다. 좀 거친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미쳐있는 거죠. 하나님 말씀 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고 기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대부분 어떤 위기상황이 되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것들을 먼저 급히 찾게 되지 않습니까? 돈 문제라면 나에게 돈을 빌려 줄 사람을 먼저 찾게 되고, 심각한 병에 걸렸다면 용한 의사를 먼저 찾게 되고, 법적인 문제가 있다면 유능한 변호사를 먼저 찾게 되지요. 그런데 심각한 고통과 위기와 어려움 앞에서 두려움과 염려도 있고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도 있어서 어떻게 이 상황에서 살아가고 또 어떤 방법으로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이 시인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고, 그 말씀에만 의지해서 말씀이 지시하는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하는 겁니다. 궁금한 것은 이럴 수 있는 믿음의 의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가지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만 의지하게 했을까요?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대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시인이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또는 원래 자기 소신이 강한 사람이어서 그랬을 거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이 본문 106절 말씀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이 말씀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마태복음 5:34절에서, 그리고 야고보서 5:12절에서도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시인이 이렇게 맹세한다는 건 건방져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인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서 맹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참된 믿음의 길을 갈 때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그 모든 규례들을 온전히 지키도록 이끌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그 은혜를 믿고 그 은혜에 근거한 맹세이지 자기자신에 근거한 맹세는 아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설명했지요. 저는 이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시인이 그 심각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택한 것,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을 빌린다면 그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것은 이 시인이 본래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고, 그 은혜에 근거해서 내가 끝까지 주의 말씀을 붙들고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차원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까 불렀던 310장 찬송 3절 가사로 말한다면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주님의 말씀을 먼저 택하게 하시는지, 주님의 말씀과 뜻을 먼저 붙잡고 따를 수 있게 하시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즉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을 향한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하지만 여러 성도님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습니까? 어디 놀러가셔도 되고 집에서 쉬셔도 되고 돈벌러 나가도 되고, 그런데 여러분들은 예배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보다도 여러 성도님들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은혜가 사실은 더 큽니다.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왔지만 여러 성도님들은 많은 선택 중에서 오셨기 때문이지요.
지금 예배의 자리에 와 있는 우리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느껴지던 느껴지지 않던 상관없이 오늘 이 시편의 시인이 심각한 위기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택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처럼 성도님들께서 이 예배를 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요. 이제 이 은혜의 영역을 이 예배에서 멈출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배에 오는 것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일상의 삶에서도 오늘 예배를 먼저 택했듯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택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을 먼저 택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삶을 통해 보여주시고 나타내신 것을 먼저 택하고, 편안한 상황 뿐만 아니라 심각하고 긴급한 위기 앞에서도 오늘 시편의 시인과 같이 주님의 말씀과 법도와 뜻을 항상 먼저 앞세울 수 있는 은혜로까지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더 소유하고 더 성공하고 더 편안하고 즐겁기 위한 신앙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신앙이고, 내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려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내가 이 불완전한 생명에서 완전한 생명, 즉 참된 구원에 이르도록 나에게 무한하면서도 가장 소중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