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0EakkPTehk
본문 창세기 28:10-19 제목 : 우연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우리의 삶에는 정확하게 그 이유가 설명되지 않아서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지요. 하필이면 내가 왜 이런 세상에 태어났는지, 많은 부모들 중에 왜 저분들이 나의 부모인지, 왜 나는 이런 얼굴, 이런 성격, 이런 취향들을 가지게 되었는지, 내 주변에는 왜 이런 사람들만 있는지,,, 그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 좋은 대답은 역시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우연히’라는 말은 모든 것을 정확한 수치와 인과관계로 말하야하는 과학에서도 적지 않게 많이 사용됩니다. 특히 생물학 분야에서는 모든 생물이 하나의 단세포에서부터 시작해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생물체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느냐고 할 때에 그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어서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때가 많은 거죠. 그만큼 생명의 역사와 과정에 대해서 많은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설명이 안되는 신비의 영역도 많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다른 영역이라면 모르겠지만 내 자신에게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삶의 신비를 그냥 ‘우연히’ 라는 말로 다 덮어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많지 않겠습니까? 내 생애가 우연으로 살아가는 삶의 연속이라면 나의 인생은 너무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요? 내 가정도 우연히, 내 직장도 우연히, 예수 믿게 되어 교회 다니게 된 것도 우연히,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것도 우연히, 이렇게 모든 걸 우연이라는 말로 내 인생에 대해 말해야 할까요? 기독교의 신앙은 우연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주관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지요. 내가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창조와 주관하심이고, 이 나라가 나의 조국인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고, 내가 예수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서 비롯된 것이고, 이렇게 내 모든 삶의 순간순간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 속에 나타나고 이루어진 것임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 겁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되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최선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살아가려는 것이 믿음의 삶인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샀고, 아버지 이삭이 늙어서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 할 때에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서 형 에서로 변장해 들어가 장자로서의 모든 축복을 가로채어 버렸지요. 에서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고,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했기 때문에 어머니 리브가는 수백킬로 멀리 떨어진 하란이라는 곳에 있는 친정 오빠에게 피신 가게 했던 겁니다. 이 때부터 야곱의 인생에는 파란만장한 시련의 역사가 시작되었지요.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한 길목이었던 19절에 의하면 ‘루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11절에 보면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 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게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짧은 한구절이지만 여기에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현실을 야곱이 직면하고 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야곱은 그의 평생에 처음 집을 떠났지요. 지금까지는 집과 가족이 있었고, 특히 야곱은 마마보이 기질까지도 있어서 늘 엄마 치마폭에 있었는데 이제는 졸지에 모든 것에서 다 떠나버린 겁니다. 지금 야곱에게는 아무도 없지요. 가족도 친구도 도와 줄 사람도 없고 오로지 혼자입니다. 게다가 노숙자 신세까지 되어서 돌로 베게를 삼고 들판에서 자야했지요. 지금 야곱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요?
보통 이런 상태를 절대고독이라고 하지요. 만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내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공간조차 없어서 들판에 홀로 버려져 정말 모든 게 나 홀로인 절대고독의 상태가 오늘 본문의 야곱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꿈에 본즉’ 그리고 13절에 보면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이 절대고독의 현실에 있는 야곱에게 여호와께서 꿈을 통해 찾아오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가셔야 할 의무라도 있으실까요? 찾아가셔야 한다면 남을 속이면서 도망다니는 야곱이 아니라 차라리 속임을 당한 아버지 이삭이나 형 에서에게 찾아가셔서 위로하셨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다는 것은 우연일까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의 손길이지요. 왜 속임 당한 이삭과 에서가 아니라 속인 죄인인 야곱을 찾아오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야곱을 찾아오셨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임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비율은 약 17% 정도 된다고 하는데 어쩌다가 우리는 그 17% 안에 들어가는 선택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냥 우연히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또한 야곱을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각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통적이면서도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한 은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은혜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매주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서고, 말씀과 함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우리는 우연히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고, 지금 우연히 이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기 때문인 거죠. 다른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것보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 구원의 길을 걷게 된 은혜가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귀한 은혜인 것이고, 그 소중한 은혜가 지금 예배하는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야곱을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크지만 또 한가지 본문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야곱이 이처럼 꿈을 꾸었을 때에 이 꿈이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신 은혜이지요. 16절과 17절에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은 지난 밤의 꿈이 지금 가장 밑바닥 같은 절대고독을 겪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는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과 통하는 하늘의 문이 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인식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야곱이 똑똑하거나 인격이 훌륭하고 성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겁니다.
야곱은 지난 밤의 꿈을 희망적인 길몽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이상한 개꿈을 꾸었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그 꿈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것이고, 나를 찾아오셨다면 내가 버림받아 도망다니는 이 현실도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무엇이 야곱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도 큰 은혜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소중한 은혜인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은 분명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예배의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주시는 자리임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은혜인 것이지요. 지독한 공산권 국가나 과격한 이슬람주의 국가에서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게 목숨을 내놓을 일이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숨어서라도 모입니다. 왜 목숨이 걸린 위험을 무모하게 감수할까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너무 소중한 은혜임을 깨닫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아무 제한없이 예배의 자리를 오가는 은혜는 누리지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반면 심한 박해의 상황에 있는 성도들은 예배의 자리에 오고가는게 대단히 위험하지만 숨어서라도 드리는 매 예배 때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소중함, 그 만남 속에서 주어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내 목숨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요. 과연 누가 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고 있을까요?
야곱은 깊은 절대고독 속에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은혜를 입었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 절대고독의 자리가 곧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은혜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야곱으로 하여금 절대고독의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게 했고, 마마보이처럼 약골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거칠고 험한 인생길에 들어섰어도 그 모든 상황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와 굳건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환경을 만나 행복과 즐거움 속에 사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야곱처럼 모든 것을 다 잃고 절대고독 속에 처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하실 것은 우리를 참된 생명의 길로 이끌어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의 조건들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여전히 생명의 양식으로 먹이시고 돌보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은혜가 우리를 온전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야곱에게와 같은 절대고독의 불행이 있어도 그 불행은 나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참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이 굳건하게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