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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회의장소의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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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2월 명월구에서 있었던 《겨울명월구회의》는 대단히 큰 의의를 가진다. 이때 가졌던 《겨울명월구회의》에서는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나서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투쟁의 방향설정과 방법 그리고 투쟁의 영역 등이 논의되었다.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 사이 카륜 진명학교에서 가졌던 《카륜회의》 주요 결정사항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이자》는 노선이 항일무장투쟁의 《움》이라면, 《겨울명월구회의》는《싹》을 활짝 피운 회의였다고 규정할 수 있다. 결국 1930년 이후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까지 동북만과 남만 그리고 백두산 지대에서 가열차게 벌이던 항일무장투쟁의 씨앗은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아버지인 김형직 선생이 물려준 두 자루의 권총이었고, 그 씨앗을 《움》틔운 것은 《카륜회의》 주요 결정사항 《무장으로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벌이자》는 결정사항이었으며 또 항일무장투쟁의 《움》을 《싹》으로 활짝 피어나게 한 회의가 바로 1931년 12월에 열린 《겨울명월구회의》이다. 이를 간략히 도식화하면
두 자루의 권총 → 카륜회의 무장투쟁노선 결정 → 겨울명월구회의 항일무장투쟁 구체화 이다.
1931년 12월에 열린 《겨울명월구회의》는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독립투쟁가들의 무장투쟁노선에 있어 씨앗과 뿌리 그리고 그 줄기를 이어주는 주요한 회의였다. 또 이러한 기조는 제국주의연합세력과의 대결에 있어 현재까지 변치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오늘 날에는 이를 북에서 《선군정치》 혹은 《선군사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해서는 지난 장들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는 하였지만 본 장에서는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하여 본격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겨울명월구회의》는 항일무장투쟁과 현재 북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선군정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기 때문에 상세히 분석을 하고자 한다. 본 분석에 있어 지난 장들에서 인용을 하였던 북측 자료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학술자료. 그리고 남쪽의 학술자료를 중복이 되기는 하지만 또 다시 인용하여 비교분석함으로서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정확한 사실에 대해 고증하고 논증을 하고자 한다.
①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
이미 지난 장들에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간략히 다룰 때에도 분석을 하였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를 보면 모든 것이 중국공산당의 지시와 주도아래 동북만주와 남만에서의 무장투쟁이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가 되어있다.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 역시 이에서 조금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를 보도록 하자.
❝ 명월구회의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은 만주 각급 공산당조직에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대중적투쟁을 벌리라고 호소한후 공산당조직의 력량이 강하고 군중토대가 좋은 지방에서는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31년 11월 16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순시원을 파견하여 유격대를 창건할 사업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양림(조선인)을 성위 군위서기로 소환하고 중공대련시위서기 동장영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 파견하였다. 12월 16일, 중공동만특위는 동장영의 주최하에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 각 현의 책임자와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 40여명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9.18”사변이 일어난 3일후인 9월 21일, 연길진수사 겸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인 길흥은 룡정주재 일본총령사관에 사람을 파견하여 투항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리하여 연변은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고 일본군의 점령지로 되고말았다. 일제의 침략에 직면한 동만 각 현의 공산당조직에서는 즉시 사업중점을 항일구국투쟁에로 옮겨놓고 광범한 대중들을 인솔하여 새로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정세에 수응하여 항일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명월구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회의참가자의 한사람인 김일성동지의 회억에 따르면 회의에 차광수, 리광, 채수항, 김일환, 량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증권, 리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한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중 리광, 량성룡, 오중화, 오중성, 김철 등은 왕청현대표들이고 채수항, 김일환은 화룡현대표들이며 오빈, 리청산 등은 연길현대표들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하는 점은 왕청현대표인 오중화는 1931년 봄에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힌후 1932년 12월에 석방된 점이다. 그런데 회의는 1931년 12월에 열렸으니 오중화가 이 회의에서 참석할 시간이 없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명월구회의”에서는 군중토대가 좋고 적의 통치력량이 약한 지대를 선택하여 대중투쟁의 토대우에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데 대한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의 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병사사업을 강화하고 유격대를 건립할데 관한 결정”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농민운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강화하고 대중을 발동하여 유격대를 창건하며 유격전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 각급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반제동맹, 공회, 농민협회, 부녀회, 소년선봉대, 적위대 등 단체들을 발전시킬데 관한 문제, 년말전으로 채무를 반대하고 가렴잡세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 춘황투쟁을 준비할데 관한 문제, 병사사업을 벌리고 병변과 의거를 조직하며 무기를 탈취할데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과업들을 토의결정하였다.
명월구회의의 의의에 대한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명월구회의는 동만의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들의 정신을 분발시켰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동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며 항일구국투쟁의 새로운 앙양기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조직적 토대를 마련하여주었습니다.” ❞
(김철수《연변항일사적지연구》)
위에서 인용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를 보면 1931년 12월 《겨울명월구회의》에 참석한 구성원들을 보면 대부분이 조선인들이다. 물론 아래에서 인용하여 비교분석하겠지만 북측 자료에 의하면 회의에 참가한 총인원은 40여명이고 중공당에서 참석한 인원은 7명 정도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회의를 개회하라고 지시를 한 것도 중공당이고 주최를 한 것도 중공당이라고 한다면 조선인들은 그저 중공당의 명령만 받고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는 말인가? 물론 중공당에서 지시문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료에 언급되어진 것처럼 일방적으로 중공당에서 결정하고 조선인들이 수동적으로 회의에 참석을 한 것처럼 묘사를 한 것은 동의할 수가 없다. 다음에 인용되는 북측 자료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북측 자료를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해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전해주고 있다.
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겨울명월구회의》에서 결정된 주요한 사항들은 무장투쟁에 대한 내용과 후일 조선인들이 어떻게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다. 이미 전 장들에서 남측 자료나 북측 자료 심지어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에서까지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인원의 85~90%가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참가 인원에서뿐 아니라 무장투쟁을 이끌어가는 간부진들은 최저 90% 이상이었다고 고증을 하였다. 그런데 어찌 조선인 투사들이 일방적으로 중공당의 지시만을 받아 움직였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남측 자료에서까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에서는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는데 주저하였으며 투쟁에 대한 명확한 결정을 재리고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위 인용문을 보면 모든 것은 중공당이 조직지도 하였으며 회의를 이끌어간 것도 역시 중국공산당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명백한 왜곡이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건 중국공산당 산하 동만특위에서 겨월명월구회의의 결정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대처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인용문의 맨 마지막 문장 “명월구회의는 동만의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들의 정신을 분발시켰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동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며 항일구국투쟁의 새로운 앙양기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조직적 토대를 마련하여주었습니다.”라는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동만의 어떤 공산당이며 공청단인지 그 구성원들이 중국인들인지 조선인들인지 구분조차 해놓지 않고 있다. 회의 참가자 구성원을 보면 아마도 조선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북측 자료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 결국 조선인들을 중국공산당이 주도하여 이끌어갔다는 이야기가 되며 젊은 조선인 투쟁가들은 중국공산당의 지시에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밖에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북측 자료를 보면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조선인들의 반일 · 항일무장투쟁과 조선의 혁명에 대해 말 하고 있다. 조-중간에는 함께 투쟁을 하는 연대에 의미를 두고 있지 결코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조선의 젊은 투사들이 받아들였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북측의 입장이며 자료로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자료를 대하고 분석을 해야 한다. 후일 상세하겠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에서 겨울명월구회의를 이끌었다고 하는 동장영은 조선인 투사들의 커다란 희생을 가져온 《반민생단투쟁》을 이끈 인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상세할 예정이기에 여기서 그친다.
다만 위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을 하고 만주의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 중국공산당과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이 연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일 수 있는 토대가 된 회의였다는 점이다. 《겨울명월구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중국공산당만주성위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조선의 항일투사들과 연대하여 함께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에 가치와 의미를 둘 수 있다.
②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남측자료
1931년 12월 열린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남측 자료 역시 그리 상세한 것은 아니다. 그저 간략히 언급을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도 중국측 자료만 분석대상으로 삼았으며, 북축에 대한 언급은 부정적인 시각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해는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를 하는 조선족들이나 남측 학자들 역시 처한 상황이나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술자료는 객관적이고 사실에 근거해서 여러 자료들을 분석하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 점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나 남측 학술자료는 대단히 미흡하다.
비록 미흡하지만 아래에서 남측자료를 인용하여 분석해보기로 한다.
사진2-1,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당시의 가옥전경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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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2. 겨울명월구회의가 열렸던 당시의 가옥전경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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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동만의 분위기 속에서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났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9월 22일 국민당(國民黨) 정부를 타도하고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혁명전쟁의 전개를 호소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임무로 소비에트구의 확대와 소비에트 혁명 노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공산당에서는 “만주사변이 일제의 중국 침략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민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9월 22일의 결의문에 “파업과 파시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점령에 반대하라” “유격전쟁을 일으키라” 등의 슬로건을 미미하게나마 내놓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중공당 중앙위는 ‘반일(反日)’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주에서 동북군벌계통의 군대들을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인 대일무력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당연히 중공당에서도 반일항쟁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931년 10월 12일 중공당 중앙위는 만주성위에 보내는 사병공작에 관한 지시 속에서 항일유격대의 조직을 명확하게 제시하게 되었다. 중앙위의 지시를 받은 만주성위에서는 1831년 11월 중순 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서의 항일유격대의 창건을 결정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정세가 전개되는 가운데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파견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중국인 동장영(童長榮)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주 각 현 당·단원 적극분자회의’를 소집하였다. 연길현·화령현·왕청현·훈춘현·안도현에서 온 공산당 간부 약 40명이 참가하여 10일간이나 계속된 이 회의는 중공당 중앙위와 만주성위에서 제출한 유격대 창건에 관한 지시를 토론한 뒤 동만에서도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전근거지를 만들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명월구회의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김일성이 이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전근거지 창설 방침을 밝히는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들이 이 회의의 소집 책임자를 동장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김일성의 당시 직위(안도현의 당 간부로 추정된다)로 보아 결코 그가 회의를 소집하거나 주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 문헌 중 명월구회의가 처음 등장하는 백봉의『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1931년 11월 장군의 참가하에 명월구회의가 열렸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활동지역인 안도현의 당 간부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의 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항일무장투쟁 ②/근현대사 중에서〉
위 인용문을 봐서도 알 수 있듯이 1931년 9월 18일에 발발한 만주사변 직후까지만 해도 중국공산당차원에서는 이에 대처하여 강력하게 대일 항쟁에 나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지 못하였다. 물론 인용문에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9월 22일 국민당(國民黨) 정부를 타도하고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혁명전쟁의 전개를 호소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임무로 소비에트구의 확대와 소비에트 혁명 노선을 제기하였다.”라고 언급을 했듯이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에 행태에 대해 반대하여 민족혁명전쟁의 전개를 호소하기는 하였지만 전면적이고도 강력하게 투쟁을 하거나 항전으로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인용문을 보면 중국공산당차원에서 반제민족투쟁을 전개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중국공산당차원의 전국적인 항쟁국면으로까지 확대시킬 정도의 인식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공산당에서는 ‘만주사변이 일제의 중국 침략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민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여 당시 만주사변을 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인식이 절박하다거나 급박한 상황으로까지 보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용문은 “비록 9월 22일의 결의문에 ‘파업과 파시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점령에 반대하라’ ‘유격전쟁을 일으키라’ 등의 슬로건을 미미하게나마 내놓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중공당 중앙위는 ‘반일(反日)’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았다.”고 지적을 하면서 1931년 9월 말까지의 중국공산당차원에서 만주사변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안일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1931년 9월 말까지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만주점령에 대해 중국공산당차원에서 전면적이고도 강력하게 대응을 하지 않았는데 그보다 겨우 2달 후에 열린 《겨울명월구회의》를 어떻게 주제를 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겠는가. 《겨울명월구회의》에 참석한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지역만 해도 드넓은 동만일대 모두에 걸쳐 있으며, 참가자들 또한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었는데 그들이 회의에 참석을 하기위해서는 동원을 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기록을 보면 회의에 참석한 조선인들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동원을 하였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한 답으로 그동안 우리가 이전 장들에서 상세하게 분석한 것처럼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꾸려놓은 조직성원들을 동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본다. 물론 북측 자료 역시 이러한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다.
더구나 위에서 인용한 남측자료에서는 “그러나 만주에서 동북군벌계통의 군대들을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인 대일무력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당연히 중공당에서도 반일항쟁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여 중국공산당은 만주사변직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대한 반일행동지침은 능동적인 것이 못되고 만주지역에서 반일항전에 수동적으로 대처했다고까지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물론 1931년 11월 중순 들어서서는 중국공산당차원에서 일본침략자들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였다. 이에 대한 인용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이에 1931년 10월 12일 중공당 중앙위는 만주성위에 보내는 사병공작에 관한 지시 속에서 항일유격대의 조직을 명확하게 제시하게 되었다. 중앙위의 지시를 받은 만주성위에서는 1831(1931년의 오타임)년 11월 중순 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서의 항일유격대의 창건을 결정하였다.”
라고 하여
그 해 11월 중순에 들어서서는 중국공산당차원에서 대일항전에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말 해주고 있다. 11월 중순이라면 겨울명월구회의가 개최되기 한 달도 못되는 시기이다. 그 짧은 기간에 명월구회의에 참석할 인원들을 소집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더구나 회의 참석인원들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에 가입을 하지 않은 비공산당원들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물론 11월 당시 유격대를 창건하기로 만주성위차원에서 결정하기는 하였지만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기로 하였다고 하여 유격대창건에 참여할 성원들에 대한 조직사업이 되어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물론 북측 자료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중공당 만주서위차원에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동장영이 회의를 위해 안도로 파견되어왔다는 사실에 대해 기록을 하였다. 하지만 동장영은 그때까지만 해도 동만사정에 어두워서 회의장소를 오던 도중 밀정들의 밀고에 의해 경찰서에 잡혀서 감옥살이신세를 하였다. 이러한 동장영이 어떻게 겨울명월구회의를 주제할 수 있으며 또 동만과 북만 그리고 남만일대에 유격대를 창건할 수 있는 안(案)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다음 장에서 논하겠지만 여기서 당시 상황을 비교하기 위해 관련된 사실에 대해 북측자료를 인용하도록 한다.
❝ 특위서기로 임명된 동장영도 일본군대의 《토벌》에 죽을번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룡정시가지에 들어와있으면서 나를 만나려고 하였다.
밀정들이 우글거리는 룡정시가지에 들어가는것은 위험한 일이였으므로 나는 그를 명월구로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만특위에서는 아직 간도실정에 어두운 동장영이 특위가 이동된것도 모르고 그 행방을 수소문하느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밀정들에게 걸려들어 감방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뜻밖의 소식은 나를 실망케 하였다. 만주성당 서기 라등현과 성당군사위원회 서기 양림은 9.18사변후 심양을 떠나 행처를 감추고있었고 양정우는 아직 감옥에 갇혀있는 몸이여서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
〈세기와 더불어 무장에는 무장으로 중에서〉
관련사실에 대한 인용된 북측 자료를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동만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동장영 뿐 아니라 대다수 중국공산당 동만 소속의 지도자들은 1931년 12월 중순에 개최된 《겨울명월구회의》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중국공산당의 기록이나 회의개최를 위한 지시문만을 근거로 해서 당시 열린 《겨울명월구회의》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소속의 동만특위에서 주최하고 전적으로 전담을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이는 1932년 초부터 동만 각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창건되기 시작한 유격대조직에 대한 역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지역사정 특히 인민들의 사정은 물론이고 지리사정에 대한 것조차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유격대창건을 주도할 수 있겠는가. 《겨울명월구회의》를 대할 때에는 이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남측 자료를 좀 더 분석해보기로 한다. 남측자료는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새로운 정세가 전개되는 가운데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파견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중국인 동장영(童長榮)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주 각 현 당·단원 적극분자회의’를 소집하였다. 연길현·화령현·왕청현·훈춘현·안도현에서 온 공산당 간부 약 40명이 참가하여 10일간이나 계속된 이 회의는 중공당 중앙위와 만주성위에서 제출한 유격대 창건에 관한 지시를 토론한 뒤 동만에서도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전근거지를 만들 것을 결정하였다.”
라고 하여
당시 열렸던 회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물론 남측자료에서도 “ 중공당 만주성위에서 파견된 동만특위 선임서기인 중국인 동장영(童長榮)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주 각 현 당·단원 적극분자회의’를 소집하였다.”라고 하면서 당 회의를 중국공산당이 소집하고 개최를 하였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인용문은 “연길현·화령현(화룡현의 오타)·왕청현·훈춘현·안도현에서 온 공산당 간부 약 40명이 참가하였다.”고 하여 당시 드넓은 동만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성원들이 모두 참가하였음을 말 하고 있다. 연길 · 화룡 · 왕청 · 훈춘 · 안도는 현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에서 돈화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다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위 북측 자료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동만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동장영이 《겨울명월구회의》 소집하고 주최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예의 남측자료들의 북측 항일투쟁자료에 대한 불신을 인용문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명월구회의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은 김일성이 이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전근거지 창설 방침을 밝히는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들이 이 회의의 소집 책임자를 동장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김일성의 당시 직위(안도현의 당 간부로 추정된다)로 보아 결코 그가 회의를 소집하거나 주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 문헌 중 명월구회의가 처음 등장하는 백봉의『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1931년 11월 장군의 참가하에 명월구회의가 열렸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활동지역인 안도현의 당 간부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면서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북측의 자료를 불신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을 했듯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소속 동만특위 서기로 파견되어온 동장영이 동만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회의를 소집하고 주최를 했겠는가. 물론 중국에서는 인용문에서처럼 기록할 수 있다. 어차피 아무리 우호친선을 강조한다고 해도 《내 나라 우선주의》를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인용하고 있는 중국측 자료에는 구체성과 사실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근거가 대단히 미약하다. 다만 회의개최를 지시한 지시문과 이에 대한 중국측 자료만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북측의 자료에서는 회의 개최 전후로 한 모든 상황들이 대단히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회의를 준비해가는 과정, 회의도중 논의되었던 사항, 그리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 뿐 아니라 회의에 임하는 성원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록해놓고 있다.
물론 다음 장에서 《겨울명월구회의》와 관련된 북측 자료를 상세하게 분석하겠지만 북측의 자료에는 회의전후로 조성된 동만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일제와 그 주구들의 동정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회의에 참석하는 성원들에 대해 아주 세세한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 또 회의 의제는 무엇을 위해 정해지는 것인가. 회의 진행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회의의제가 결정이 되고 나면 이를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까지 언급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음 장에서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북측자료를 분석하고 또 결론지을 때 또 다시 언급하겠지만 북측에서는 오늘 현 시점에까지도 《겨울명월구회의》를 《카륜회의》와 함께 북의 선군정치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회의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 나라의 변할 수 없는 정치사상과 연관된 사안을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남의 것을 가져다가 과연 국가적 차원에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온 누리 어느 민족이나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체》와 《자주》를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 북에서 남의 나라가 주최하고 진행한 회의를 가져다가 자신들의 국가적 차원에서 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나 남측자료에서 언급하고 있는 회의 주체에 대한 문제는 크게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다만 두 자료 모두 《겨울명월구회의》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 즉 당 회의를 통해 조-중인민들의 반일 · 항일공동투쟁을 본격적으로 진행해나가는데 있어 분기점이 되었다는 것과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한 방도가 논의되고 결의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이견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북측 자료 역시 동일한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