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렬 선생께 드리는 글월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백 기 완
얼마 앞서 때속(감옥)에 선생님을 뵙고 나오면서 내 눈앞이 야릇하게 아른거렸습니다.
내 눈앞에서 선생님이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껌뻑 거려도 한상렬, 다시 눈을 비벼도 한상렬.
바로 그날 밤 꿈입니다.
이참으로부터 예순여섯 해 앞서 헤어졌던 저 노녘(북쪽) 어머니 꿈인데, 글쎄 반갑다고 달겨드는 저를 밀어내시더니만 물푸레 채찍을 높이 들며 종아리를 걷으라는 겁니다.
“어머니, 제가 기완이인데 어째 이러십니까 어머니…”
그래도 눈에 불을 밝히시며 종아리를 걷게 하시고는 피가 철철 나도록 때리시는 겁니다.
“네 이놈, 어찌해서 이 어미와 매긴 말을 어겼드냐 이놈, 네놈이 서울 가서 퉁차기(공차기) 뽀덜(선수)이 돼서 돌아오겠노라고 하질 않았드냐. 그런데 어쩐 일로 다리도 못 쓰고 허리도 못 쓰는 나간이(장애인) 늙은이가 돼서 돌아왔드냐 이놈.
이제라도 다시 돌아가 퉁차기 뽀덜(공차기 선수)이 돼서 돌아오던가, 아니면 그때 그 예순여섯 해 앞서처럼 사랑스러운 어린 기완이가 되든가 그래야지 이놈.” 그러시면서 한없이 때리고 또 때리는 겁니다.
저는 쓰러져서도 울부짖었습니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서울이라는 데를 가보니까 돈이 없으면 퉁차기 뽀덜이 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오라 굶어죽어도 누구하나 눈하나 까딱하질 않드라구요.
그래서 퉁차기 뽀덜은 못되었지만서도 하지만 어머니, 저는 돈이 없으면 타고난 슬멋(재주)도 살릴 수가 없는 이 잘못된 벗나래(세상)를 발로 차고 또 차느라 이렇게 늙었지만 어머니, 저는 그때 어머니와 매긴 말매(약속)를 지켰습니다.
‘모래를 씹는 한이 있어도 굶주림 따위엔 마땅쇠(결코) 꿇지 말라’ 시던 어머니 말씀대로 이 주먹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머니,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저를 한 번도 안아주시지도 않고 그냥 가시기에 그냥 따라가며 어머니, 어머니 …” 그러다가 깨어보니 꿈.
그 꿈에서 깨어나서도 한참을 울면서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처럼 못난 놈은 없다, 나 같은 것이 어찌 사람이드냐’ 하고 집사람이 옆에 있거나 말거나 눌데(방) 바닥을 치며 생각했습니다.
한상렬 선생이야말로 사내다운 사람, 어먹한(위대한) 분이라고.
나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는 저 노녘땅을 마치 이웃 나들이처럼 구석구석을 아니 가본 데가 없으니 무슨 한이 있을까.
그렇다, 한상렬 선생은 ‘서돌’이라고 무릎을 쳤습니다.
서돌이라니 무슨 말일까요.
서돌이란 짓밟힐수록 스스로 지피는 쪼매난 불씨입니다. 그 불씨로 하여 눈앞을 가리는 막패(암흑)를 가르고 스스로 일어날뿐더러(부활) 그렇게 일어나서는 바로 제 빛으로 하여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도 길을 내는(만드는) 알기(주체)를 이르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한상렬 선생은 사갈니(죄인)가 아닙니다.
스스로 지피는 불씨, 서돌로 사시는 분의 불을 끌 수 있는 값어치는 이 사람 사는 누룸(자연)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그건 막심(폭력)이지요. 사람과 사람이 일구는 갈마(역사)가 쓸어버려야할 사갈짓(죄악)은 막심일 뿐이라니까요.
저는 오늘도 비구름이 덮인 저 노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음을 숨기고 싶질 않습니다.
이제 제가 살아있는 동안 저 노녘 어딘가에 누워계실 제 어머니를 찾아뵈올 날은 있을 것 같질 않습니다. 그래서 거덜난 가슴을 마구 쥐어뜯곤 하지만 그래도 한상렬 선생 같은 분이 그곳을 다녀올 것이면 그 옷자락에 이내 못난 한숨도 함께 다녀왔다는 생각으로 선생님의 열린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한상렬 선생, 선생은 이참 때 속에 갇혀있는 게 아니외다. 바로 제 옆에 계시는 것 같아 불러보는 이 한갓된 마음 널리 살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