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똘똘 뭉치지만,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면 삼삼오오(三三五五) 분열하게 되어 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이루어낸 서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정 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채택한 서인들은 평안도 가도(椵島)에 주둔하고서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던 명의 장수 모문룡에게 병력과 군량을 왕창 실어 보내는 한편 후금(後金)과의 사신 왕래를 끊어버렸다.자연 조선에 대한 후금의 의구심이 깊어 갈 때 1624년 '이괄의 난' 이 일어났다.
인조(仁祖)가 즉위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서였다.
이괄(李适, 1570~1624)은 자존심이 강한 무과 출신의 뛰어난 장수였다.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반정을 성공케 했던 인물이다
반정이 일어났을 때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金瑬) 였으나, 반정군의 지휘는 경력이 풍부했던 이괄(李适)이 맡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이괄은 반정에서 1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정 후 논공행상에서 김류는 1등 공신이 되었고, 이괄(李适)은 2등 공신이 되었다
왜냐구요?
김여물의 아들이자 김경징의 애비인 기회주의자 김류와 이괄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
자연히 이괄(李适)의 불만은 컸다.
반정 직후 인조는 병조판서를 기대하고 있던 이괄(李适)을 평안도 절도사로 임명했다.이괄(李适)이 부임한 직후, 이괄이 한명련, 기자헌 등과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문회와 이우가 밀고를 했다
그런데 이 역모 고변에 이괄 (李适)이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괄의 아들 이전(李栴)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괄(李适)은 추국결과가 끝날 때까지 동향을 두고 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이전(李栴) 잡아 올리라는 인조의 명이 떨어졌다. 제 아들이 역모 혐의로 잡혀가면 집안이 모조리 사망인데 어느 아비가 그 꼴을 팔짱 끼고 구경만할 것인가?
더구나 아들 전(旃)은 사대부들과 사귀다가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하였고 이 개탄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았으니 이괄(李适)은 열이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 나에게는 자식이 하나 밖에 없소
그런데 그 아들을 잡아 가두려고 금부도사가 왔소
나를 역적으로 몰았으니,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일어서려 하오.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소!" 라며 군사를 일으켰다
이전(李旃)을 잡으러 금부도사가 내려오자,
이괄(李适)은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금부도사를 한 칼에 베어 죽인 다음
평안도 토병과 전라도에서 올라온 부방군 1만 2,000명, 그리고 일대의 항왜 병력을 이끌고 남하했다.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문회와 이우의 고변을 조사한 결과 무고(誣告)임이 밝혀져서 오히려 고변한 사람들이 처형되었어야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이들을 조종하던 서인 세력, 즉 반정세력들의 반대에 부딪쳐 고변한 이들은 무사했다
대신 이괄(李适)을 해임하고 아들 이전(李旃)과 함께 이괄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국문을 해야 한다고 서인 세력들은 난리를 쳤다.결국 이괄(李适)의 아들 이전
(李旃)의 역모사건은 중앙에 있던 서인 세력들이 변방에서 막강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이괄(李适)을 제거하려고 꾸민 조작 역모였던 것이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그를 막았으나 잘 훈련된 이괄(李适)의 군사들에게는 적수가 될 수 없었고, 이괄은 여러 고을들을 함락시켰다.
이괄(李适)은 샛길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귀(李貴)에게 군사를 내주고 임진강을 막게 했으나 이귀의 군사 역시 이괄(李适)의 군사를 당해내지 못했다.도읍인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는 한강을 건너 공주로 내려갔다.
네가지 없기로 조선 왕 중에서 첫째가라면 서러울 인조는 얼마나 급했는지 가도(椵島)에 주둔해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부산의 왜관에 머물러 있던 왜인들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웠었다
인조(仁祖)가 한양을 떠난 지 이틀 만에 이괄(李适)은 큰 힘 들이지 않고 한양 입성에 성공했다
이괄(李适)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한양으로 들어올 무렵 안주방서사 정충신(鄭忠信)은 도원수 장만을 찾아와 이괄의 난을 진압할 계책을 내놓았다
"저는 평소 이괄과 형제처럼 지냈으나, 그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저에게 군사를 주어 물리치게 해주십시요."
"이괄(李适)에게는 어떤 작전이 있겠소?"
"예. 이괄의 작전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곧장 한강을 건너 임금의 뒤를 추격한다면 전세가 어찌 될 지 알 수 없으며
둘째는 그가 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 명나라 장수 모문룡과 결탁하면 조정에서는 그를 쉽게 물리칠 수 없을 것이며 셋째는 한양으로 쳐들어가 빈 성만 차지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괄(李适)은 장차 어떤 작전으로 나올 것 같소?"
"이괄(李适)은 용맹하지만 계략이 없어 아무래도 세번째 작전으로 나올 것입니다.그의 작전대로 되면 관군과 반란군은 한양의 서문 밖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렇다면 북산을 먼저 차지하는 편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그러하니 군사들을 동원하여 북산을 빼앗기지 않도록 굳게 지켜야만 합니다."
장만은 정충신의 말을 믿고 그를 부원수로 임명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주고, 자신은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한양을 점령한 이괄(李适)은 정충신이 예견한 대로 한강을 건너 인조를 추격하지 않았고, 선조의 11번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세우고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임명하고 과거령을 내렸다.
이무렵 정충신은 서대문 밖 안재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이괄(李适)은 깜짝 놀라, "정충신은 장만보다 뛰어난 장수이다. 그가 북산에 진을 치면 우리는 낮은 쪽에 있게 되니 전세가 불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먼저 북산을 점령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그는 수천 명의 군사들을 지휘하여 북산으로 갔다
이때 남동풍이 불어 이괄(李适)의 군에게 유리했으므로 맹공을 퍼붓자 관군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재차 공격을 해왔다.싸움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오시(午時)를 넘기자 갑자기 바람이 북풍으로 변했다. 이때 정충신은 준비한 고춧가루를 군사들에게 뿌리라 명령했고
이괄(李适)의 군사들은 눈을 뜰 수 없어 동요하기 시작했다.정충신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반란군을 무너뜨렸다.그들은 성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한강을 건너 도주했다.
이때 중군 대장 남이흥(南以興)이 그를 추격하려 하자 정충신이 말렸다."추격하지 마시오
아마도 곧 누가 이괄(李适)의 목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니 우리는 도성으로 들어가서 백성들을 살피십시다."
그들이 도성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살피고 있을때 과연 정충신의 말대로 이괄과 함께 도망갔던 부하 장수 기익헌이 이괄(李适)의 수급을 가져와 정충신에게 바쳤다
공주로 내려갔던 인조는 정충신이 승리했다는 보고를 받고 한양으로 돌아왔고 이괄의 목을 팔도 각 고을에 돌리게 하였다. 이로써 이괄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조선 개국 후 한양이 처음으로 반군에게 점령당한 사건이 '이괄의 난'이었고, 그 후유증은 매우 컸다.
이괄(李适)의 난 이후 서북지방의 방어력은 현저히 약해졌으며, 조정은 무인들을 의심하여 집중적으로 기찰했다
무인들에 대한 기찰이 심해지자 무인들은 군사훈련을 기피했고, 그 후유증은 후금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대로 나타났다. 이괄(李适)의 난을 일으켰던 반란군 중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쳐 광해군이 부당하게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호소해 후금이 쳐들어오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때 생존해 후금으로 도망친 이괄(李适)의 부하 중 한윤은 훗날 정묘호란 때 길잡이 역할을 하는 후금의 충견이 되었다.또한 '이괄의 난'은 북방 지역의 약화된 방어력 때문에 후금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아무도 막지 못해서 후금의 군대가 국경에서 도성까지 무인지경을 가듯이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정묘, 병자호란의 단초를 만드는 계기가 바로 '이괄의 난'이었다.
3년 후인 1627년 이인거의 역모사건이 터졌고, 그 다음 해에 유효립의 역모 사건, 그 다음 해에 이충경의 난 등 크고 작은 반란의 음모가 이어졌다.
인조(仁祖)와 반정 공신들은 사대부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던 것이다.
쿠데타 세력의 내부 분열인 '이괄의 난' 은 엉뚱하게도 북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괄(李适)에 의하여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 인조와 서인 정권은 감옥에 갇혀 있던 전 영의정 기자헌 등 대부분의 정치범 49명을 이괄(李适)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 하여 모조리 처형하고 공주로 도망쳤던 것이었다.이로써 세력이 미약해진 북인
(北人)들은 남인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이괄의 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