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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영의 생각’의 대상(1)
우리는 일반적인 요점이자 이 책의 핵심과도 같은 항목 곧 ‘은혜의 샘과 그에 상응하는 도리(의무)’의 항목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이지와 정서로 인해, 신령하고 영적인 하늘에 속한 것들을 생각할 때 거룩함을 입은 영적 이지의 인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라면 선한 이지의 의도는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마음의 연약과 변덕스러움 역시 의지와 정서가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요소가 됩니다.
사람들은 곧잘 선한 뜻을 세우곤 하지만 그 뜻을 이루는 방식은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숙고해 볼 것입니다. 하나는 신령한 생각들이 초점을 맞추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또 다른 하나는 그 신령한 생각들을 끝까지 견지하게 열매 맺게 할 방식이 무엇인지 알아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미6:9).
‘지혜롭고 신실한 사람’이라면, 그 부르심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순응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가운데 마땅히 행할 도리를 다하려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섭리와 경륜의 말씀이 무엇인지 지혜롭게 숙고해야 합니다. 그 경륜에 대하여 옳지 못한 해석을 하는 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상에서 누리는 것의 불확실함과 덧없음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벨사살 왕이 당할 일을 알리기 위해 나타난 손가락이 쓴 글을 읽거나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바로 밝혀졌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그 뜻을 알리는 소리와 징조가 우리에게 닥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면밀히 탐사해 보십시오. 거룩의 시각으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불쾌하시도록 만들었던 죄의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섭리적인 상황들을 통해 하나님의 노와 불쾌하심의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섭리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폭풍으로 인해 침몰할 위기에 빠진 배에 탄 사람들 중에서 그 폭풍의 섭리의 책임은 정작 그 배에서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나에게 있었습니다(욘1:7).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지는 인생의 풍랑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한 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은밀한 죄로 말미암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안일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거룩하게 순응하십시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하나님의 지혜에 거룩하게 순응시키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처를 요동케 하시고 눈에 보이던 삶의 방편들을 제거하시는 섭리를 통해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의 덧없음과 불확실함을 선언하시곤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집착하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신령한 것들을 자주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그러한 것들을 여러분 앞에 늘 두도록 하십시오. 그 신령한 일들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해내야 할 임무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십시오. 그런 자세를 견지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징계의 섭리를 통하여 부르시는 명백한 음성을 만홀히 여기는 여러분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가져오는 화는 너무도 두려운 것입니다(잠1:24-31, 사65:12, 66:4). 어느 누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여러분 자신이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아야 하는 중요한 때입니다. 현재 주어진 여러분의 형편에 따라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런 은혜가 여러분 속에 존재한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행할 거룩한 의무들에 대하여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해야 할 또 다른 도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에서 우리의 생각을 떼어 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모르고 그렇게 할 동기조차 없다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일에 있어서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있습니까! 세상의 일을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누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동안 여러분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을 모르십니까? 한 가지의 부정적인 증거가 그들의 백 가지 증거를 무익한 것으로 날려버리고 맙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한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가 했다고 한 ‘백 가지의 일’은 그 ‘부족한 한 가지’로 인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일을 하였고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있어도 여러분이 만일 영적으로 생각하는 면에서 부족하다면, 애석하게도 여러분이 한 많은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강렬함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점점 더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싶어 하는 소원이 어찌나 강렬한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 모두를 복종시키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고민하는 일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질병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걸린 ‘영혼의 질병’에 모든 생각을 집중하여 치료를 위한 방안을 찾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생각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미련한 안일입니까.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잠23:35).
마음의 정서 속에서 자리하고 있던 정욕은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에 관한 생각들로 가득 채우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의 상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 상상들은 사람들이 마땅한 도리에 마음을 쓰지 못하도록 하고 그 마음을 죄로 기울어지게 합니다(약1:14). 상상은 죄악의 즐거움을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정욕의 자극을 받은 상상으로 부단하게 죄의 즐거움을 그려보고, 죄를 행할 생각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되는 것입니다(롬13:14). 그러한 일은 물론 사탄의 역사를 통해서도 일어납니다. 사탄은 자기의 간계를 총동원하여 유혹의 대상에 대하여 무익한 생각들을 무수하게 일으키면서 그 시험이 계속 유지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 요인이 무엇이든 간에, 죄에 대한 무익한 상상들이 일어나 마음이 그 죄악을 즐거워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누구도 죄를 막을 외적인 제어력(制御力)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기회가 주어지는 즉시 죄를 행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비행(卑行)을 궁리하고 있으면, 그 비행을 저지를 힘과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그 비행을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미2:1). 죄를 자신들의 힘으로 정복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죄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죄를 즐기는 은밀한 정욕 때문에 죄와의 싸움에서 넉넉히 이기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독(毒) 이빨’을 가진 죄는 한번 무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에 충분한 독을 뿜어 넣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죄를 은밀하게 생각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마음이 깨끗지 못한 사람에게라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마땅한 도리들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시험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메두사의 머리를 본 사람처럼 순식간에 마땅한 도리에 대해 돌같이 굳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은혜의 작용은 순식간에 멈추어 버립니다. 어느새 그 시험에 먹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은혜만이 그를 건져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지금 어떤 시험과 씨름을 하고 있다면, 저는 그들에게 그 시험의 대상 자체에 생각을 집중하지 말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간교한 사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부패의 본성을 동원하여 현재 그 시험의 대상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다시금 정욕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불어 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벗어나야 할 그 죄와 새롭게 타협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빠져 들어간 함정과 처하게 된 위험을 벗어날 방도에 대해서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죄의 책임’이 무엇인지 생각하심으로 겸비해지십시오. ‘죄의 가공할 능력’을 생각하며 죄를 이길 힘 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이 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으려면 세상의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즉 ‘죄의 소재’가 될 만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생각을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게 하는 시험에서 벗어날 방도들을 부단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시험의 처지에서 벗어나게 할 위대한 방도를 알고 있는 이와 가까이 하십시오. “저가…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였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히2:17-18). 시험에서 벗어나는 오직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긴박한 시험의 때에 그 시험을 넉넉히 이기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든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험의 세력 안에 더욱 쉽게 넘어지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맡은 일들을 통해서 자주 시험에 빠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크게 인정해 주기 때문에 영적인 교만과 자기 우월감의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부(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찾아오는 특별한 시험거리들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때문에 그들만의 시험거리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체질 자체’가 시험의 함정이 되기도 하고, ‘교제하는 모임’에도 시험거리가 존재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각각 처한 환경이나 상황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시험거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깊이 관찰하십시오. 지혜를 동원하여 시험이 찾아오는 과정과 경로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왜, 어떻게 시험이 찾아와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시험에서 벗어나는 길뿐만 아니라 그 시험에 다시는 빠지지 않게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믿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과 능력을 부단히 묵상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은 강력해지고 시험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믿는 것’을 우리의 영적 생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하늘에 있는 영원한 것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은혜의 생활과 마땅한 도리를 다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합당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곧 하늘에 속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그리고 ‘영의 생각’은 모두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1-3).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은 자들은 마땅히 그 생각을 위의 것에 집중시켜야 합당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영광스런 일들에 참예하는 오직 유일한 방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하늘만이 우리가 소망의 닻을 내릴 유일한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히6:19-20).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점에서 크게 부족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빛이 모자랍니다. 그러한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생각을 절대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한다면 그곳에 대한 소식을 알고 싶어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우리의 거처가 될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별 마음(관심)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여러분, 지금 당장 하늘의 영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위에 있는 영원한 것들과 하늘에 속한 것들을 생각하려고 부단히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영적 신자들은 하늘의 영원한 생명과 그 영광의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 확신으로 이 땅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의 고난과 슬픔과 시험을 이겨내며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다가올 복된 영광과 하늘의 속한 것들을 여러분의 가장 주요한 대상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묵상하십시오.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속한 일들을 진지하고 일관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며, 영적인 것들을 통해 큰 만족을 느낍니다. 우리 믿음의 정당한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믿음을 바르게 행사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생각을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성장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을 부단하게 숙고하는 것 속에는 ‘믿음의 양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것을 통해 더욱 강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과 증거라’는 말씀처럼 믿음은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한 하늘의 실상을 더욱 확실히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장 달콤한 영광의 첫 열매로 귀히 여길 수 있기를 간구하십시오.
믿음은 우리 소망의 활력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영광스러운 은혜입니다. 성경은 복된 여러 효력들이 바로 그 소망의 은혜를 통하여 열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은혜가 신자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은혜는 곧 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요약됩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한없는 영광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소망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소망이란 그저 우리가 바라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상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소망의 은혜는 신뢰와 확신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대입니다. 그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강렬한 소원인 것입니다. 믿음과 확신의 열매가 소망의 은혜입니다. 소망이 가지는 궁극의 목적은 영원한 영광입니다(골1:27, 롬5:2).
우리 속에 새 힘을 주는 소망의 은혜는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힘 있고 활력 넘치게 작용하여 위력을 발휘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완벽한 준비를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현세에 받는 고난과 하늘의 영광은 본질상 비교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에 있는 것들을 묵상하는 것만이 장차 불어 닥칠 역경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 믿음이 매 순간 그를 지탱해 주고 새로운 힘을 얻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히 본을 보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분이 보여주신 본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확실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영원한 영광이 우리 앞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함으로 모든 고난 중에서 새 힘을 얻고,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입니다.
불 시험과 큰 환난을 지나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하늘의 복된 영혼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 땅에서 살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소유했던 사람들이며 고난 중에도 찬양하고 즐거워했던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는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6). 그 영광의 광경을 보는 것이 거룩한 영혼을 일으켜 세워 죽음의 고통마저도 다 무시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이들에게 사도와 같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6:9). 복음의 영광의 열매를 알기만 한다면, 자기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만을 최고의 만족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