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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미드웨이해전(Battle of Midway, 1942년)
미드웨이해전은, 제2차세계대전 중인 쇼와(昭和)17년(1942년)6월5일(미국표준시간으로는 6월4일)부터 7일에 걸쳐서 미드웨이섬을 두고 벌어진 해전. 미드웨이섬의 공략를 노리는 일본해군을 미국해군이 반격하는 형태로 발생하였다. 일본해군의 기동부대와 미국의 기동부대 및 미드웨이섬기지항공부대와의 항공전의 결과, 일본해군은 기동부대의 항공모함 4척과 그 함재기를 다수를 일거에 상실하는 대손해를 입고, 이 전쟁에 있어서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미드웨이해전은 미드웨이작전(MI작전)의 전초전이며, 이 패배로 동 작전은 중지되었다.
미드웨이해전은, 제2차세계대전 중인 쇼와(昭和)17년(1942년)6월5일(미국표준시간으로는 6월4일)부터 7일에 걸쳐서 미드웨이섬을 두고 벌어진 해전. 미드웨이섬의 공략를 노리는 일본해군을 미국해군이 반격하는 형태로 발생하였다. 일본해군의 기동부대와 미국의 기동부대 및 미드웨이섬기지항공부대와의 항공전의 결과, 일본해군은 기동부대의 항공모함 4척과 그 함재기를 다수를 일거에 상실하는 대손해를 입고, 이 전쟁에 있어서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미드웨이해전은 미드웨이작전(MI작전)의 전초전이며, 이 패배로 동 작전은 중지되었다.
일본의 작전결정배경
하와이공략작전의 착상
태평양전쟁 개전 전, 일본해군은 대미작전에 있어서 기본적인 방침으로서 수세의 요격작전을 채택하고 있었다. 연합함대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대장은 이전부터 이러한 수세요격방침에 의문을 가졌고, 독자적인 대미작전구상으로서 적극적인 공세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오시마이치타로-(大島一太郎)대위(후에 대좌, 1928년(쇼와(昭和)3년)해군수뢰학교 고등과학생)의 전후회상에 의하면, 1928년(쇼와(昭和)3년)에 해군수뢰학교에서「대미작전은 하와이를 공략하도록 하는 적극작전을 채택해야만 한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것은, 우선 국력에서 볼때 압도적인 열세아래 있는 일본이 수세를 채택하여도, 시기・방면등을 자주적으로 결정하여 우세한 전력(戦力)으로 공격하는 미국에게 승산이 없으며, 그리고 단기전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조기에 적의 약점을 두들김으로서 상대국의 전의를 상실시키는 방법밖에 승기를 찾지 못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게다가 야마모토장관은 태평양전쟁개전 전부터, 적항모부대가 일본을 항공공격한 경우, 국내에 대해 물질적인 타격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타격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점도 관계되어 있다. 오이카와(及川)해군대신앞으로의 서간, 쿠로시마(黒島)참모의 회상에 의하면, 야마모토장관의 미드웨이작전 제1의 노림수가 미국해군・미국국민의 사기를 상실시킴에 있던 점, 그리고 본토공습의 정신적인 타격이 크다고 인정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상당한 위험성을 승지한 상태에서 보아도 미국에 대하여 ,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공세를 추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진2
진주만공격직전인 미드웨이환초. 바로 앞이 비행장이 있는 이스트섬, 안쪽에 기타 군사시설이 있었던 샌드섬이 보인다.
미국해군은, 1941년(쇼와(昭和)16년)12월의 진주만공격에서 태평양함대주력인 전함부대가 행동불능이 된후, 가동상태에 있었던 기동부대를 중부태평양방면으로 출격시켜, 일본군거점에 대한 일격이탈전법에 의한 습격을 반복하였다. 그 때마다 일본군은 내습의 기도와 방면의 판단에 고민이 심하였다. 일본군은 마셜제도, 웨이크섬, 본토 어느 곳이나 경계조치를 취하고 있었으며, 더하여 전력(戦力)에 여유가 없었기에 초계는 불충분한 상태였다. 미군의 기습에 의한 피해는 적었지만 연합함대는 수동적인 작전의 곤란성을 인식하였다.
일본연합함대는, 진주만공격후에는 남방작전에 기동부대주력을 투입중이었지만, 실론섬공략작전안이 채용되지 않았기에, 연합함대막료는 제2단계 작전의 이행까지 남겨진 4주간동안 대체안을 작성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연합함대막료는 전쟁조기종결에 공헌할 수 있는 작전이 떠오르지 않았다. 연합함대막료는, 지금까지 제시한 작전안이 육군부대를 전용하기에 반대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해도 수세로 돌아가는 곤란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해상전력(戦力)만으로 진행하는 공세작전계획의 입안을 응급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쿠로시마 카메히토(黒島亀人)연합함대선임참모를 중심으로, 하와이공략을 전제로 한 작전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래서, 하와이작전의 전단계로서 떠오른 것이 미드웨이섬공략이었다.
미드웨이작전
미드웨이작전구상은, 미드웨이섬을 공략함에 의해 , 미국함대, 특히 항모기동부대를 꾀어 내 포착격멸함에 주안을 두었다. 일본군이 미군의 요점인 미드웨이섬을 점령할 경우, 군사상・국내정치상에서 미군은 이것을 전력을 다하여 탈환하려고 함은 명백하였으며, 현시점에서 호주방면에서 활동중인 미항모부대도 미드웨이근해에 출격할 확률은 높다고 일본해군은 계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정보분석결과, 미군의 항모전력(戦力)을 이하와 같이 추정하였다.
항모레인져는 대서양에서 활동중.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렉싱튼은 격침되었던 것으로 사료되며, 미국서해안에서 수리이라는 진술자도 있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태평양에 존재.
와스프의 태평양에의 존재여부에 관해서는 확증을 얻을 수 없다.
특설항모는 6척정도 완성, 반수는 태평양방면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나, 저속이기에 적극적 작전에는 사용할 수 없다.
이러한 사항을 감안한 일본군은, 미드웨이공격을 할 경우에 출현할 미군규모를, 「항모2-3척, 특설항모2-3척, 전함2척, 갑순양함(=순양전함?)4-5척, 을순양함(중순양함?)3-4척, 경순양함4척, 구축함30척, 잠수함25척」으로 판단하였다. 미군이 미드웨이섬에 해병대를 배비(配備)하고, 포대를 설치하여 방위력을 높이고 있음도 찰지(察知)하고 있었지만, 그 전력(戦力)은「비행정24기, 전투기11, 폭격기12, 해병대750, 포대20전후」또는「초계비행정2개중대, 육군폭격기1내지2중대, 전투기2개중대」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하와이에서「비행정60기, 폭격기100기, 전투기200기」의 증강도 있을 수 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미드웨이섬 점령시에는 미군기지항공대로부터 공습을 받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지만, 직엄(直掩)의 영식함상전투기와 대공포화로 배제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해병대3000명, 항공기150기의 미드웨이섬의 진짜 전력(戦力)을 안 것은, 항모부대가 전멸한 후에 포로의 심문결과에서였다
일본해군은, 미드웨이섬을 점령한 후의 유지는 극히 곤란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 작전은 미항모를 꾀어 내 격멸함을 목적으로 하며, 게다가 점령후에는 타방면에서 공세를 시도하여, 미군에게 미드웨이탈환의 여유를 주지 않으면 10월의 하와이공략작전까지 미드웨이섬을 확보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대본영(참모본부・군령부)와 연합함대사령부는 이 작전에 관하여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군령부는 일본국력에서 보면 하와이제도의 공략과 유지등이 불가능으로 판단하여, 오히려 인도양방면의 작전을 강화하여 영국을 궁지에 몰아놓고, 간접적으로 동맹국나치독일을 지원함을 구상하고 있었다. 군령부항공담당부원인 미요 타츠키치(三代辰吉)중좌는「만약 일본군이 미드웨이섬을 점령해도, 미함대는 정말로 출현할 것인가. 일본군의 보급로가 미군에게 차단되어, 피폐한 상태를 간단히 탈환당할뿐이 아닌가?」라는 점을 고려하여 반대하고, FS작전(뉴칼레도니아섬과 피지제도의 공략)을 중시하는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연합함대사령부의 쿠로시마(黒島)참모와 와타나베 야스지(渡辺安차)참모는, 야마모토장관이「이 작전이 인정받지 못한다면은 사령장관직을 사직함」이란 굳은 결의를 갖고 있음으로, 군령부와 절충하였다. 하지만, 이 논법은 진주만공격시에도 사용되었던 것이기에 이번에는 용이하게는 통용되지 않았고, 교섭은 암초에 부딪쳤다.
대본영해군부와의 교섭에 전망없음으로 판단한 와타나베참모는, 이토 세이이치(伊藤整一)군령부차장에게 직접 연합함대의 미드웨이작전안을 설명하고, 야마모토장관의 의향을 전하였다. 이토차장은 이것을 감안하여 좀더 심의를 진행하여, FS작전에 수정을 추가하여, 연합함대의 작전안을 채용함을 4월5일에 내부결정,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군령부총장의 인가도 얻어, 미드웨이섬의 점령 및 미항모부대의 포착격멸을 노리게 되었다.
군령부는 미드웨이작전과 병행하여 동시에 알류션공략작전(AL작전)진행안을 첨가하였다. AL작전의 목적은, 미국의 북방교통로의 진행을 저지하는 것으로, 미국과 소련간의 연락을 방해하여 시베리아에 미국항공부대가 진출함을 방해하려 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형폭격기가 개발되었다는 정보가 있었던차에 미국대형폭격기에 의한 토쿄공습을 당해, 그 일부가 기습에 성공하였음으로 알류션방면의 관심은 더욱 강하게 되었다. 도상연습에 있어서 알류션방면에서 미국의 최신대형폭격기가 수도공습을 감행하여, 그 일부가 기습에 성공한다는 결과가 나왔으며, 해군부도 연합함대도 이 방면에 대한 관심을 모으게 된 배경이 있었고, 연합함대도 이에 동의, 제2단계 작전의 전체모양이 굳어졌다. 알류션공략작전에는 미드웨이작전의 견제작전의 의미도 있었다고 하는 증언도 있다.
작전은, 미드웨이섬상륙일(N일)을 6월7일로 결정하고 일체(一切)를 계획하였다. 상륙용주정으로 적의 리프(해변)를 넘어서 상륙하기 위하여, 하현월(下弦月 : 달의 왼쪽 부분이 빛나는 달 : 활과 모양이 같다고 해서 붙여짐)이 월출하는 오전0시를 택하였다. 7월은 안개가 많고 상륙이 곤란하기에, 6월7일로 고정되었다. 상륙작전의 제공과 방비파괴는 3일전에 나구모함대가 항모6척으로 기습하므로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연합함대는 기습성공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미국이 일본의 기도를 찰지(察知)하여 기동부대를 미드웨이기지의 근변(近辺:가까운 주변)에 준비하고 있음은 고려되지 않았었다. 미기동부대의 반격은 바라던 바였지만, 미기동부대는 진주만에 있고 미드웨이기지공격후에 출현함을 전제로 작전을 계획하였다. 미드웨이섬점령후, 기지항공부대의 초계망으로 적기동부대를 발견, 1항함은 제2함대와 협력하여 적기동부대를 공격, 야마모토함대는 기회를 보아 참가하여 격멸한다는 산단이었다.
두리틀공습
1942년4월18일, 항모호넷은 미드웨이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합류하고, 제16임무부대는 일본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엔터프라이즈」은 항공지원을, 호넷은 일본본토로 접근, 지미・두리툴중좌가 지휘하는 B-25밋첼쌍발폭격기로 편성된 폭격대를 수송하는 역할분담이다. 폭격대는 「호넷」에서 발진후, 토쿄를 필두로 일본의 주요도시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제16임무부대는 4월18일의 아침에 이누보-사키(犬吠埼)동방에서 특설감시정 제23닛토-마루(日東丸)에게 발견되어, 윌리엄・헐시중장은 예정보다 빠른 공격대발함을 결의한다. 폭격대는 전날에 발함준비를 마치고 있었지만, 40노트(1시간에 1해리(1852미터)를 가는 속도)를 넘는 강풍과 30피트에 달하는 파도가 심한 파고(波高)가 되어, 호넷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두리틀대는 발진하였고, 09:20까지는 16기의 B-25는 모두 발함하였다.
B-25폭격대는 , 토쿄, 나고야, 오오사카를 12시간에 걸처서 산발적으로 폭격, 중국대륙으로 탈출후, 불시착방기(放棄)되었다. 실론앞바다해전에서 승리한 나구모기동부대는 타이완앞바다에서 제16임무부대추격명령을 수령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연료를 낭비할 뿐이었다.
공습에 의한 피해는 미소(微小)했지만, 일본본토상공에 미군기의 침입을 허용해 버린 것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미군이 항속거리가 긴 쌍발폭격기를 사용하였기에 대응책을 생각할 수 도 없었고, 육해군은 보다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국민사이에서는 불안이 퍼지고, 그 후 얼마동안은 적기내습의 오보가 나오고, 야마모토장관에게도 국민부터의 비난의 투서가 날라왔다.
야마모토장관은 이전부터 본토공습에 의한 물질적정신적인 영향을 중시하고 있었기에, 이미 내부결정하고 있었던 미드웨이공략작전의 필요를 이 공습에서 한층 더 느끼게 되었다. 연합함대항공참모사사키 아키라(佐々木彰)에 의하면 , 야마모토장관은 아군항모에 의한 하와이기습이 기도가능한 점에서 볼때, 초계병력이 불충분한 일본본토에 대해서도, 야마모토도 적 또한 기습을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이 공습에 의해 일본육군도 미드웨이작전・알류션작전을 중대시하게 되었으며, 육군병력은 파견에 동의, 미드웨이작전은 일본육해군의 총공격으로 발전하였다. 후지타 미츠오(淵田美津雄)는 쇼와(昭和)천황이 거주하는 토쿄를 폭격당함으로서 야마모토장관의 프라이드가 상처를 입고, 알류션에서 미드웨이에 걸친 항공초계선을 구축함으로서 토쿄에 대한 2번째의 미기동부대습격을 저지한다는 노림수가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치하야 마사타까(千早正隆)는 2번째인 두리틀공습을방지하기 위하여 미드웨이공략작전을 서두를 필요가 있으며, 항모즈이카쿠를 보유한 제5항공전대의 전력(戦力)이 회복함을 기다릴 수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도상연습
야마모토장관의 속내와는 반대로, 4월하순에 일본본토로 돌아온 제1항공함대(나구모기동부대)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개전이래 건조도크수리, 장기휴가도 없이 태평양을 분주(奔走)했었기에, 함・인원모두 피로가 쌓여 있었다. 게다가 「상당히 광범위한 전출입」이라는 인사이동으로 인해, 함정과 항공부대쌍방의 기량이 저하되고 있었다.
미드웨이해전후의 전투상보에서는 「각 병과 공히 훈련의 영역(=단계 : 즉, 베테랑이 아니란 이야기)을 벗어나지 못하고 특히 신입탑승원은 주간의 착함이 겨우 가능한 정도 」라고 평가하고 있다. 뇌격대는 「이 정도 기량을 가진 자가 산호해에서 현재와 같은 전과를 거둔 결과는 불가사의함」라고 강평(講評)될 정도임. 수평폭격과 급강하폭격은 만족스러운 훈련이 불가능하였으며, 전투기대는 기초훈련만으로, 편대훈련은 구(舊)탑승원의 일부가 하였을 뿐. 착함훈련은 훈련사용가능 항모가 카가뿐이었기에, 신입탑승원의 훈련이 우선시되어, 베테랑탑승원일지라도 황혼착함훈련을 한 자는 반정도였으며, 전투상보는「적정(敵情)에 관해선 거의 얻은 바 없으며, 특히 적항모의 현존수량, 그 소재는 최후까지 밝혀지지 않음. 요컨대 각함 각비행기 모두 훈련불충분으로 인해, 덧붙여 적정(敵情)불명확한 정황상태에서 작전에 참가함」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군령부에서 설명을 받았던 1항함참모장인 쿠사시카 타치노스케(草鹿龍之介)와 제2함대참모장인 시라이시 카즈다카(白石萬隆)는 두리틀공습소동직후인 관계로, 적기동부대내습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선입견에서 주목적을 미드웨이기지공략, 부목적을 적기동부대격파라고 해석하였다.
게다가 4월28일부터 1주간에 걸쳐서 전함야마토에서 진행된「연합함대제1단계작전전훈연구회」와 「제2단계 작전도상연습」에서는 , 일본군에 있어서 불안한 결과가 나왔다. 이 도상연습에 있어서 , 미드웨이공략작전의 피크시에 미항모부대가 출현하여, 함대전투가 진행되고, 일본항모에 큰 피해가 나오고, 공략작전속행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심판을 바꾸어서 피해를 줄이고 항모를 3척 남기어 속행시켰다. 항모카가는 폭탄9발 명중판정으로 침몰판정이 되었고, 우카기 마토메(宇垣纏)연합함대참모장은「9발 명중은 너무 많다」라 하며 폭탄명중3발로 수정시켜, 카가를 부활시켰다. 공략은 성공했지만, 계획보다 1주간 지연되었고, 함정의 연료가 부족하게 되어, 일부 구축함은 좌초되었다. 알류션방면에서는, 항모하야다카(隼鷹), 류-죠-(龍驤)가 짙은 안개속에서, 미군수상부대의 습격을 받아 격침판정을 받았다. 우카기는 「연합함대는 이와 같이 되지 않도록 작전을 지도함」이라고 명언(明言)하였다. 그리고 , 미기동부대가 하와이에서 출격해 올 가능성은 있었지만, 도상연습에서 미군을 담당한 마츠다 치아키(松田千秋)대좌를 미드웨이해전에 출격시키지 않았다.
전훈분과위원회에 있어서 , 우카기참모장은 쿠사카참모장에 대하여 「적에게 선제공습을 받을 경우, 혹은 육상공격시에, 적해상부대로부터 측면을 공격받았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본즉, 쿠사카참모장은「닥쳐올 가능성이 있는 일은 없는 것으로 처리함」으로 답변하였기에, 우카기참모장이 쿠사카참모장을 추궁하자, 겐다가 「함상공격기에 증조(増槽:항속거리를 늘리기 위해 기체 밖에 연료를 채운 예비탱크)를 장착한 정찰기를 450해리정도까지 연장시킬 수 있으며 근거리를 두고 2, 3기를 배당시킨다면, 이들과 순양함의 제로식수상정찰기를 사용하여 측면초계에 임하게 한다. 적에게 선제기회를 배앗겼을 경우에는, 그 시점 현재 상공에 있는전투기외에 전혀 방법없음」이러고 대답하였다. 그 때문에우카기참모장은 주위환기를 시키면서, 작전조율 전에 「제1항공함대는 미드웨이공격을 2단공격으로 하며 제2차는 적에 대비함」으로 정하였다. 미기동부대가 출현하였을 시에 반격하기 위하여, 반수는 어뢰장비이었지만, 쿠로시마 카메히토(黒島亀人)수석참모는 명령으로서 메모할 필요는 없다고 항공참모사사키 아키라(佐々木彰)에게 지시함.
제2함대장관콘도-노부타케(近藤 信竹)중장은 미항모가 거의 상처없이 남아 있으며, 미드웨이기지에도 적전력(戦力)이 있음에서 볼 때, 미드웨이작전을 중지하고, 미호(米豪=미국과 호주)차단에 집중해야 한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야마모토장관은 기습이 성공하면 패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콘도중장은 미드웨이섬을 점령해도 보급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카기참모장은 불가능하다면 수비대는 시설을 파괴하고 철퇴한다고 대답하여, 공략후의 보존유지, 보급에는 상정된 바가 없었다. 겐다는 병력이 너무 분산되어 목표를 어중간하게 해버리고, 집중이라는 병술(兵術)의 원칙에도 반하고 있다고 느꼈기에, 도상연습후인 연구회에서 연합함대참모 쿠로시마 카메히토(黒島亀人)에게「작전의 중점을 미국함대격멸에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알류션공격부대와 모든 작전가능한 병력을, 예를 들어 제5항공전대(즈이카쿠, 쇼-카쿠)가 참가가능한 상태까지 기다리더라도 미드웨이에 집중해야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쿠로시마는 「연합함대장관은 한번 결정한 방침에 반대의견이 구신되는 점을 바라시지 않는다. 기동부대의 주요임무는 미드웨이공략지원임」이라고 대답하였였기에, 미국함대격멸은 2차적인 것으로 겐다는 받아들였다.
도상연습과 연구회는, 미드웨이작전의 목적인 적항모포착격멸이 어렵고, 높은 리스크를 수반하는 작전임을 제시하였지만, 연합함대는 문제점을 확인함 없이 작전을 발동하였다. 특히 야마모토장관은 「본 작전에 이의(異議)가 있는 함장은 조속히 퇴함하라」라고 강하게 훈시하였다. 제5함대참모장 나카자와 타수쿠(中澤佑)에 의하면, 나카자와가 작전회의에서 기동부대와 연합함대주력함대의 거리가 너무나 떨어져 있음을 지적하자, 쿠로시마는 문제없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전후, 쿠사카는 작전목표가 애매하고 미드웨이공략이 우선이었음을 지적하고, 「두마리의토끼를 쫓는 격이 되었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겐다 미노루(源田実)도 작전목표가 미군기동부대의 격멸인지 미드웨이기지공략인지가 애매하였다고 하고, 전략 및 전술에서 보아도 어찠든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으며 항공주병(블로거주석 : 主兵 : 항공기를 전투주력으로 하는 사상)인가 전함주병인가도 애매하였고 야마토와 야마모토장관이 먼 뒤에서 따라가는 것도 의문이었다고 하였다. 코무라 케이조-(古村啓蔵=치쿠마(筑摩)함장)은 동기인 토미오카 사다토시(富岡定俊)군령부작전과장으로부터, 함대는 미드웨이공략의 성공후에 트럭에 집합・미호(米豪=미국과 호주)차단의 FS작전실시예정으로 듣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5월25일 최후인 도상연습이 진행되었지만, 미드웨이공략후인 날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성공을 전제로 기습실패나 미기동부대의 출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사전준비
작전은 준비기간이 짧고 시기상조라고 1항함사령부에서 반대가 있었으며, 작전사전연구회에서 야마구치 타몬(山口多聞)소장과 겐다 미노루(源田実)중좌가 연합함대사령부에 반대한다고 물고 늘어졌지만, 연합함대사령부는 결정끝이라고 하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1942년5월4일, 연구회에서 1항함참모장 쿠사시카 타치노스케(草鹿龍之介)와 제2함대참모장 시라이시 카즈다카(白石萬隆)는 연기를 신청했지만, 각하되었고 5일에 재방문하였을 시에는 제2단계 작전을 직접 전달받고, 그 날은 연기신청을 하지 않고 돌아갔다. 결국, 기동부대는 부품의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미드웨이작전연기을 1일만 허락받았다.
불안요소가 있었다고 하지만, 연합함대사령부, 군령부, 나구모기동부대 모두가 자신감에 차 있었다. 5월5일, 나가노군령부총장으로부터 야마모토장관에 대하여 대해령제18호(大海令제18호)가 발령되었다.
연합함대사령장관은 육군과 협력하여「AF」(미드웨이) 및「AO」(알류션)서부요지를 공략해야함.
세부사항에 관해선 군령부총장으로 하여금 지시할 것임.
제2함대참모장 시라이시 카즈다카(白石萬隆)에 의하면 , 군령부는 주목적을 미드웨이섬공략, 초계기지의 전진으로 표시하고 있었지만, 5월의 도상연습에서 양동(陽動)으로 미함대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작전안이 나왔을 때에, 연합함대의 우카기참모장은 그 작전안으로는 미함대를 유인할 수 없다고 설명, 이 직후에 대해령(大海令)이 내려졌으며, 공략이 주목적으로 표시되고, 연합함대의 해석이 틀린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고 함.
대해령제18호에 의해 , 하와이공략의 전초전으로서 야마모토장관, 우카기참모장의 지휘아래 함정 약350척, 항공기 약1000기, 총병력10만명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편성됨 . 이것은 전함야마토 기타 전함부대(제1함대)가 쿠레의 카쓰라지마를 출격, 참가하는 최초의 작전이었다. 후지타 미츠오(淵田美津雄)중좌에 의하면 , 제1항공함대항공참모 겐다 미노루(源田実)는 당시 , 제1단계작전의 처리로 미드웨이작전을 검토할 틈도 없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쿠사카참모장에 이르러서는 진주만에서 전사한 항공기탑승원의 2계급진급 문제의 절충으로 분주하여(항공기탑승원의 사기에 관련되었기에), 미드웨이작전의 연구할 때가 아니었다고 한다. 쿠사카는 「준비기간이 불충분으로 인해 불만도 내심 있었지만,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드웨이작전보다는 하와이공격 전사자의 2계급특진 쪽에 관심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당초, 산호해 해전의 보고를 청취한 시점에서 해군수뇌부는 상처없는 항모즈이카쿠를 미드웨이로, 대파(大破)된 쇼-카쿠를 수리후 알류션작전으로 돌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쇼-카쿠수리에는 3개월을 요하였으며, 그리고 즈이카쿠도 상처는 없었지만 참가한 탑승원의 손모(損耗)가 심하여 , 트럭섬에 정박하여 보충을 기다리는 상태이며, 본작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에 의해, 일본측의 참가항모수가 감소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수의 위에서는 4대3(일본군은, 엔터프라이즈, 호넷, 와스프출현가능성 고려)으로, 미군보다 우세하였다. 단, 미드웨이기지의 항공기를 계산에 집어넣으면, 항공전력(戦力)비율은 일본군「전투기105, 급강하폭격기84, 뇌격기94, 함상정찰기2, 수상전투기24, 수상정찰기10, 합계 319(나구모부대, 콘도부대, 수송부대 합계)」, 미군기동부대「전투기79, 급강하폭격기112, 뇌격기42」, 미군기지전력(戦力)「전투기27, 급강하폭격기27, 뇌격기6, 비행정32, 대형폭격기23」총계348기가 되어, 거의 호각세였다. 이러한 쇼-카쿠・즈이카쿠 2척의 운용에 관해서는 , 후술한 요크타운의 사례와 비교되어, 미드웨이해전에 있어서 일본측의 패인의 하나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다. 그리고 미국의 역사학자인Gordon William Prange는 알류션방면에 항모류-죠-(龍驤), 하야다카(隼鷹)를 투입한 점이, 야마모토 이소로쿠 최대의 실책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출격전, 1항함의 쿠사카참모장은, 공격일이 결정되었기에 기습의 기동여지가 없으며, 항모는 안테나 수신능력부족으로 적정(敵情)을 알기 어렵기에, 연합함대가 적정(敵情)을 파악하고 작전전환을 지시함을 연합함대의 우카기참모장에게 부탁하였고 그것의 응낙을 받았다.
미군의 대응 정보수집과 분석
미군은 일본군의 내습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미드웨이작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1942년3월4일, 태평양함대사령장관체스터ー・니미츠는 오아후섬에 일본군의 대형항공기(2식비행정)2기가 폭격을 진행하여(K작전), 동월11일에는 미드웨이에 신형비행정(전과 동일한 2식비행정)1기가 접근하여, 격추당하였음을 감안하여 , 일본군공세의 징후라고 판단하였다. 단, 이것은 오해로서, 실제로는 일본군의 폭격은 공세작전와는 관계가 없는 정찰감시・방해작전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해군의 주력부대는 남방전선에서 일본본토로 귀투중이었으며, 다음차례로 태평양의 어딘가를 공격함은 확실했지만, 하와이, 미드웨이, 미본토서해안등 가능성을 폭이 넓고, 판단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본토서해안에 대한 일본군상륙의 오보등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진주만공격직전에 변경된 일본해군의 전략암호 "D"(블로거 주석 :이 전략암호D는 단어나 문자를 5자리수로 바꾼 뒤, 그 5자리수를 위치를 랜덤하게 바꾸는 난수로 되어 있었다. 지명이나 특정명칭은 별도의 난수로 구성되어 해독이 극히 어려웠다.) 는, 미군의 첩보부로부터 JN-25로 불리고 있었다. 1942년4월경에는, 하와이진주만의 미국해군 레이튼(정보)팀이, 일본군암호를 단편적으로 해독하였고, 일본해군이 태평양정면에서 새로운 대규모작전을 기도중 임에 관해서도, 개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는 시기・장소등의 상세사항이 불분명하였다. 그 후, 5월경부터 통신해석의 자료가 증가하여, 암호해독와의 검토를 반복하여 작전계획의 전체모양이 명확해 지면서, 약식부호「AF」라는 장소가 주요공격목표까지는 알고 되었다. 그러나「AF」가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였다. 미국측은, 일본해군편성표에서「A」「AO」「AOB」가 알류션방면임은 명백하다고 판단하였다.
사진3
폭격당하는 다치하버(6월3일).
워싱튼의 미국통합참모본부는 공격목표를 하와이, 육군항공대에서는 샌프란시스코라고 상정하였고, 그리고 알래스카, 미본토서해안이라고 상정한 자도 있었다. 5월중순이 되어서도 결정적인 정보는 없었지만, 체스터ー・니미츠대장은 각종정보와 전략적인 관점에서 미드웨이가 목표라고 예상하였고, 하와이소재인 레이튼정보주임참모들도 점차 미드웨이가 목표임을 확신을 더해 갔다.
5월11일경, 첩보부에 재직중이던 청년장교 재스퍼・홈즈의 제안에 의해, 결정적인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계책이 고안되었다. 그는, 미드웨이섬의 기지사령관에 대해서 오아후섬・미드웨이간의 해저케이블을 사용하라고 지시를 보내고, 미드웨이에서 하와이섬수취로「해수여과장치의 고장에 의해, 음료수가 부족한 상태임」이란 긴급전문을 영어의 평문(암호문이 아닌 무전전신)으로 송신시켰다. 그 후 얼마안되어 일본의 웨이크섬수비대(퀘젤린환초소재의 제6함대설도 있음)에서 발신된 암호문에, 「AF는 담수부족의 문제있음, 공격계획은 이것을 고려해야함」라는 내용이 노출된 것으로 보아, AF는 미드웨이섬을 나타내는 약어임이 확인되었다. 이리하여 미드웨이섬 및 알류션방면이 다음의 일본군공격목표라고 확정되었다.
덧붙여, 이 에피소드에 관해서는, 실제의 암호해독상황이나 수법을 비익하기 위한 분석으로 하는 설도 있음. 예를 들면, 침몰한 항모히류우(飛龍)에서 탈출후, 미군에게 구조되어 포로가 된 아이소-쿠니조-(相宗邦造)중좌등 기관과병34명은, 미군정보사관으로부터 제공된 1942년5월에 취역한지 얼마 되지 않은 히요-(飛鷹)형항공모함인 하야다카(隼鷹)의 사진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고 한다. 만다이 히사오(萬代久男)소위에 의하면 , 「하야다카(隼鷹)」의 사진은 군극비회람부에서 본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만다이는 암호해독운운보다는, 오히려 연합군 첩보활동쪽이 연합군의 정보전승리에 영향을 주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 한도-카즈토시(半藤一利)등에 의하면 , 해당되는 일본측의 전보문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5월26일까지는 하와이의 정보대는 암호해독에 성공하였으며, 각 부대의 병력, 지휘관, 예정항로, 공격시기등이 판명되었다. 니밋츠대장은 이 결과를 미드웨이기지부대에 전하였지만, 워싱튼에서는 이 정보를 전면적으로는 신용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의 가짜정보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진 자도 있었다. 니밋츠대장은 , 일본군이 샌프란시스코를 공격함에 있어서, 육상전력(戦力)을 수반해야만 하며, 자기의 의견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계속되었지만, 니밋츠대장은 자기주장에 근거하여 작전준비를 진행하였다. 5월26일 이후에는 일본군이 암호・난수표를 변경하였기에 해독불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에서는 정보관리에 빈틈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항모히류우(飛龍)에서는 출발 전에 누구나 미드웨이작전을 알고 있었으며, 일반주민족이 승조원보다 먼저 목적지를 알고 있었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이동해 온 사관이 「이번은 미드웨이군요」라며 인사를 하거나, 거기에 일용품이나 식료품을 기관부의 통로에까지 쌓아 놓았다. 연합함대사령부도, 미드웨이섬 점령후에 배비(配備)예정인 21기의 영식함상전투기(제6항공대)를 4척의 항모에 탑재하였다. 노무라 토메키치(野村留吉)(사세호(佐世保)진수부참모)에 의하면 , 해군제2특별육전대는「6월이후, 당부대수신으로 된 우편물은 왼쪽에 기록된 곳으로 전송할 것. 미드웨이」로 전보를 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5월하순에 쿠레로 돌아온 중순양함카고(加古)의 다카하시(高橋)함장은 , 아들로부터 최근 진행될 대작전에 관하여 가르켜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매우 곤란해 했다고 하였다. 시라이시 미치루(白石萬)(제2함대참모장)는「연합함대는 , 작전목표를 다소 흘림으로서 적함대의 유도를 획책하였다」라는 견해를 표하고 있다. 그리고,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애인인 카와이 치요코와 몰래 만나, 이별을 안타까워 한 후의 편지에『5월29일에 출격하여, 3주간만 전군을 지휘함. 다분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싸움이 끝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둘만의 시간을 갖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전준비
하와이제도는, 미국에 있어서 태평양정면의 방위・진공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근거지였다. 미드웨이는 하와이제도의 전초이며, 전략적 요소이다. 니밋츠대장은 일본군내습의 위험성이 있는 미드웨이를 5월3일에 시찰하고, 섬수비대지휘관인 시마드해군중좌와 방비강화에 관하여 조율하였다. 이 때, 시마드중좌는 병기와 인원이 충족되면 방위는 가능하다고 의견을 밝혔으며, 니밋츠대장은 시마드중좌의 요방대로 보강을 하여 방비를 굳히려고 하였다. 이리 하여, 미드웨이섬에 집결된 항공기는 당시 최신예인 TBF를 포함한 약120기, 미국해병대를 포함한 인원보강은 3027명에 달하였으며, 방폭엄개(防爆掩蓋)와 포대도 배비(配備)된 상태였다. 육상부대는 사기가 높았었지만, 항공부대는 줏어 모은 부대가 대부분이었으며, 정비원의 증강이 없었기에 탑승원은 자신이 직접 정비・연료보급을 해야만 하였고, 완전하게 충족된 부대는 아니었다. 그래도, 일본해군육전대 5000명을 격퇴하기엔 충분한 병력이었다.
하와이정보대는, 일본해군의 미드웨이에 대한 공격이 6월3일부터 5일까지는 이루어 질 것임을 사전에 찰지(察知)하였고, 일본측이 양동(陽動)작전으로서 계획하고 있던, 항모 류-죠-(龍驤)와 하야다카(隼鷹)를 중심으로 하는 부대를 알류션방면으로 돌려 앗츠섬, 키스카섬등을 점령, 다치하버등을 공폭하는 작전도 양동(陽動)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니밋츠대장은 이러한 정보에 근거하여 요격작전계획을 입안하였다. 일본군병력은 대규모이며, 니밋츠대장지휘하에 있는 사용가능한 전력(戦力)을 모두 투입해도 대항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러한 이유로 , 알류션・알래스카방면에는 최소한의 전력(戦力)을 보내기로 하였으며, 주력을 미드웨이에 집중함을 결정하였다.
미군작전계획은 5월28일에 『태평양함대사령장관작전계획 제29-42호』로 발령되고, 내용은, 첫째로 적을 원거리에서 발견포착하여 기습을 방지, 둘째로 항모를 격파하여 미드웨이공습을 저지, 세째로 잠수함은 초계 및 공격, 네번째로 미드웨이섬수비대는 미드웨이섬을 사수등 이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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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의 건조독크에 들어간 항모「요크타운」.
5월28일에 작전계획을 발령한 시점에 있어서 , 니밋츠대장은 2척의 항모밖에 사용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사라도가는 일본해군의 잠수함에 의한 공격으로 손상을 입고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으며, 제17임무부대(TF-17)의 2척은, 산호해 해전에서 대타격을 당하였다.
후레쳐소장의 제17임무부대는 , 산호해 해전에 있어서 포트모레스비방위를 성공시키고, 일본해군의 경항모1척격침하고, 주력항모에도 대미지를 주었지만, 자신도 주력항모렉싱튼을 상실하였으며, 요크타운이 중파(中破)되는 등 희생을 지불하였다. 요크타운에 대한 명중은 폭탄1발뿐이었지만, 배연경로(排煙経路)를 파괴당한 중대한 대미지를 받았으며, 기관에서 연소된 연기를 정상적으로 배출하지 못함으로서 보일러가 출력을 올릴 수 없었으며, 속력이 24노트로 저하되어 있었다. 그리고 , 2발의 지근탄에 의해 좌현연료탱크의 용접이 떨어져, 연료가 누출되고 있었다. 특히 산호해 해전에서는 함대부속인 유조선 네오쇼를 상실하였기에, 이 연료누출은 해상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니밋츠대장은 ,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태평양남서부에서 후레쳐소장의 제17임무부대를 하와이로 불러 들였다. 도중, 어떻게 연료를 보급받은 요크타운은 5월27일에 진주만에 도착, 즉각, 건조독에 넣어져 경이적인 응급수리가 실시되었다. 특히 연료탱크손상에 관해서는 , 미국서해안의 워싱튼주 블레머튼항에서 장기수리를 할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하와이에서의 72시간의 불면불휴의 작업에 의해 응급수리가 이루어지고, 전투함으로서의 기능을 회복, 요크타운은 5월30일에 건조독을 나왔다. 출격시, 함에는 수리공이 탄채로, 전장으로 향하여 항행중에도 수리가 이어졌다. 이 조치에 관하여 승조원은「대충 시기에는 맞추었구만」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 산호해 해전에서 많이 손모(損耗)된 요크타운을 모함으로 한 제5항공그룹은, 수리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간 사라도가의 제3항공그룹과 자리를바꿈으로서, 미군은 3척째의 항모를 이 전투에 참가시킬 수 있었지만, 이것은 당시의 미국해군태평양함대가 투입할 수 있는 항모전력(戦力)의 전부였다.
만약, 니밋츠대장이 준비가능한 항모가, 제16임무부대의 엔터프라이즈, 호넷의 2척만이었을 경우, 싸움의 양상도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은 높다. 전술한 사항에도 있지만, 일본측은 미국해군의 태평양에 있어서 전투가능항모를 이 시점에서 정규항모2-3척, 경항모2-3척으로 보고 있으며, 와스프나 경항모가 출현함은 있을지라도, 앞선 산호해 해전에서 자력항행불능까지 손해를 입었던 요크타운이 미드웨이작전에 참가할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전투의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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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해전 전투의 경과
미국해군기동부대의 출격
1942년5월28일, 미국해군태평양함대사령장관발령의 작전계획에 따라, 엔터프라이즈, 호넷을 기간으로 하는 제16임무부대(TF-16)가 진주만을 출격하고, 이어서 5월30일에는 제17임무부대(TF-17)도 기간인 요크타운의 긴급수리의 완료를 기다린다는 형태로 진주만을 출격하였다.
각 임무부대는 미드웨이섬으로 내습하는 일본군과의 싸움, 작전계획에 있어서 사수명령을 받은 미드웨이섬수비대를 도와주기 위하여 일로(一路)미드웨이섬을 목표로 하였다.
일본군의 미드웨이해역진출
1942년(쇼와(昭和)17년)5월27일(해군기념일), 나구모 츄-이치해군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 제2항공전대(히류우(飛龍), 소-류-(蒼龍))를 중심으로 하는 제1항공함대(통칭, 나구모기동함대)가 히로시마만 카쓰라지마에서 엄중한 무선봉쇄를 실시하면서 출격하였다. 주력부대 외에도 2일후에 카쓰라지마를 출격중이었다. 미와 요시타케(三和義勇)(연합함대작전참모)는『지금은 오직 적과 조우하길 바랄뿐, 신에게 기원한다. 적은 호주근해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음. 그러면 대결전은 불가능.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함』『장관에서 병사에 이르기까지 누구 한사람도 승리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는 자는 없다. 싸우지 않고 적에게 승리함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여야만 하는가?』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 우카기참모장은 미군의 무선문통신이 증가하였음이 신경이 쓰여『일본군수송선단이 찰지(察知)된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했지만, 그 이상 점검함이 없었고, 전후일기를 분석한 치하야 마사타까(千早正隆)는「이것 이상 분한 것이 없음(=내용인즉, 좀 더 점검하였으면 패하지 않았을 것을)」라고 술회하고 있다.
5월28일, 미드웨이섬점령부대수송선단이 수상기모함 치도세(千歳), 구축함오야시오(親潮), 쿠로시오(黒潮)와 함께 사이판을 출항하였다. 해군육전대(오오타 미노루(太田実)해군소장)과 설영부대, 육군으로부터는 이치키 키요나오(一木清直)육군대좌가 지휘하는 육군이치키지대가 승선하고 있었다. 선단은 제2수뢰전대(기함 경순양함진츠-(神通))기타부대에 호위되어 북상하였다.
작전에서는 일본측의 사전색적계획으로서 6월2일까지는 2개잠수전대를 배치하여 초계선을 구축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담당인 제6함대(잠수전대로 구성된 함대)로 장거리초계임무에 적합한 3개잠수전대 중, 제2잠수전대는 인도양에서 통상파괴전 이후의 정비중이며, 제8잠수전대는 호주・아프리카에서 작전임무중, 제1잠수전대는 북방작전에 충당키로 결정되었기에 어느 부대도 작전에는 투입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해대형(海大型=잠수함 중 대형의 잠수함을 말함)」으로 구성될 제3・5잠수전대가 담당하게 되었지만, 5잠수전대는 일본에서 퀘젤린으로 회항도상에 있었으며(제6함대에 작전이 통지된 5월19일시점)예정기일에 임무에 임하는 것은 불가능, 3잠수전대도 소속잠수함중 3척이 제2차K작전에 충당되었으므로, 양 전대 합쳐서 9척의 잠수함이 예정배치에 임하게 된 것은 6월4일이 되어서였다. 특히 제16임무부대가 6월2일에 5잠수전대의 담당해역을 통과하였음으로 본작전에 있어서 큰 화근이 되었다.
다음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은 제24항공전대에 의한 미드웨이주변에 대한 항공색적이다. 이것은 2식대정에 의한 웨이크섬을 경유한 색적계획이었지만, 웨이크환초가 2식대정을 운용하기에는 너무 얕았으며, 경유지가 웟제환초로 변경된 결과, 미드웨이 모든해역의 색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파일럿의 기량부족으로 야간착수가 곤란함에서 박모(薄暮 : 황혼)까지는 웟제환초에 귀환할 필요가 있었기에 가장 요긴한 북방해역초계(5월31일)가 단축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미함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반대로 예정대로 북방해역을 초계하고 있었더라면 미함대를 발견하였을 확률은 매우 높았다.
최후에 계획되고, 연합함대가 가장 중시한 제2차K작전은, 오아후섬서북서480해리에 있는 후렌치후리게이트환초에서 잠수함의 보급을 받은 24항공전대의 2식대정에 의한 오아후섬의 항공색적이었다. 제1차는 3월에 실시하였고, 게다가 2식대정에 의한 하와이공습시에도 후렌치후리게이트환초는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군의 작전을 암호해독으로 찰지(察知)한즉, 해역일대에 경계함정을 배치하여 봉쇄하였다. 잠입한 이(伊)123잠수함은「봉쇄망돌파 전망없음」이라는 보고를 송출하였다. 이것을 빋이 제11항공함대는 5월31일 21시23분에 작전중지를 24항공전대에 지시하였다. 이 작전도, 만약 실시되었다면 오아후섬에는 미항모가 없음이 판명되고, 이후의 작전이 크게 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나구모기동부대에도 작전중지를 연락하지도 않았다.
6월3일 오후, 나구모기동부대를 따라가는 주력부대 기함야마토에 승선한 연합함대사령부의 적통신방수반은 미드웨이섬부근에서 항모같은 호출부호를 방수(傍受)하였다. 연합함대 수석참모 쿠로시마 카메히토(黒島亀人)에 의하면 , 4일경에 (대본영으로부터 연락, 또는 통신방수(傍受)로)미드웨이에 기동부대가 있다는 징후을 캐취하고, 야마모토장관은 1항함에 알릴 것인가를 물어보았지만, 쿠로시마는 무선봉쇄를 우선시, 1항함이 탑재기의 반수를 가지고 반격에 대비하고 있는 점, 기동부대도 징후를 캐취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한 결과, 알리지 않도록 구신하였다고 자신의 실패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연합함대참모사사키 아키라(佐々木彰)에 의하면 , 4일에 통신호출부호를 방수(傍受)하였다고 한다. 회충으로 인해 복통으로 고통받던 야마모토이었지만, 즉각, 나구모기동부대에 통보하도록 참모에게 전하였다. 하지만「무선봉쇄를 깨면 적에게 위치를 알리게 된다」「나구모기동부대의 쪽이 가갑고 동일하게 방수(傍受)하였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구모기동부대는 방수(傍受)하지 않고 있었으며, 예정대로 작전을 지속하였다. 이 건을 취재한 카메이 히로시(亀井宏)에 의하면 , 쿠로시마(黒島)참모를 포함하여 연합함대, 군령부, 제6함대, 전원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토이 요시지(土井美二)(제8전대수석참모)는, 쿠사시카 타치노스케(草鹿龍之介)참모장이 「항모는 마스트가 낮고 적통신방수(傍受)를 기대할 수 없다. 의심스러운 징후를 캐취하면 잘 부탁함」이라고 출격전에 몇번씩이나 확인해 두었다고 증언하였고, 쿠사카의 회고록에도 같은 식의 기록이 있다.
일본시간 6월3일 오전 10시30분, 나구모기동부대는 짙은 안개속에서 혼란에 빠지고, 기함아카기(赤城)는 히류우(飛龍), 소-류-(蒼龍), 하루나(棒名), 키리시마(霧島)의 함영(함선의 실루엣)을 잃어버렸다. 히류우(飛龍)와 키리시마(霧島)는 충돌할뻔 하였기에, 사령부에서는 무전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가 있었지만, 장파(長波)무전을 사용하여 함대의 침로를 정하였다. 무선사용에 의해 미군이 나구모부대의 행동을 찰지(察知)하였다는 설이 일본측에 있지만, 미군측에게 이 통신을 방수(傍受)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6월4일오전3시37분, 나구모부대는 보급대와 구축함 아키구모(秋雲)를 분리하였다. 오전10시25분, 나구모사령부는 각 함에「적정(敵情)에 대응한 행동으로 변경할지도 모름」으로 하여, 제공대의 집합과 수용에 주의하도록 통달(通達=통신 전달)을 내었다. 오후4시30분, 아카기(赤城)와 토네(利根)가 미군기같은 기영(機影=비행기실루엣)을 발견하자, 아카기(赤城)에서 3기의 영식함상전투기가 발진하여 영격하였다. 나구모기동부대는, 오인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오후11시30분, 아카기(赤城)는 구름사이에사 미군기를 발견하여 총원을 전투배치에 임하게 했지만, 그 후에는 평온하게 지나갔다. 아카기(赤城)에서는 일본군수송선단이 폭격을 받았음을 알았고, 그리고 미군색적기를 격추하지못함으로서 미드웨이기지에 대한 기습효과를 잃었음을 깨달았지만, 미항모에 관해선 무경계로 임하였다.
미군의 초계와 일본군수송선단공격
미군은 5월30일이후, 미드웨이섬기지항공대의 32기의 PBY카탈리나비행정에 의한 초계가 진행되고 있었던 2일, 후랭크・J・후레쳐소장의 제17임무부대와 레이몬드・스플언즈소장의 제16임무부대가 미드웨이섬의 북동에서 합류, 이 합류한 기동부대의 지휘는 후레쳐소장이 맏기로 하였다. 6월3일(09:00), 카탈리나비행정1기(잭・리드소위기)가 일본군수송선단과 호위중인 제2수뢰전대를 발견하였다. (12:30), 미드웨이섬에서 제7육군항공부대 분견대의 B-17폭격기 9기(지휘관:월터・스위니중좌)가 발진, 공격에 나섰다. 일본시간 6월4일오후1시(16:23), 선단을 발견한 B-17부대는 폭격을 개시하여, 전함, 항모, 수송선등 , 다수의 함정격파를 보고하였다. 실제로는 수송선 아르젠티나마루, 키리시마(霧島)마루(霧島丸)가 지근탄을 맞았을 뿐 손해도 없었다.
(21:30), 오아후섬에서 증원된 PBY카탈리나비행정4기(지휘관:챨스・힙퍼드중위)와 어뢰를 탑재한 뇌격대가 출격하였다. (현지시간 6월4일01:15)레이더에서 선단을 발견(1:43)하고, 뇌격을 개시하였다. 야간이었던 관계로 완전한 기습이 되었고, 수송선키요스미마루(清澄丸)가 기총소사를 받고, 아케보노마루에 1발이 명중하여 전사자11명가 나왔지만, 양함모두 항행에는 지장은 없었다. 이 때, 선단을 호위해야할 제7전대(쿠리다 다테오(栗田健男)소장)의 중순양함4척(쿠마노(熊野), 스즈야(鈴谷), 미쿠마(三隈), 모가미(最上)は선단을 놓치고 매우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이것은 쿠리다소장의 미스라기 보다는 타나카 라이조-(田中頼三)소장(선단지휘관・제2수뢰전대사령관)의 판단에 의해, 수송선단이 예정항로에서 북100해리 지점을 항행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드웨이기지에서의 함대발견의 보고를 받고, 태평양함대사령부는, B-17이 공격한 함대는 적주력기동부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제16・17양임무부대에게 일본군기동부대로 잘못 알고 공격하지 않도록 긴급타전을 보냈다. 후레쳐사령관도 같은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오후4시50분(19:50)에는 예상영격지점을 향하여 남서로 진로를 변경중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후레쳐와 스플언즈도 나구모기동부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