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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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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발전소 스크랩 홍대 월향 2호점에 `혁명가의 방`을 만들었습니다
ryu0303 추천 0 조회 69 11.03.18 21: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월향에 차린 혁명가의 방

 

 

 



  혁명이란 말은 어쩐지 가슴 설레는 말입니다. 삼십줄을 넘어 생활에 찌들대로 찌든 요즘도 그렇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시민 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라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폭력을 싫어합니다. 무장 혁명에 서린 권력욕과 피비린내, 그리고 보복의 악순환을 몸서리치게 증오합니다. 그보다는 혁명적 사고를 좋아합니다. 기성의 것들을 뒤엎는 아이디어와 열정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한 순간 대중들을 사로잡는 짜릿한 티핑 포인트에 대한 환상을, 저는 여전히 간직하고 삽니다.

 

  그런 저로서는 세 명의 혁명가를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삽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체 게바라입니다. 그는 한 권의 일기(<체 게바라 평전>)와 한 편의 영화(<모터싸이클 다이어리>)로 단 숨에 20대 초반 시절의 저를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저는 특히 그가 남미 민중의 삶을 체험하며 인간애에 눈뜬 과정과, 쿠바 혁명에 성공하고 나서 권력을 버리고 떠나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상상하는 완전한 혁명을 위해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일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앤디 워홀은 체 게바라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혁명을 일군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혁명을 꿈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성공을 거둔 산업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회화(실은 反회화)로, 영화로 끊임없이 자신이 고안한 혁명의 불길을 옮겨 붙이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분야에서 자신이 성공이 확고해졌을 때, 바로 그 때 모든 걸 버리려 했던 이입니다. 그래서 예술가로서 더욱 유명세를 탔지만. 지적이거나 부유한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을 대중의 것으로 돌려놓고자 했던 점이야말로 가장 혁명적인 발상이었죠. 이를 위해 자신은 기계, 자신의 작업실은 공장(factory), 자신의 동료 예술가들은 예술 노동자(art worker)로 변신시키고자 했죠.

 

  막걸리 전문점 월향 2호점은 좀 황량합니다. 외부는 아직 조경과 마무리 공사가 덜 끝났습니다. 내부도 액자 몇 개 걸어두고, 월향이란 글자 몇 개 적어둔 게 답니다. 특히 1층의 막걸리 카페는 장식이 너무 없어 차갑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립된 느낌이 오히려 아늑하게 느껴지는 골방 2개를 어떻게 꾸미느냐로 몇 주째 고민만 해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혁명가의 방으로 꾸미자는 것이었죠.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혁명가들로. 넓은 방은 앤디 워홀의 작품 몇 개(물론 사본) 걸었고, 더 좁고 음침한 방은 체 게바라의 사진으로 꾸몄죠. 그리고 각 방 입구에 영어로 ‘andy room.'과 ’che room.'이란 글자를 붙여두게 했습니다.

 

  그 방에서 앤디 워홀의 대표작인 마릴린 먼로 실크스크린을 본 종업원들 몇이 왜 ‘marilyn room.'이 아니냐고 묻더군요. 그들에게 앤디 워홀을 설명하느라 애께나 먹었습니다. 이 방을 이렇게 꾸민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좋습니다만, 후배라면 더욱 좋겠죠. 그들이 일상에서 탈출해 이 방에서 혁명적인 사고를 꿈꾸었으면 합니다. 굳이 막걸리를 마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스터디나 세미나를 해도 좋습니다. 일급 커피를 제조할 장비와 실력이 없는 탓에 좋은 커피를 인근 커피 전문점에서 사다 제공할 용의도 있습니다.

 

 

  참,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우리 혁명가가 한 분 있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는 아직 공부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얘기 외에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조선 후기 여성 신분으로는 제주, 아니 조선 최고의 갑부였던 김만덕 할머니입니다. 아무리 신분제가 무너지던 시기라고 하나 여성으로, 그것도 관비 출신으로 그런 부를 이룬 것은 엄청난 혜안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축적한 부를 아사(餓死) 직전의 제주민들에게 다 내준 분입니다. 그것 역시 엄청난 혁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천대하고 괴롭혔던 남성 양반 중심의 사회에 대해 저주라도 퍼부었을 법한 그가 오히려 그 사회를 구해낸 것입니다. 그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정신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엄청난 영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널린 사료를 대충 챙겨 읽고, 선배들이 쓴 논문을 봤습니다. 몇 차례 제주에 내려간 길에 그의 발자취를 더 자세하게 쫓고 싶었으나, 그의 생가며, 점포 등을 상세히 소개해주는 사람이나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되면 더 구해보겠습니다. 그 때쯤이면 어딘가에 김만덕 할머니의 방도 하나 꾸며놓을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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