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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요한복음 3장 강해』 -거듭남과 충만함, 복있는 사람, 2016, 578면
제 1 장 니고데모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요3:1)
-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실질적인 열쇠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1:16 말씀이다. 그것은 결국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며, 16절보다 더 좋은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그의 충만한데서 받는 생명이다. 이 점을 잊으면 기독교 전체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움과 찬란함을 놓치게 된다. 기독교의 핵심은 생명, 즉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 데 있다. 이 생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러분은 충만함을 받은 자임을 알고 있는가? ‘은혜 위에 은혜’를 받고 있는가? 계속 더 많이 받고 있는가? 이 생명과 충만함을 나타낼 때만 교회는 실제로 제 역할을 하게 되며 세상에서 중요한 곳이 된다. 오늘날 교회가 거의 중요치 않은 곳이 되었고 점점 더 중요치 않은 곳이 되어간다. 교회는 활동이나 노력이나 조직에 기대어 사는 곳이 아니다. 계속 그런 시도를 해왔지만 통하지 않았다. 교회 밖 세상이(무지와 어둠과 죽음 속에서도) 알아보는 유일한 한 가지가 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신약성경 전체가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중대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그의 충만한 데서 받고 있는가? 그의 충만함을 열망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의 큰 목적은 바로 이 중대한 주제를 가르치려는 데 있다. 우리는 너무 복잡하고 똑똑하고 철학적이다. 이것이 늘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주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라고 하셨다. 우리는 충분히 어린아이 같지 못하며 단순하지 못하다.
- 1장 특히 1-18에서 교리를 제시하고 주님께 나아온 일련의 인물들을 소개한다.
2장 23-24에서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요한은 주님께 나아가는 다양한 방식의 특정한 오류와 잘못이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성경은 단순히 알아야 할 교과서로 여기고 접근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잘못은 없다. 성경의 전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필요한 이 모든 충만함을 가진 분께 여러분을 인도하려는 것이다.
3장 이 주제와 관련된 어려움들을 보여주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제시한다. 지금부터 그것을 살펴보려 한다.
- 니고데모 이야기는 흔히 전도 이야기로 간주되기도 하고 동시에 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니고데모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실은 그의 사례가 앞서 2장에서 주님이 행하신 극적인 일에 잠시 혹해서 나온 자들의 사례와 또 다른 사례라는 것이다. 요한이 이 일을 기록한 목적은 니고데모가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밝히려는데 있다. 또한 오늘날 아주 확연히 나타나는 유형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제시하려 한다.
니고데모의 특징은 무엇인가?)
① 그는 아주 독실하고 지적인 이스라엘의 선생이자 스승이었다.
② 편견에서도 분명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께 편견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주님을 대하는 태도는 대다수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달랐다. 제가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만의 특별한 미덕이 있다. 그는 한 사람이 이토록 올바르면서 또한 이토록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그의 미덕은 기적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다”(요3:2) 그는 기적을 단순히 볼거리가 아닌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는 생각하는 사람, 이면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의 실제 의미를 파악할 만큼 영적으로 충분히 밝은 사람이었다.
③ 더 나아가 그는 주님을 ‘랍비’라고 불렀다. 목수에 불과한 예수를 선생이자 스승이라고 부른 것이다. 주님의 인격과 성품에서 무언가 발견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특징이다. 이 특징은 우리 신분 전체의 토대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다. 주님의 유일무이하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주님을 다른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하는 자는 아예 출발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그의 충만함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④ 니고데모는 자신에게 없는 것이 주님께는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니고데모의 훌륭한 점은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같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전부 편견에 사로 잡혀 있었지만 그는 주님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주님이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단순히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특별하고도 유일무이한 관계를 하나님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고, 그 점에 끌렸던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삶의 중대한 열쇠이다. 주님의 충만함을 받는 데 필요한 열쇠, 주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에서 자라가며 그의 충만함을 받는 데 필요한 중대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 열쇠가 있어야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알고 영원한 영광을 미리 맛보는 무리에 속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의 문제점은 자기만족에 빠져 이미 도달했고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자신들은 이미 회심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상태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있는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가?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온 것은 자기 속에 이런 필요가 있고 결핍이 있다는 사실, 더 충만해지고 싶은 갈망이 있다는 사실, 하나님께 더 큰 충만함을 받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식하며 하는 행동이었다. 이 열망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소망이 없다.
⑤ 그가 자기의 필요를 충분히 인식했을 뿐 아니라 주님을 찾아와 대화를 청하고 교훈을 구할 만큼 겸손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였음에도 무명의 주님을 찾아온 것이다. 겸손의 열쇠는 자기 필요를 인식한 데 있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질 수 없고, 완벽한 대상을 보고 그와 대조되는 자기 실상을 보아야 비로소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에 ‘심령이 가난’해 진다. 이처럼 팔복은 서로 보완해 주며 어떤 의미에서 서로 설명해 준다.
어떤 이들은 니고데모를 과찬한다고 하며 그가 대낮에 당당히 찾아오지 못한 것을 비판한다. 오히려 그렇게 한 것이 니고데모의 미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 책임에 대한 인식과 큰 충만함을 향한 열망의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룬 행동으로 실제로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표지이다.
니고데모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무엇인가?)
① 니고데모는 자신의 감정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위험과 대가를 감수하더라도 큰 관심을 가지고 감정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 전체를 여는 열쇠이다. 적용하고 행동하는 일, 자신의 선한 충동과 생각을 따르는 일, 자신을 찾아온 깊은 확신에 귀를 기울이는 일, 마침내 비결을 찾기까지 쉬거나 안주하지 않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주님도 이렇게 강청할 것을 내내 가르치셨고, 교회 역사 전체와 가장 위대한 인물들도 그 본보기를 계속 보여주었다. 단순히 그 감정을 느끼는 데서 그치지 말라. 문제는 결국 충만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니고데모처럼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② 핵심으로 그는 아주 근본적인 점에서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중대한 주제, 즉 본문에 나타난 우리 주와 구주되신 복되신 분의 모습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주님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도 아주 놀라운 모습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서운 사실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필요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한다. 니고데모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자기 지신을 제대로 몰랐다. 우리는 선악 간의 균형을 맞추며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준비를 늘 하고 있다. 자기 죄를 합리화 할 준비를 늘 하고 있다. 주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께 나아간다는 뜻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방에 걸어 놓은 방어막을 뚫고 문제를 들추어 눈앞에 보여 주신다.
니고데모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니고데모의 경우에 주님은 거의 매정하게 들릴 정도로 날카롭게 문제를 지적하셨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주님은 니고데모의 말을 매정하게 끊으셨다. 그것만이 그가 그토록 추구하는 축복의 자리로 이끄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의 추구는 옳았지만, 잘못은 이 문제에 접근하는 그의 태도와 해결 방식에 있었다.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기에 자기의 중심 문제와 필요를 직면하게 하셨다. 우리는 축복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오리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애초에 치워 버려야 한다. 우리가 치워 버리지 않으면 주님이 치워 버리신다. 우리도 처음 자기 필요를 느끼고 주님을 찾을 때, 일이 더 악화된 것처럼 느끼며 차라리 주님을 찾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는 중대한 원리는 주님께 완전히 전적으로 승복해야 한다. 주님은 항상 주도권을 잡으시고 그의 충만한 데서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큰 장애물을 직시하게 하신다.
니고데모에게 그 장애물은)
① 니고데모가 여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주님께 나아오는 겸손은 보였지만 그러나 주님 앞에 어린아이가 되지는 못했다. 이것이 이런 유형에 속한 수천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주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들을 갈라놓는 차이점이다. 이런 유형에 속한 자들은 훌륭하면서도 겸손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는다. 어린아이가 된 적이 없고, 거듭날 필요를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결핍과 필요를 인식하고 주님께 나아왔지만 어떤 의미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나아왔다. 그는 구주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었다. 기꺼이 배울 준비가 된 자로 나아왔을 뿐 회개하는 자로 나아오지 않았다. 그는 도움의 필요성은 느꼈지만 자신의 무력함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결국 주님의 충만한 데서 받는 자는 자신이 아무 소망 없는 완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아는 자이다. 도움의 필요성만 느끼는 사람은 여전히 제 발로 서 있는 것이며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주님에게 있는 무언가를 자신이 이미 가진 것에 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책의 부록 내지 별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부록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써야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착각이었다.
②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4,9) 니고데모는 그는 간절히 알고 싶었기에 물었지만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생명임을 깨닫지 못했다. 사람이 취할 수 있고 더할 수 있는 가르침, 따라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인 줄만 알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이었다. 이 위대한 머리, 위대한 인격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와 구성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 안에 들어오는 것이며,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1:4)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가졌든, 종교나 도덕이나 철학이나 다른 무엇을 가졌든, 전부 무가치한 이유가 여기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잠깐! 너는 거듭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너의 관점은 전부 잘못되었다.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