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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1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
미가서 6장 1절- 8절
우리와 예수님이 다른 점을 말씀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도대체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후에 찾아가셔서 “너는 어찌하여 나를 세 번씩이나 배반했느냐? 고 따져 묻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저라면 부활하자마자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네가 인간이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리어 그들을 위해 생선을 굽고, 도리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또한 간음하다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끌려온 여인에게도 “너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고 추궁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지극히 존경하는 여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로 “구네” 즉 여인이여! 라고 부르면서 더러운 여인이었지만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누구에게나 정말 너그럽고, 인자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전혀 분위기가 다릅니다.
마치 검사가 피고에게 추궁하듯이 “너는 내게 증거하라.” 다시 말씀드리자면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좀 해봐!”라고 충격적이리만큼 따져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그 이유를 요약하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등 신앙의 사람들을 파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고 시내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포악하고 교활한 모압 왕 발락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그 일대에서 유명한 점쟁이요, 박수무당인 발람을 불러서 모압의 영토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4장을 보면 모압 왕의 명령을 받고 저주하러 가는 도중에 타고 가던 당나귀가 주인 발람에게 세 번 돌발 행동을 합니다. 첫 번째는 돌담에 비비어 발람의 다리를 상하게 하고, 두 번째는 땅바닥에 앉아 버리기도 하자 화가 난 발람이 나귀를 채찍으로 때리자 세 번째는 나귀가 입을 열어 항의하도록 하시므로 발람은 저주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할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40년 동안 온갖 은혜를 베푸시고, 오죽하면 그들을 저주하려는 점쟁이를 동원하고, 당나귀까지 사용하셔서 구원하여 주셨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에 화가 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무시한 것이 검사 하나님의 공소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검사 하나님의 “너는 내게 대답하라.”는 진노에 찬 추궁에 올바른 응답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선지자 미가는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구약의 모든 역사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친 진실한 신앙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요약한 신앙인의 3대 강령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3가지 요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정에선 검사와 같이 진노에 찬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마땅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과 삶은 오직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아버지 하나님을 잘 아시는 하나님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가 생활의 모토였습니다.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기도의 초점이었습니다.
30년 동안의 전쟁은 독일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폐허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흑사병까지 돌아 독일 인구 1600만 명 중 1000만 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더구나 전쟁으로 득세한 카톨릭은 기독교를 극도로 박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1704년 어느 날, 루터교 목사인 슈몰트는 부인과 함께 병든 교인을 심방하고 돌아왔을 때, 처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주택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그 속에서 서로 껴안고 타 죽은 아들과 딸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슈몰트 목사는 아들과 딸의 시체를 껴안고 오랫동안 울다가 조용히 기도드렸습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해와 견딜 수 없는 미움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위하여 참는 것이 순종입니다. 억만금을 손해 보거나 내 이름 석 자가 드러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살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의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담과 예수, 에덴과 골고다를 비교하여 로마서 5장 18절에서 말했습니다.
“한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죄인이 되느냐? 의인이 되느냐? 멸망이냐? 구원이냐? 는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 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너 내게 대답 좀 해봐!”라고 하실 때, 반드시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주님! 주님의 뜻대로 행하겠사오니,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923년 9월 1일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진에 자그마치 20만 명이 죽고 250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미국은 즉시 집 집마다 구호품을 거두어 수송선 150척에 실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재민을 구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황 히로히토는 미국의 쿨릿치(Cooliedge)대통령에게 감사장을 보냈습니다. 그 감사장은 붓으로 쓴 친서였습니다.
“일본 국민은 미국 국민에게 감사하며, 이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일본은 어떻게 미국에게 갚았을까요?
불과 18년이 지난 1941년 12월 7일 주일의 달콤한 잠에 빠져 있던 진주만을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한 신문에서는 이런 내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일본인은 세계 인종 중 은혜를 가장 쉽게 잃어버리는 족속이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면 불효자라고 합니다. 남이 베풀어 준 은혜를 모르면 개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개만도 못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야만인일수록 남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문명인일수록 남의 은덕을 감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에 이자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원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대신 지불하셨으니 이자를 지불한 의무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자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성경에는 수도 없이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 없이 복을 주시면서 수도 없이 강조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너 내게 대답 좀 해봐!”라고 하실 때, 반드시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정직한 사람을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리처드 리키라는 학자는 케냐에서 살면서 인간과 가장 흡사하다는 원숭이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원숭이와 인간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이 원숭이와 다른 것은 남을 위할 줄 알고, 의좋게 나누어 쓸 줄 알며, 무엇보다도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알고, 마음을 바칠 줄 아는 점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을 쉬운 말로 바꾸어 말씀드린다면 “자기 욕심대로 행동하고, 자기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면 원숭이와 결코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음악가는 자기를 잘 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죽이고 작곡가의 의도를 잘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조각가는 커다란 돌덩이에서 필요한 부분만 남겨 놓고, 필요 없는 부분을 잘 떼어낸 사람입니다.
훌륭한 신앙인은 내가 하나님을 다루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으로 내가 다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나의 무가치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함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탕자처럼 “아버지 나를 종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하는 헌신된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나를 빈 그릇으로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소서”라고 고백하고 겸손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화가 나셔서 “너 내게 대답 좀 해봐!”라고 하실 때, 반드시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주님!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불쌍히 여겨 주소서”
B. C 3세기, 그리스의 시라큐즈 성에 히에로(Hiero)라는 왕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금덩이를 금 세공사에게 주고 금관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금관이 다 만들어서 왕에게 가져오자 왕은 의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준 순금을 남김없이 다 썼을까? 혹시 다른 물건을 섞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별다른 방법이 없자 당시 그리스의 유명한 아르키메데스를 불러 자기의 의심을 해결해 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어찌할 수 없었던 아르키메데스는 밤낮으로 이 문제를 풀기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나 쉽게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중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피곤한 몸을 담갔습니다.
그러자 가득 찼던 욕조의 물이 넘쳤습니다. 그 순간 아르키메데스는 왕의 숙제를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숙제를 풀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거리로 달려나가서 마구 외쳤습니다. ‘유레카’(Eureka) ‘’유레카‘ 이 말은 헬라어로 ‘알았다’ ‘찾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몸을 보았습니다. 왕의 숙제를 풀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길거리로 뛰쳐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르키메데스의 법칙이 탄생한 것입니다.
어려운 숙제를 해결하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검사로써 진노에 찬 추궁을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너는 네게 증거 하라”는 말씀에
가장 합당한 대답,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답을 찾아낸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이 저와 여러분의 생각과 기대와는 다를 수 있지만, 우리들의 생각보다 비교할 수 없이 우리에게 옳고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누구도 우리의 영혼을 책임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며, 이 세상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천국은 분명히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임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형제자매 여러분들은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은 정확히 지적합니다. “불순종”, “감사하지 않는 것”, “교만”
그러므로 화가 난 검사로써 진노에 찬 추궁을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너는 네게 증거 하라”는 말씀에 가장 합당한 대답,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답을 찾아낸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내 주여 뜻대로 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그대로 순종 하십시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보답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한 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헌신하며 살아가십시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고백한 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신다면 하나님의 쉬지 않고, 졸지 않고, 끝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