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핵심 토대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고 한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1-8)
우리는 충만함을 추구하는 자들의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그 충만함을 받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그러려면 충만함을 받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범하는 오류와 잘못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니고데모는 이 주제의 좋은 본보기인 것이 분명하다.
① 한 가지 원리는 출발도 하지 않은 채 전진하려 드는 위험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니고데모처럼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자들(독실한 종교인)은 사람을 만나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기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기독교적 삶의 유형이나 체계를 접할 때,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고 그 충만함을 얻을 방법을 찾고 싶어 하나 실제로 얻는 것 같지는 않는다. 니고데모처럼 늘 추구하나 얻지 못한 채 평생 살 수 있다. 그들의 문제는 자신에게 꼭 있어야 할 것이 정말 있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있다고 가정해 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는 위험’이다. 그들은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기존의 것에 조금만 더하고 바꾸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칭의를 얻기 전에 성화를 추구하는 위험이다. 출생하기 전에 성장하려 드는 잘못이다.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보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생겼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위험이 있다.
이 오류를 범하도록 부추기는 여러 경향이 있는데 특히 위험한 경향은 신비주의로 분류되는 가르침이다. 신비주의는 자신과 교회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들(수도사, 은둔자)은 세상을 떠나 아주 엄격한 삶과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가르침이 체계화 되어 –하나님의 임재 연습- 같은 책들이 나와 있다. 독실한 종교인은 그런 책에 큰 매력을 느낀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경지. 하나님을 보는 최고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가정한 채 그리스도인의 삶을 발전시키려 든다. 문제는 그들에게 정말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출생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오류이다.
② 기독교를 삶이 아닌 사상-적용해야 할 사상-의 측면에서 바라볼 위험이 있다. 사상과 관점과 개념의 측면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며, 기독교의 내용을 알고 이해하고 파악한 후 실천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긴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하나의 과목이요, 다수의 가르침이요, 사상이다. 그래서 학생처럼 듣고 필기하며 공부한다. 물론 기독교에 가르침이 수반되는 것은 맞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 기독교에는 세상이 모르는 다른 것, 별도의 것(성령과 성령의 활동 및 역사)이 있다. 목사는 설교를 준비해야 하지만 준비는 발판에 불과하고 정작 일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부수적으로 한 말을 성령이 사용하여 진리를 깨우치시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강조점은 설교가 전달하는 지식보다 성령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실한 종교인은 문자적인 성경 지식은 거의 완벽한데 그 메시지는 하나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니고데모처럼 마음, 전인, 감정과 느낌의 요소를 배재한 채 순전히 지적으로만 접근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위험이다.
③ 결단으로 중생을 대체하는 것이다. 취미를 갖듯이 자신이 기독교라고 여기는 종교를 갖기로 결단할 수 있다.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지적인 확신이 들어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생활 방식도 바꾼다. 중생하지도 않고서도 이렇게 할 수 있다. 전부 자기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영혼에 일어나야 할 긴요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새 생명의 씨가 그 속에 없다. 겉보기에는 회심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다. 그러다가 세상으로 들어가 이전에 믿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적대시한다. 이것은 대학, 기독연합 단체들에서 발생하는 이른 바 ‘누수 현상’이 이것이다. 교회 영역에서도 그럴 수 있다. 믿는다고 말할 수 있고 훌륭한 교회 일꾼이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중생하지 않고서도 결단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중생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속에 생명이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하려 드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러한 위험에 빠지는 것은 이 선물이 새롭고 신성한 생명, 종류가 완전히 다른 생명임을 깨닫지 못한 탓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기독교는 취미처럼 채택할 대상이 아니며, 원리를 이해하고 파악해서 적용할 대상도 아니다.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산상 설교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려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생명의 영광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새 출생은 곧 새 창조이다. 새 창조에 비견할 정도로 무에서 유가 생겨나고 발생하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이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것은 완전히 우리 소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결단으로 거듭날 수 없다. 먼저 거듭나야 결단할 수 있다.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고전2:10) 성령의 계시를 받는 사람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이 사람 니고데모는 그런 지각이 전혀 없었다. 주님이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처음부터, 토대부터, 기초부터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에게는 무엇을 세울 기반 자체가 없었다 그는 완전히 새로 창조되어야 했다. 이것은 근본적인 일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이 말씀은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 나는 지금 육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똑똑한 사람으로서 똑똑한 논점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그는 육체적인 관점에서 생각했다. 이것은 육체의 일이 아닌 성령의 일이다. “놀랍게 여기지 말라”
주님은 연이어 특이한 비교를 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은 신비한 면이 있다. 그 영향과 결과는 눈에 보이는데 머리로는 이해되지는 않는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 바로 그렇다. 이성의 한계 너머에 있는 이성을 초월한 영역 신성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이해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그저 놀라고 경탄하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는 특정인, 지적이고 유능한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 되어 버린다. 기독교는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소망을 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이 여기 있다.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길을 잃은 무력하고 절망적인 자’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내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필요를 깨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니고데모처럼 주님께 나아가 기다리고 듣는 것이다. 혹여 주님께 나아간 동기와 접근 방식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더라도 걱정 말라. 우리 주님께서 바로잡아 주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파산 상태와 필요를 인식하고 귀 기울이며 기다릴 뿐이다. 그 다음 단계는 자신에게 그 일이 일어났음을 아는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면 스스로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성장이 시작된다.
- 거듭났는가? 우리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는가? 이 중대한 예비적 질문에 확실하고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걸음을 앞으로 내딛어 봐야 소용이 없다. 성장하려고 애쓰는 여러분을 주님은 오히려 가로막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진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볼 수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