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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누가복음 22장 54절-62절
겟세마네 동산의 밤이 깊었습니다. 어둠 저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손에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 맨 앞에는 가룟 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오더니 뺨에 입을 맞춥니다. 그러자 손에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듭니다. 그리하여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를 잡기 위해 갑자기 들이닥친 대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면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그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예수님의 형편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요한과 함께 예수님께서 심문 받고 있던 대 제사장의 안뜰에 숨어 들어갔습니다.
추운 새벽입니다. 마침 숯불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계집종이 불을 쬐고 있던 무리들 중에서 베드로를 용케 발견해 낸 것입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이 소리에 “여보시오, 처자 나는 예수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몹시 당황한 베드로가 자기도 모르게 딱 잡아뗐습니다. 그리고 막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때에 다른 사람이 “너도 예수와 한패 아니냐?”라고 추궁하자 “이 사람아 생사람 잡지 마. 나는 아니야!”라고 또 다시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한 시간쯤 지난 후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갈릴리 사투리를 쓰다가 덜미를 잡힌 것입니다. “너도 예수와 한 패 아니냐? 내 말이 틀리면 손에 장을 지진다.” 하면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베드로는 “내가 예수를 안다고 그렇다면 천벌을 받지.” 하면서 자기 자신을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잡아 뗀 것입니다. 그때 마침 닭 울음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자,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하루 전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밖으로 뛰어 나간 베드로는 땅을 치면서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베드로가 이토록 비겁하고 소심한 겁쟁이였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너무나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하루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앉혀 놓고 경고를 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3절입니다.
이만큼 베드로는 너무나 자신 만만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주님 아직도 저를 그렇게 모르십니까? 의리하면 저 아닙니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가 어찌하여 볼 상스럽게 허무하게 무너졌습니까?
오늘은 사 복음서를 살펴보면서 베드로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고, 우리들도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이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가 실패한 첫 번째 이유는 자기가 싸워야할 상대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1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사단이 너희들을 밀 까부르듯 가지고 놀려고 나에게 요구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영적 전쟁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 그리고 자신감, 또한 예수님과의 정과 의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너를 가지고 놀 것이며, 결국 세 번씩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경고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가 누구 앞에서 무릎 꿇었습니까?
대 제사장인 가야바도 아니었습니다. 서슬 퍼런 로마 병정의 위협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견딜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당당하던 베드로는 어이없게도 하찮은 대 제사장의 계집종에게 무릎 꿇은 것입니다.
베드로만 그랬습니까?
850대 1의 영적 전투에서 당당히 승리했던 영장 엘리야도 하찮은 여자 이세벨의 위협에 브엘세바까지 도망가서 로뎀 나무 아래에 쓰러졌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죽기를 원하나이다.”
영적 싸움은 육체적인 능력으로도, 자신감으로도, 그리고 의리와 정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안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안다고 했다 하더라도 붙들려갈 확률이 희박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처단하려고 했던 표적은 예수님 한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은 영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칼과 단창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버님께서 섬기시던 교회의 한 가정에 귀신 들린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이 며느리는 자기 남편이 죽자 귀신이 들려서 아무데서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미친 짓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 댁에서 목사님과 장로님을 청해서 기도로 귀신을 물리쳐 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장로이신 저희 아버님과 또한 장로님께서 달려 가셨습니다.
그 집에 도착해서 보니 정말 젊은 며느리가 옷을 벗어 버리고, 옷을 입히려 하자 실실 웃음을 흘리면서 요리조리 피하면서 약을 올렸습니다. 마침내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며느리를 붙잡고, 대강 홑이불로 덮고 막 기도를 하려고 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며느리가 깔깔대고 웃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같이 갔던 장로님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비웃었습니다.
“야! 웃기지만! 나는 다른 사람은 다 무서워도 너는 무섭지 않다. 네 주머니 속에 있는 담배나 꺼내 놓고 기도하시지!” 장로님은 다리야 날 살려라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는 믿음이 이깁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온 세상뿐만이 아니라, 마귀도 이깁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두 번째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40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기도하지 않고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러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그러나 베드로는 또 다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주님이 오셨을 때에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는 것,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 많고, 혈기 많고, 기도하지 못한 베드로가 무슨 수로 사탄과 싸워 이기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세 번 기도하라고 경고하셨는데, 세 번다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 기도하지 못한 것과 세 번 부인한 것이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무엇입니까?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이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무릎 꿇고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맑은 가락을 울려 내는 찬양입니다.
우리가 일어서면 마귀도 일어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려 무릎 꿇으면 마귀도 시험을 포기하고 무릎 꿇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가 실패한 세 번째 이유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 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가니라.” 54절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끌려 갈 때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라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 가버리고 없었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멀찍이 라도 주님 뒤를 따라갔습니다. 나름대로는 용기 있는 행동이요, 칭찬 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멀찍이’라는 말에서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영적, 인격적 간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베드로가 어쩌면 이렇게 주님과 영적 인격적이 간격이 생겼습니까?
주님께서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자기 자신의 입장을 돌아 본 것입니다.
이러다 신세 망치는 것이 아니냐? 는 생각을 하니 예수님을 바짝 좇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흔들립니다. 나는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를 바라보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의 손을 맡기고 주님 곁에 꼭 붙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파렴치한 배반자입니까?
비록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만 베드로는 결코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요. 메시아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입니다. 또한 가룟 유대처럼 노예 한 사람 몫에 주님을 판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기 신변에 위협을 당하게 되자 공포를 느끼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베드로식 부인’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부인한 내용의 골자는 무엇입니까?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였습니다. 이것을 대략 두 가지로 요약 하자면 “나는 예수와 관계가 없다.” 그리고 “나는 예수를 잘 모른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베드로처럼 ‘베드로식 부인’을 행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 행세를 하면 신변이 불리해지거나 손해를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 믿는 냄새를 피우는 것이 쑥스러운 분위기라고 여겨질 때 어떻게 처신하십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하면서 교회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꽁무니를 빼지 않으십니까?
베드로처럼 직접적이든 암시적이든 예수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렇게 행하셨다면 당신은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헌신을 요구하시는데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신앙 양심을 팔아먹고 있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3등 나는 1등으로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결코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떳떳하게 드러내 놓고 사회 생활하는 사람은 20%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인정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쇠 조각이 달린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집니다. 피가 낭자합니다.
그러나 가물가물 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주님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꼬끼요~”닭 우는 소리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주님은 자신의 뼈를 저미는 고통보다도 베드로를 더 걱정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그 모진 고통 속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을 수 있으며, 베드로를 바라보실 수 있었겠습니까? 이때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도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바라본 주님의 눈빛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요?
“그 봐라 이놈아, 내가 뭐라고 하더냐?”라고 하는 책망의 눈빛이었겠습니까?
“에이 배은망덕한 놈아! 나를 모른다고? 나와 관계가 없다고?”고 원망하는 눈빛이었습니까?
주님의 눈빛은 사랑과 연민을 가득담은 눈빛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지만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서 도리어 책망보다는 자신을 격려하는 주님의 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현재의 배반보다는 회개후의 충성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제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시험의 날에 주님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제야 주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험에서 넘어졌습니까?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까? 사탄에게 아주 참패를 당했습니까?
주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미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을 바라보십시오.
사랑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분 눈은 어느 때나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사랑의 눈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귀는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도 듣고 계십니다. 응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라.” 여러분들을 향하여 끝없이 격려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부요하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부귀영화 때문에 제자들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당한대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인간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 때문에 결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끔직한 지옥의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두 다 이기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장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비교할 수 없이 깊고 크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올 한해를 살면서 주님을 부인하신다면 말씀을 기억하시고 회개하십시오. 통곡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