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0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가복음 23장 33절-45절
이번 유월절에는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렸다고 하며 그밖에도 여러 가지 하나님이나 하실 수 있는 일을 했다고 하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온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혹시 그분이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우리들의 왕이 아닌가? 하면서 기대하면서 한 맺힌 유대인들은 여기저기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손에 종려 나뭇가지를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 외치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역사학자들은 ‘지축을 흔들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우스꽝스런 예수님을 보고 비웃기는커녕 도리어 “구원하여 주소서.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인간이 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로 외쳐댄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닷새 후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닷새 전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환영했던 예수를 이번에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댄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님에게서 결코 죽일만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지만 흥분한 군중들이 민란이라도 일으킬까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어 주었습니다.
아침 해가 떴습니다. 그러나 어제처럼 희망을 상징하는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아침 9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탕! 탕! 탕! 먼저 길이 40센티나 되는 녹슨 사각형 못이 예수님의 손목에 박혔습니다.
뼈를 뚫고 녹슨 못이 십자가의 횡목에 박힙니다. 그리고 왼 손목마저 그렇게 박혔습니다.
이번에는 발목에 대못이 박힙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세워집니다.
손목과 발목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옵니다. 인간에게 가장 저주스러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피가 쏟아집니다. 물도 쏟아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여섯 시간 동안 달려 있었습니다.
제 3시 즉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제 9시 즉 오후 3시에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으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고통스럽게 죽어 가시면서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이 있으셨습니다.
바로 일곱 마디의 말씀(架上七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곱 마디의 말씀은 어떤 의미의 말씀이었습니까?
처음 두 마디는 용서와 구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두 마디의 말씀은 제 3시와 6시 사이에 하셨는데 요즈음 시간으로 하면 오전 9시에서 정오까지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33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자기를 때리고, 못 박고, 찌르고, 욕하고, 조롱하고,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십자가에서 바라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강도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전부였습니다. 축복은 예수님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분은 용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시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용서하시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용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도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교양 있는 행위나 너그러운 인간성 같은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용서하지 말라고 우리를 꼬드깁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과 교회를 파괴하려는 수작인 것입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도 너와 같은 인간이요, 같은 입장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정중한 겸손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면 성령 충만한 신앙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께서 용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내가 용서 못 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조롱하고 모욕하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죽인 사람들도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은 강도가 나 자신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세 번째 말씀은 끝까지 함께 하시는 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도 오전 9시와 12시 사이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가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복음 19장 26절에서 27절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은 십자가 밑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자신을 슬프게 쳐다보며 서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애절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머니 마리아의 장래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배반의 아픔보다도 강했습니다. 처절한 고통도 예수님의 사랑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은 배반보다, 고통보다, 죽음보다 더 강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가시면서도 예수님의 눈은 사랑을 가득 담고 어머니와 제자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눈동자 속에 우리들의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말씀부터 일곱 번째 말씀은 승리의 노래였습니다.
정오가 되자 사방이 어두워졌습니다.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 즉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태양이 비추는 모든 나라에 어둠이 동시에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현상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월절이므로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제사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그때 갑자기 침묵을 깨고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면 네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가복음 15장 3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침묵의 시간은 메시아가 겪은 외로운 투쟁의 세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은 속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고통의 세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메시아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다짐하는 세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죽음마저 순종하는 세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사방은 흑암에 덮이고, 아무도 도와줄 자도 그러므로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밀려드는 고통과 정신적인 아픔을 여섯 시간이나 겪고 나서 외친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패배자의 넋두리가 아니었습니다.
찬송이었습니다. 바로 승리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다섯 번째 말씀으로 증명하십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한복음 19장 28절 말씀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하신 말씀은 물을 달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것은 ‘모든 일이 이미 다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 말씀대로 이루시려고 하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갈증을 축배로 해결하셨습니다.
여섯 번째 말씀을 보십시오. 3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갈증을 신 포도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신 포도주는 승리의 축배였던 것입니다. 그 신 포도주로 축배를 드시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룬 줄 확인하신 주님께서 하신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6절 말씀으로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까지 함께 생각해 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3미터 정도의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당하시면서 일그러지는 그분의 표정을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고통 중의 신음과 하시는 말씀을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죽음의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죽인 사람들도 용서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을 용서 하십시다.
또한 강도까지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형제자매, 그리고 이웃들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축복하십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자기 사람들에게 책임을 다 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돌아보고,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다 이루었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세상과 사탄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혼을 맡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영혼도 맡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길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날마다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고통 중에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임지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는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끝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결과는 사탄과 이 세상에서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질문에 어떤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바보 같은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보입니다. 그 귀하신 자기의 외아들을 죄인들을 위해 죽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보입니다.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보입니다. 바보 하나님의 자녀요, 바보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상처 때문에 용서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미움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찬송으로 영광 돌립시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최후의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바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가득 담고 우리들을 내려다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33년이라는 짧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승리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고통을 이기시고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죽음이 이기지 못하는 놀라운 사랑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난 다음,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