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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8 새 사람을 입었으니
골로새서 3장 5절-11절
영국의 왕실로부터 눈총을 받던 영국 청교도 131명은 박해를 피해 1620년 9월 16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습니다. 마침내 지금 매사추세츠 주의 케이프 코트라고 하는 지역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직. 절약. 검소. 신의. 선택의 생활윤리와 신앙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 나갔습니다. 이렇듯 미국은 크리스천들이 이룬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한 가지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먼저 120개의 지갑에 10달러짜리 지폐 3장과 20달러짜리 1장 즉 현금 50달러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지갑 주인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가족사진, 상품 우대권도 함께 넣었습니다. 그다음에 이 지갑을 미국 전역의 대도시 세 곳, 대도시 교외 지역에 세 곳, 중 도시 세 곳, 소도시 세 곳, 도합 열두 도시에 각각 10개씩을 주차장, 쇼핑센터, 식당, 주유소, 사무실 등에 지갑 120개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 지갑을 들고 가는 사람이 누군지를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지갑이 과연 몇 개나 주인에게 되돌아갔을까요?
소도시와 대도시 주민 중 어느 쪽이 더 정직하며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은 어떤 차이를 보일까요?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대도시에서는 30개중에서 21개를 회수했으므로 약 70%, 특히 시애틀에서는 10개중 9개가 회수되었습니다. 아마 지갑을 돌려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요?
또한 대 도시 교외지역은 30개중 18개 회수 약 60%. 중 도시는 30개 중 17개 회수 57%, 소도시 30개 중 24개 회수 80%의 결과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을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미국 전역에 뿌린 120개의 지갑 중 67%에 해당하는 80개의 지갑이 온전하게 되돌아 왔습니다. 특별히 라스베가스와 같은 환락과 도박의 도시에서도 10개 중 5개가 되돌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과연 우리가 살고있는 서울에서 이런 시험을 했다면 얼마나 되돌아 왔을까요?
둘째 남자와 여자는 어느 쪽이 더 정직했겠습니까?
우연하게 120개의 지갑 중 남자가 60개, 여자가 60개를 주웠는데, 여자의 경우 43개를 돌려주어서 72%를 기록했고, 남자는 37명이 되돌려 주어서 62%에 그쳤습니다.
셋째 어른과 청소년들은 어떤 차이를 보였겠습니까?
지갑을 주어 주인에게 돌려준 사람은 어른보다 청소년들이 더 많았습니다. 지갑을 주운 청소년 67%가 정직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그 청소년들의 뒤에는 정직한 삶을 유산으로 물려준 부모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값진 결론을 얻었습니다.
지갑을 돌려준 거의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얻는 결론은 비록 미국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미국을 아직도 건강하게 지켜주는 주역들은 기독교인들이요, 기독교 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2024년도의 2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크리스천으로서 바른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본능적인 욕심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5절 말씀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체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씀은 육체의 소욕인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답게 살아가려면 세속적인 본능에 자신을 맡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음란은 무엇입니까? 성적으로 음탕한 생각과 행위입니다.
부정은 무엇입니까? 정직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사욕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욕심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세속적인 본능에서 발생하는 연약한 모습들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즉 욕심입니다. 마귀가 부추기는 것들입니다.
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욕심과 내게 있는 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더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육체의 소욕은 욕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려면 이런 세속적인 욕심을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욕심을 버리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죽이라고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의 시작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욕심 때문에 범한 죄로 인해 맞이하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욕심이 잉태되고, 죄가 자랄 수 있는 나의 옛사람을 아예 죽여 버리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하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서처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욕심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까? 아직도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육체가 죽으면 몸만 죽는 것이 아니라 욕심까지도 죽을 것입니다.
또한 서로 거짓말을 말라 하십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7절부터 9절 상 반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행했던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이전에는 분한 생각, 악한 의도에서 하는 생각, 그리고 방해 하는 것, 그리고 부끄러운 말을 옷처럼 입고 살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입어야 할 옷이 아닙니다. 이제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크리스천 고유의 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을 모신 후로는 신실하고 정직하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채워진 것이 말과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국 갤럽 조사 연구소에서 몇 해 전에 20세 이상 된 1,564명을 대상으로 20가지 직업을 놓고 정직성과 윤리성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학교수 48.1%, 방송기자 43.3%, 교사 41.3%, 판사 40.5%, 의사 37.7%, 변호사 35.2%
군인 28.5%, 공무원 14.5%, 기업가 11%, 국회의원 7.7%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더 충격을 주는 것은 다음 사항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정직하고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부가 62.6%, 승려가 44.9% 그리고 목사가 41.6%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신부와 승려보다 못한 것은 물론, 성직자가 아닌 대학교수나 방송기자보다 정직하거나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기관에서 한국의 영향력 있는 100명의 목사의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비리를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을 세상에 폭로하게 되면 아마 기독교는 엄청난 어려움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이렇게 참담한 결과에서 신앙인의 명예가 회복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9절 하 반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외친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계시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이제 새것이 되었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는 사람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외친 바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빌립보서 3장 5절에서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라고 할 정도로 나름대로 세상적인 것으로는 자부심을 갖아도 될 만한 사람이었고 출세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의 그의 고백은 전혀 다르게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빌립보서 3장 7절부터 9절에서 말씀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구원자로, 하나님으로 믿게 되면 성령이 우리들의 영혼 속에 거하게 되므로 모든 것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가장 자랑스럽고, 가치 있고, 좋은 것이라고 여겼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는 해로 여기고, 또한 배설물로 여기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어지기 위해서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도무지 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구세주로,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이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분들은 자기 자신과 이웃과 사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마구 해치는 공공의 적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
본능에 치우쳐 교만하고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능을 죽이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십시다.
우리들의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1993년 6월 삼성복지재단의 청소년연구위원회가 전국의 10대 4,026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커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한 학생들이 무려 56%에 달했습니다. 정말 실망스러운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그로부터 2년 4개월이 지난 뒤인 95년 10월에 같은 조사를 실시한 결과 아버지를 절대로 닮지 않겠다는 아이가 응답자의 75%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과 2년 몇 개월 만에 아버지를 불신하는 10대들이 20% 증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상황에서 볼 때, 우리의 직면한 현실은 참으로 부정적입니다.
사람들이 언행에서, 기업이 만들어내는 제품과 건축물에서, 사회의 관습이나 관행에서 모든 것이 암담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크리스천들이 삶과 언행에서 별로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이 자리에 모여 예배드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면의 모든 곳을 채우고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축복의 기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름다운 화음으로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입니까?
밤이 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까?
장엄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과정일 뿐,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궁극적인 영광의 형태는 아닙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하신 요한복음 15장 8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주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라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시며,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인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라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열매는 어떤 열매이겠습니까?
거룩한 영, 정직한 영에서 맺어지는 참되고, 진실하고, 흠이 없는 열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며, 거룩하게 예배드리는 것도 가지가 맺어야 할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가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와 제자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칭 제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정해주신 제자가 되는 길은 “서로 사랑하면” 그리고 “과실을 많이 맺으면”이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음을 기억하십시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구원받는 교인일 수는 있지만 주님의 위대한 역사에서 선한 도구로 쓰임 받는 주님의 제자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도덕적인 수준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말씀하신 베드로 전서 1장 15절에서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할 것은 권고사항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손가락질 받지 않고 크리스천답게 정직하게 살면 반드시 과실을 많이 맺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