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오 이동녕 선생은 대동단결을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이끌고
상해 임시정부를 가장 오랫동안 이끌어 오신 인물입니다. 임정 초대 대통령 대리까지 한 그는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하였는데요. 72세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고 임시정부 선봉에 서서 대한민국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25세 때 부친을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힘썼는데요.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을 펼치며 근대적 민족의식을 새롭게 형성해 갔습니다.
28세가 되던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한 것을 계기로 이때 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독립협회의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서는데요.
이로 인해 이준·이승만과 함께 투옥되고, 7개월간 옥중생활도 하게 됩니다.
출옥 후에는 더욱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에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는데요.
이종일의 권유로 <제국신문>의 논설 위원이 되어 수십 편의 논설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던 근대화론을 마음껏 펼치며 개화 자강론을 역설합니다.
34세 때는 이상재·전덕기 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 운동을 전개합니다.
<임시정부 요인,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이동녕 선생>
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그는 서울 상동 교회에서 전덕기·양기탁·신채호 등과 같이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원회복운동을 전개하는데요. 이 때 김구·이희영 등 지사와 교류하기 시작합니다.
다음해에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다가 체포되고 또 다시 투옥 생활을 감수합니다. 풀려나온 그는
만주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이상설·여준 등과 우리 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군궉회복운동의 역량을 키워갑니다.
귀국한 뒤에는 안창호·전덕기·이동휘·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 총무로서 활약합니다.
교육이나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의 방식으로는 일제 침략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판단, 무장투쟁으로
전환을 제기하면서 신흥강급소를 세워 후에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대첩 등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이 됩니다.
1914년 이상설 등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대동신문>, <해조신문>을 발행하며
대종교에 입교하는 등 광복 운동에 전념합니다.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영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대동단결을 호소합니다.
1924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직하고 초대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이후 국무령의 주석이 됩니다.
<석오 이동녕 기념관 내부>
1929년에는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1935년 세번째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는데요.
이때 양우조·엄항섭·이시영·조성환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당수로 추대되었는데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이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 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안타깝게도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채 쓰촨성에서 병사합니다.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그의 유언과 당부에 따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세 정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하였으니 그의 공적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석오 이동녕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석오 이동녕 선생님의 순국 79주기 추모식이 목천에 있는 선생님의 생가 기념관에서 있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석오 이동녕 선생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써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이 되어 대한민국 민주공화정부수립과 함께 임시헌장을 선포하셨습니다. 독립협회, 신민회, 서전서숙, 신흥무관학교, 임시정부수립... 조국의 독립과 민주공화국 건립에 전생애를 바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앞에 계십니다. 그분의 뒤를 이어 이제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를 이어 갈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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