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혼자 살고 난 뒤로 늘 밥맛이 좋다. 내가 밥을 해서 먹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마 누가 내가 혼자 밥 먹는 모습만 본다면 참 쓸쓸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오십이 넘은 사람이 혼자서 단칸 셋방 부엌 구석에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핏기 없는 얼굴로 밥 먹는 모습이 뭐 그리 즐거워보이겠는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참 외롭고 처량한 삶을 살아가는구나. 가족도 없이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하고 동정의 마음을 보낼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아, 맛있어, 아 맛있어 하고 밥을 먹어도 믿어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금 먹는 음식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이 밥을 어떠한 마음으로 먹고 있는지를 안다면, 아, 그렇겠네요, 그 밥 참 맛있겠네요 하고 수긍이 갈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저녁 8시가 넘어서 밥을 하였다. 늘 하던데로 쌀, 잡곡, 콩을 섞어 하였다. 오늘은 다른 날 보다 반찬이 더 많다. 강원도 어느 산골에 사는 할머니가 큰 가마솥에 정성들여 삶아가며 만든 청국장이라고 누가 보내주었다. 그래서 그 청국장을 이번 여덟번 째 사랑방 대화 시간에 같이 끓여 먹었다. 다 같이 먹고도 남아 내 사랑하는 친구가 두고 먹으라고 통에 담아 냉장고에 두었다. 그 청국장을 보글보글 끓여 새로 한 밥하고 먹으니 어찌 맛이 없겠는가. 오늘 반찬은 청국장 만이 아니다. 저 전라도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조기를 보내주어, 그 조기도 한 마리 구웠다. 이 조기도 또 어찌나 부드럽고 고소한지 새로한 밥과 먹으니 입에서 살살 녹는다. 나는 조기를 좋아한다. 옛날에는 조기가 귀해서 어려운 사람은 먹기가 힘들었다. 조기뿐만 아니라 어떤 생선이든지 귀하긴 했지만. 요즘은 어떻게 그렇게 조기가 싼 지 모르겠다. 만원만 주어도 작기는 하지만 한 두름이나 주니 말이다. 이번에 선물로 받은 조기는 내가 사 먹던 조기하고는 다른 종류들이다. 큼지막하고 더 맛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반찬은 참 많다.
내 사랑하는 친구가 사랑방 대화를 하면서 같이 먹으려고 콩나물도 많이 무쳐 놓았다. 나는 콩나물 무침도 좋아한다. 동치미와 배추김치, 겉저리도 친구가 다 갔다 주었고, 김도 친구가 사는 동네에서 구운 것이 맛있다고 역시 갖다 주었다.
보라. 얼마나 놀라운가. 나는 혼자 살고 있지만, 내가 먹고 있는 밥과 반찬은 모두가 다른 사람이 나를 먹이기 위해 보내준 것이다. 나는 지금 결과적으로 남에게 동냥한 음식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밥과 반찬으로 꾸려진 상 앞에 앉아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어찌 감사 기도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오늘은 주일이라 교회에 다녀오면서 성경을 읽었다. 늘 마주치는 대목이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성경도 그렇고, 노자의 말씀도 그렇고, 불경도 그렇다. 마음공부로 이끄는 이러한 깨우친 사람들의 말씀이 늘 새로운 데는 그 이유가 있다.
말씀은 비유와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좀 추상적이고 모호한 듯 보이지만, 어느 땐가 그 말씀을 몸으로 경험해 볼때 그 상징의 의미가 그야말로 내 삶에 한 송이 꽃으로, 어둠을 비추는 환한 불빛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한 인간에게 깨우침의 순간, 정신의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오늘도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한참 묵상을 하였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의복을 위하여 어찌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태.7:26~31)
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려면 저 말씀을 경험해 보아야 한다. 머리로 이해하고는 저 말씀의 의미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체험이지 이해의 범주에 속하는 대상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 갔다 오면서 차 안에서 읽고 묵상한 저 예수님의 말씀을 나는 지금 저녁 밥을 먹으면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오늘 저녁 내가 먹은 밥상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나는 단지 감사기도를 드렸을 뿐이다. 청국장도, 조기도, 콩나물 무침도, 동치미도, 배추 김치도, 김도 모두가 내 영혼의 친구(스승)들이 나에게 보내준 것이다. 저들은 바로 내게 나를 먹여주는, 나를 살려주는 예수의 분신들이다. 이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탁발승의 삶이다.
삶의 기쁨은 받는 쪽 보다 주는 쪽에 더 있다. 뇌물이 아닌 선물을 남에게 주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줄 때의 그 떨리는 마음은 받을 때보다 몇 배나 설레고 오래간다. 선물을 주고 받을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작은 선물을 말한다. 작은 선물은 영혼의 친구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나의 사랑을 표현하는 정신 놀이다.
보라, 오늘 내 저녁 밥상을 보라. 나는 굶어죽지 않을 것이다. 저 예수의 분신들이 저렇게 나를 먹여주기 위해 마음을 쓰고 있는 데 왜 굶어죽겠는가. 그러니 그 선물을 받는 내가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밥 맛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밥은 그래서 그 자체가 기도 덩어리다. 말씀 덩어리다. 밥을 먹는 행위 자체가 기도이고, 말씀을 듣는 시간인 것이다. 영혼의 친구들과 말씀을 나누는 시간인 것이다. 밥상을 차려준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고, 그 사람들에게 감사 기도 드리는 시간인 것이다.
3
요즘 뉴스에도 떠들썩한 사건이 있다. 수억 원의 곗돈을 분 사람들 이야기다. 어찌 이 사람들 뿐인가. 엄청난 액수의 돈을 재테크에 열을 올리며 살다가 파산을 당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미국에서 촉발된 자본주의의 허상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자본의 논리가 너무 기운이 강해 자연의 질서가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다 가지려는 독점자본의 기운과, 같이 공존하려는 탈자본의 힘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로 다시 되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얼마전 보브 제숍과 신광영 교수가 금융위기를 놓고 논한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도 한참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보브 제숍 교수의 말만 여기 옮겨본다.
중국이 지금 이 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미국이 누적되는 쌍둥이 적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대규모로 유입되는 중국의 잉여자본 덕이었습니다. 중국이 만약 그 돈을 빈곤 퇴치와 사회 안정망 확보 같은 내부 문제 해결에 사용했다면, 미국으로 흘러가 부동산 거품을 키우는데 일조하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위기도 없었을 겁니다. 그 점에서 중국과 미국은 부정적 공생관계에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이번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모색된다면, 중국을 헤게모니 국가로 삼아 추진되는 지역통합(블록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람직한 대안인지는 의문입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지속되는 것보다는 낫겟지만, 지역통합은 자본축적의 논리를 한층 강화함으로써 환경파괴와 사회적 연대의 손상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려스런 점은 위기해결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애국주의가 힘을 발휘한다면,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운동은 이 권위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한편, 다양한 사회적 실험을 통해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줘야 합니다. (한겨레. 2008.11. 27. 19면)
그렇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위기를 기회로 오히려 권위주의적인 국가로 회귀하는 모습을 점점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연대의 필요가 더욱 절실하지만, 권위주의적 국가를 지향하는 지금의 정부는 이런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든 훼손하고 방해하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금의 이런 위기를 겪으면서도 대중들은 아직도 자본주의 마법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자본(돈에)에 목숨을 거는가? 거기에는 분명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때 두려움은 증폭된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갈 수록 제태크를 외쳐대는 데에는 두렵기 때문이다. 돈이라도 부여잡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다. 또 왜 이리들 가족주의에 갇혀 사는가? 역시 두려움 때문이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하였기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를 나눈 근친의 본능을 타자와 친밀감을 나누는 진정한 사랑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경험해 봐야 하는데, 지금 한국의 근대 교육은 사랑과는 점점 멀어지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마법을 주입하는 경쟁과 지적 인종주의를 세뇌화시키는데만 몰두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이 연결고리를 끊어야 하는가. 많은 대안운동이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 마법이 지배하는 세 상에서 다시 사랑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사회적 연대를 해 나가야 한다. 그 실천 방안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모색해 봐야 한다. 동화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아동문학의 자리에서, 그리고 에로티즘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는 해혼운동을 벌여나가야겠다. 해혼을 주제로 한 사랑방 대화를 하는 것도 다 이런 대안운동을 염두에 둔 사회적 연대를 지향하는 하나의 실험이고 출발이다.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지 말고, 일상의 삶에서 작은 실천을 하는 대안운동을 벌여 나가야 한다.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에 목숨을 건다. 자본주의 마법에서 진정으로 놓여나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사랑을 경험하는 일이다. 사랑의 체험을 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소박한 밥상 앞에서 눈물의 감사 기도 드리는 체험을 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소박한 경험을 나누는 운동이 바로 해혼 운동이다. 해혼 운동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 소박한 한 가지를 지향한다. 남녀가 성의 경계를 넘어 유머러스한 영적인 친구로 살아가자는 운동이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몇 가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첫댓글 '작은 선물은 영혼의 친구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나의 사랑을 표현하는 정신 놀이다.' 자본에 목숨을 걸기보다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정신놀이에 열중을 해야겠네요. 나이를 먹을수록^^
오늘 저녁도 '예수의 분신'들이 먹여주어서 풍성했다넹~~^^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