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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1 예수를 좇으니라.
마태복음 4장 17절-20절
제정 로마시대 때 초대교회 즉 기독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때 로마제국에는 기독교를 박해하기로 악명 높은 10명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주후 64년 경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한 사람은 네로황제입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시에 불을 질러놓고, 기독교인들이 불 질렀다고 누명을 씌워 악랄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원에 있는 기둥에 기독교인들에게 왁스를 발라 묶어 놓고 불태우므로 정원을 밝힐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때, 바울과 베드로는 순교하게 되었는데, 바울은 참수를 당해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10명의 황제 중에 주후 117년에서 138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한 4번째 하드리안(Hadrian)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발견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그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한 충성스런 신하를 불러서 기독인들에게 비밀리 잠입하여 그들에 대해 조사하여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밀리 기독교인에 대해 조사해 온 신하가 하드리안 황제에게 보고한 보고서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믿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그렇게 억압을 당하면서도 도리어 억압하는 자들을 용서하며, 그들을 친구로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리어 선한 일을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아내는 남편에게는 절대적으로 순결하고, 그들의 딸들은 겸손하고, 순종합니다. 또한 남자들은 결혼을 중히 여기며 남편으로써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만일 노예가 있다면 노예 여자나, 어린아이에게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라고 권합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이 되면 더이상 노예가 아니라 형제자매로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또한 그들은 폭력을 가하는 자로부터, 그리고 가난으로 부타 고아와 과부를 구해 줍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않은 자에게 불평 없이, 아낌없이 나누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그네를 만나면 친절하게 처소를 예비해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형제이상으로 대해주며 도리어 그것을 매우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형제라 부르는 것은 육체를 좇아 형제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좇아 형제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더 감동스러운 것은 만일 형제 중 하나가 가난하고 궁핍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 위해 2-3일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메시아에게 망설임 없이 순종하고, 즐거이 사랑하면서 기꺼이 복종합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매 시간마다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 드립니다. 그러므로 그들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밝아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위를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아니하므로 이러한 그들의 사랑의 수고는 의롭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날로 새로운 사람들이 되고 그들은 날마다 거룩해집니다.”
당시의 로마제국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의연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기독교인들인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이 내용을 들으면서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들이 많이 부족한 모습이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에는 우리가 참다운 성도들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겠습니까?
참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5장 1절부터 2절입니다.
“아담의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대통령이나 목사나, 장로 집사로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 사람이 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면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리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분명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시며 한 사람도 사람다운 사람이 없음을 로마서 3장 10절과 12절을 통해 한탄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처럼 되고자’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이후, 외형으로는 사람됨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성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을 할 때, “사람 같지 않다. 짐승만도 못하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은 ‘사람’이 아니고 사실은 도덕적으로 조금은 훈련되고, 조금은 선진화된 동물이 지나지 않다고 욕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아이들이 재미있게 보는 오락 프로를 보았습니다. 그때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한 가정을 소개하는데 주인 할머니와 그 가족들이 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거의 열 마리는 족히 될 것 같았습니다. 덩치가 커다란 개부터 조그만 애완견까지 집 안에서 함께 사는데, 완전히 개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 그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예쁘장한 개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집에 온지 10년이나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놈은 할머니가 10년 동안이나 밥을 주었지만 조금도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10년 전에 가까운 이웃이 그놈을 키울 수가 없어서 할머니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놈은 자기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구석에 처박혀서 우울하게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10년 만에 옛날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우울하게 있던 이놈이 글쎄 10년 만에 보는 주인이지만 금방 알아보고 달려가서 얼굴을 마구 핥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놈은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다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놈은 이전의 그놈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할머니에게 다정하게 굴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아셨습니까?
강아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자기 옛 주인을 알아보는데, 인간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몰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므로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참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으며, 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참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것은 사도행전 11장 26절에서 안디옥교회 사람들을 교회 밖의 사람이 부른 것이 최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이라는 뜻도 되지만 정확하게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는 뜻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사람, 정말 사람다운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디옥교회 교인들을 향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 진짜 사람다운 사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고, 성도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생명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제일 마지막 날에 우리를 창조하시되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인해 모든 생명이 잉태됩니다. 초식동물도 육식동물도 모두가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사는 것을 먹으므로 살게 됩니다. 이처럼 흙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생명을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
생명의 법칙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의 삶을 가리켜 하루를 살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하루를 살았다’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육적인 생명이 유한한 존재인 우리로서는 ‘하루를 죽었다’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죽음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4장 26절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4장 25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 하나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불렀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인간들이 에노스 때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까?
사실 ‘에노스’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히브리말의 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사전을 찾아보면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노스 이전의 인간들은 누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무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눈앞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때 가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생명의 근원되시는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입니까? 한자에서는 죽을 사(死)자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죽을 ‘사’ (死)는 제일 위에 ‘한 일’ (一)자가 있고, 그 밑에 저녁 ‘석’ (夕)자와 칼을 가리키는 ‘비’(匕)자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란 ‘어느 날 저녁에 느닷없이 날아오는 비수’와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다가오는 것, 그것이 죽음의 정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시다.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영원히 사는 사람으로 생명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7절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흙의 특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흙은 사랑의 마지막 결론과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것을 다 수용해 주기 때문입니다.
‘해납백천(海納百川)’ 바다를 보십시오. 바다는 깨끗한 물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똥물도 받아 줍니다. 그리고 흙탕물도 받아 줍니다.
흙은 그 모든 것을 담은 바닷 물을 자기 몸으로 담아 줍니다. 그러므로 흙은 결코 배척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수용한 뒤 자기 품으로 품습니다. 그리고 함께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정화시켜 줍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으로 열매 맺게 합니다.
그렇다면 안디옥교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면을 보고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포용성 때문이었습니다.
하드리안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대로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포용력이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포용력은 어디에서 기인합니까? 바로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것은 참으며, 어떤 것만 믿으며, 어떤 것은 바라며, 어떤 경우에만 견디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을 용서하며, 도리어 친구로 만드는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배반의 상처와 찔리고 상함의 고통을 끝까지 참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지고 죽으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끝까지 믿으며, 자신에게 침 뱉고 채찍질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끝까지 바라며, 그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몸소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회복을 통하여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이 회복된 사람’으로, ‘너그럽게 포용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 사람으로 회복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회복되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성의 사람, 즉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성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만 흙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동물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고, 동물들에게는 생기, 즉 하나님의 숨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어 넣어 주신 성령 즉 영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영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결코 믿지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Adam)’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히브리어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그를 찾을 때,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면 부르시기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셨습니다. 바로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참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어 ‘참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를 성령의 사람, 영성의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게 하실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여 우리는 ‘참사람’으로 회복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회복되고,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는 나날이 되시기를 ‘참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아름답게 회복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