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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원광연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6
서언
“(두 권의 성경을) 함께 묶어주는 끈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역동적인 개념이다.”
존 브라이트는 주로 구약의 소망을 다루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연구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늘날의 비평적 연구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역동적 개념을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역의 핵심으로 다루질 않는다. 그 결핍을 본서가 메우고자 한다.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또는 미래적인 면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하나님의 나라가 그저 소망을 줄 뿐 그 이외에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이 것의 없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 자체를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천년 동안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으 복음서의 강조점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의 확실한 특징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자신과 그의 사역을 통해서 이미 임하였다는 것이다(마12:28). 그 나라의 비밀(막4:1)이란 곧 그것이 전혀 예기하지 못한 상태에서 역사를 꿰뚫고 드러온 비밀을 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의 미래적인 면이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줄곧 하나님이 지상에 그의 통치를 세우실 주의 날을 바라보았다. 복음서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올 시대에 속한 것이요 따라서 종말론적인 축복이라는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막10;23-30).
본서의 목적은 그 종말론적인 나라가 과연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역에서 현재의 실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다.
제 1 부 서론
1장 종말론 논쟁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마음에서 뿐 아니라 예수 자신에게서와 인간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통치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해서 현재요 동시에 미래이며,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며, 영적인 동시에 묵시론적일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구속적인 활동은 여러 차례 결정적으로 역사할 수가 있으며, 신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능력적으로 드러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2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
2장 구약의 약속
최초의 복음서는 예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소개한다: “예수께서 갈리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그 어디서도 그 용어를 정의하신 일이 없다. 누군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는 이 개념이 너무도 친숙한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레 정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구약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관념은 선지서 전체를 통틀어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과 온 땅의 왕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시지만, 그는 특별한 의미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충만히 경험하게 될 날이 올 것을 기대한다.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하나의 소망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브라이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로 정의하며, 특별히 그 통치와 그 백성이 역사의 종말에 영광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
역동적인 소망
구약의 개념에서 첫째로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것이 하나님 중심이요 역동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사건들의 상태나 만물의 최종적 질서에 대해서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타날 사건들의 상태는 다만 그 하나님의 다스림이 최종적으로 실현되어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일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추상적인 혹은 역동적인 성격이 중심을 이룬다는 사실은 히브리어 단어 말쿳이 구체적인 의미보다는 주로 역동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일차적으로 통치, 다스림, 혹은 권위를 가리키며, 통치가 시행되는 영역이라는 뜻은 다만 부차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말쿳이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될 때에는 거의 언제나 하늘의 왕으로서의 그의 권위나 그의 통치를 가리킨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145:11,13).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103:19)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6:10-13)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8:8-9)
이처럼 “임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중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이 개념이 역사와 종말론을 함께 연결시켜 준다. 시내산에서 나라가 탄생한 때로부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최종적으로 구속함을 받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 전체는 하나님의 강림에 비추어서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존재케 하셨고 그리하여 그들의 왕이 되셨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 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신33:2,5)
이러한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권능의 (theophany) 현상으로 묘사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오실 때에, 그의 피조물이 그의 권능과 영광 앞에서 떨었던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그의 세계와 그의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관계의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초월하여 계신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늘 저 멀리 떨어져만 계시지 않고 그의 백성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복주시고 그들을 판단하신다.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따라서 그 본질상 유한하며, 일시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에게 굴종하는 관계 속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임하실 때에 땅이 진동한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낼 뿐 아니라 피조 세계가 그 창조주에게 완전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심판도, 구원도 하나님의 강림하심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스가랴는 모든 열방들이 모여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싸움을 벌일 “주의 날”을 예견하고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나가서 그 열국을 치시되 --.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고 한다(슥14:3,5). “만군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임하사(사29:6) 그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러한 언어 이면에는 강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만드셨고, 그들의 역사 가운데서 거듭거듭 그들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은 미래에도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반드시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소망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니, 오히려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 히브리인의 믿음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경험한다는 신 개념 때문에 역사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구약에 나타난 소망의 근본적인 근거는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종말론적인 소망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 소망은 종말론적인 소망이다. 그리고 그 종말론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신관에 필수적인 부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차례로 악한 민족의 압제 아래서 고통을 받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임한다는 것에 대해 절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역사를 하나님의 현장으로 생각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이루어질 지상적인 나라에 대한 예언적 소망은 사라지고, 그 대신 역사를 초월하는 나라에 대한 묵시론적 소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부분적으로 페르시아와 이란의 이원론의 영향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오로지 초역사적인 권능이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와서 초월적인 비지상적인 질서를 세움으로써 임하게 될 것이다. 지상적인 다윗 가문의 메시야는 사라지고, 그 대신 구름을 타고 임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될 천상의 초월적인 인자(Son of Man)가 등장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적 완성을 역사의 틀 속에서 생각하는 예언적 견해들은 종말론으로 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역사를 통하여 활동하시며, 절대로 역사적 인과 관계의 사슬을 끊으시지 않는다. 현대의 용어 정의에 따르면, 소위 예언적 종말론은 “역사 내에” 있는 반면에, 묵시론적 종말론은 “역사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상적인 소망
구약의 소망을 종말론적인 소망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소망은 동시에 지상적인 소망이다. 구속에 대한 성경의 관념에는 언제나 땅이 포함된다. 히브리 사상은 사람과 자연이 서로 본질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땅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 실존의 현장이다. 사람의 도덕적인 삶과 자연 사이에 상호 관계가 있으며, 그러므로 땅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속을 공유하여야 마땅한 것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역사와 종말론
구약의 소망은 또한 역사적인 성향을 지닌 소망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통치가 확립되는 것을 역사 속에서의 그의 활동의 완성으로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인 종말론적 소망이 바로 앞의 역사적 미래와 직접 관련을 맺고 있다는 뜻이다. 선지자들에게는 바로 앞의 역사적 미래와 궁극적인 종말론적 미래를 동시에 포괄하는 한 가지 소망 밖에는 없었다. 선지자들의 예언에 이상스럽게도(우리가 보기에) 연대기적인 관심이 결여되는 있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이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종말론의 의의는 주로 역사와의 관련성에서 찾아진다. 왜냐하면 종말론이나 역사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주로 관심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고, 그 궁극적인 뜻에 비추어서 지금 여기서 활동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바로 앞의 미래를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근거하여 해석하였던 것이다. 선지자들의 주 관심사는 미래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고 또한 그의 백성의 운명이었다. 그들의 주 목적은 현재를 미래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것이다.
두 가지 강림, 곧 가까운 미래에 있을 강림과 머나먼 미래의 강림은 편의상 역사적인 강림과 종말론적인 강림으로 부를 수 있는데, 이것들을 서로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날은 역사적으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은 또한 인류에 대하여 종말론적인 심판이 임하는 날이다. 그러나 이 두 날이 마치 한 날인 것처럼, 하나님이 한 번 강림하시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예언들에서 역사와 종말론은 서로 뒤섞여 있어서 실제로 서로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 사실은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긴장을 강조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이시다. 그의 주되심은 심판과 구원을 위한 역사적인 강림들을 통해서도 드러나며, 또한 마지막 심판과 구원을 위한 종말론적 강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하나님은 현재에도 임하며 후에도 임하실 왕이시다. 미래가 현재와 관련을 맺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강림 모두가 그 백성을 위하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윤리적 소망
선지자들의 약속의 마지막 특징은 윤리적인 강조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현재와 미래 사이의 윤리적 긴장 속에 서 있다. 미래는 오로지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에게만 소망과 약속의 날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윤리적 명령이 계속해서 주어진다. 과거의 역사를 뒤돌아보며 미래의 사건들을 미리 제시하는 예언의 주요 목적은 이스라엘을 현재에 하나님과 화목케 만들기 위하여 그들에게 윤리적이요 종교적인 요구를 제시하는 데 있었다.
에스겔은 다른 선지자들보다도 훨씬 더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가르쳤다. 어느 누구도 택함 받은 백성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축복의 수혜자가 될 수는 없다. 누구나가 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의로움 혹은 그의 죄스러움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를 통해서 에스겔은 “모든 도덕적인 삶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와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매우 민감했다. 그들은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물론 미래의 종말론적인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회복이 있을 것으로 예견하지만, 그것은 오직 정결케 되어서 의롭게 된 백성에게만 있을 것이다. 종말론은 윤리적이며 종교적으로 조건지워진 것이다. 선지자들의 이러한 윤리적 관심을 통해서 나타나는 가장 의미깊은 결과는 아마도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있고 정결케 된 남은 자일 것이라는 그들의 확신일 것이다. 이 남은 자 개념은 구약의 소망의 기본적인 윤리적 성격을 잘 꼬집어서 보여주는 동시에 교회와 이스라엘이라는 신약 개념을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 구원을 경험하게 될 회복된 이스라엘은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 전체 가운데 한 일부요 나머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아모스는 과거의 이스라엘을 불에서 건져낸 부지깽이에 비유하며, 미래의 이스라엘을 사자의 입에서 구원받은 몇 마리 양에 비유한다(암3:12). 이사야는 그의 한 아들의 이름을 스알야숩이라 하였는데(사7:3), 이는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이다. 미가는 “야곱의 남은 자”라는 어구를 실제로 이스라엘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미5;7-8). 예레미야는 다윗의 의로운 가지가 다스릴 때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멀리 흩어져있던 양 떼들의 남은 자들일 뿐이다(렘23:3-6).
이사야는 믿음이 없는 나라의 멸망을 무너진 나무에 비유한다. 그러나 그 나무에 한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며,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시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사4:2-4).
미래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종말론적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신실하고 거룩하며 의롭기 때문이다. 더 깊은 개념이 존재하는데, 참된 이스라엘은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아니요 영적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구약 전체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진술로 정리되는 것이다:“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9:6). 오직 노아와 그의 식구들의 남은 자만이 홍수에서 구원을 받았다. 이삭과 그의 후손만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유업으로 받았다. 이스라엘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엘리야는 바알에에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이 있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 예레미야는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은 자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을 구분했다(렘4:4). 존 브라이트가 지적했듯이 남은 자는 민족 내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구원을 경험하게 될 그 이스라엘은 민족이기 보다는 “교회”이며, 육신적인 이스라엘이기보다는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민족적이며 육신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요인들에 종속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임박성에 대한 언급을 자주하는데, 이는 현대의 분석적인 연대 계산의 관점에서 볼 때에 전혀 잘못된 것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 바로 코 앞에 다가오기라도 한 것처럼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고 말씀하는 것이다(사13:9,습1;7,욜1;15,옵15).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러한 임박성에 대한 언급은 선지자들의 안목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현대의 연대 계산의 관념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해서는 안 되며, 그 자체의 정황 속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날이란 역사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급박한 활동이며 동시에 궁극적인 종말론적 강림이기도 한 것이다. 선지자들은 보통 여호와의 날의 이 두 가지 면을 서로 구분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 두 가지 모두 동일하신 하나님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 두 사건들을 마치 하나인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미래가 현재에 미치는 윤리적인 영향이었다.
하나님은 과연 활동하셨다. 여호와의 날은 과연 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여호와의 날은 계속해서 미래에 속한 종말론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임박한 미래와 궁극적인 미래 사이의 긴장,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긴장이 선지자들의 안목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관심사의 핵심인 것이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며 그것이 언제 일어날 것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와 머나먼 미래의 주이신 하나님이 현재의 그 백성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