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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하나님 나라』, 전의우 역, 복 있는 사람, 2008
이 책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1963년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12주간 설교한 것을 모은 것이다. 당시 상황에 관한 언급들은 대부분 뺐다.
-크리스도퍼 캐서우드
추천의 글(정근두)
위대한 설교가의 특징은 위대한 설교 주제를 붙잡고 설교한다는 것이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설교가 로이드 존스의 ‘하나님 나라’는 로이드 존스다운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오신 주님이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할 때부터 다룬 주제이며,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마가에 따르면, 주님이 맨 먼저 선포하신 주제가 바로 ‘하나님 나라’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마태, 마가, 누가 등 소위 공관복음서에 고루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 주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상에 계신 마지막 40일 동안에 집중해서 선포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사도 요한도 역사의 궁극적인 성취로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11:15)
로이드 존스는 마가가 자신이 전하려는 메시지 전체를 요약한 말씀인 막 1:15을 택하여 ‘왕의 선포’라는 제목으로 첫 설교를 삼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분명한 성경 말씀을 앞에 두고도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중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기독교에 대해 전체적으로 잘못 알고 있고, 필연적으로 세세한 부분까지도 잘못 알고 있는 현대인을 향해,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이 탐구해 낸 것이 아니라 왕의 선포를 전달하는 것임을 처음부터 분명하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임을 역설한다. 그의 설교를 읽고 있자니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야만 하는 절박한 필요가 생생히 전달되어 온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통해 다시 한번 우리 시대에 선포되는 것 같다.
1 왕의 선포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리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이 구절은 아주 특별하다. 마가는 자신의 특별한 복음서 첫 머리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이제 자신이 전개하려는 메시기 전체를 간략히 요약해서 제시한다. 마가는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그 핵심을 제시한다. 제가 여러분의 관심을 이 구절에 집중시키는 이유는 이 구절이 기독교를 아주 완벽하게 요약해 주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기독교가 무엇이며,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거의 한 순간도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어떻게 사람들이 성경을 펼쳐 놓고도 복음의 세세한 부분은 아니더라도 복음 전체를,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20세기 말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복음의 기초를 잘못 알고 있으며,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잘못 알고 있으며, 복음의 목적을 잘못 알고 있으며, 복음에 접근하는 방법을 잘못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우리는 틀림없이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누구라도 갑자기 재난을 당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이 어느 순간에 끝날지 모른다. 해도와 나침반도 없지 않는가? 지식도 없지 않는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항구로 인도해 줄 항해사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 감사하게도 좋은 소식이 있다. 함께 이 본문을 살펴보자. 저는 지금 “수심을 측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수심을 측량할 때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제게는 해도가 있다. 지도가 있다. 여러분에게 최대한 간단하고 분명하게 그 지도를 설명하고 싶다.
본문이 이 모든 문제를 얼마나 분명하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자.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열쇠가 되는 단어가 금방 나타난다. “전파하여 preaching”로 번역된 단어가 흥미롭다. 이 단어는 당시 로마제국 황제 숭배와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전파’라는 단어는 황제에게 아들 곧 후계자가 태어나면 이 사실을 선포했는데, 바로 이 과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전파’(선포)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공표였다. 이러한 선포는 후계자가 태어났을 때,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이 갈릴리로 오셔서 공표하고 선포하고 알리셨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포고자의 특별한 의무였다. 포고자는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단어는 나중에 사도들이 한 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그 후로 지금까지 교회가 하는 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왔다. 우리는 황궁에서 나온 확실한 소식에서 시작한다. 선포는 권위가 있으며 절대적으로 분명하다.
삶은 게임이 아니다. 삶은 놀이가 아니다. 진리를 찾고 추구하고 탐구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비판하면서, 우리의 복음이 언제나 너무 확신에 차 있고 너무 독단적이라고 말한다. 삶은 진지하고 엄숙하다. 삶은 실재이며 신중한 것이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은 대단한 실험이나 대단한 추구나 대단한 탐구의 여정으로 저를 초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제가 삶에서 실패하여 마음이 찢어지고 영혼이 피를 흘리며 절망 가운데 거의 포기할 때, 갑자기 나팔이 울린다. 권위 있는 선포가 들린다. “들으시오. 나는 포고자요, 황궁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가져왔소. 이제 그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전파(선포)하겠소.” “전파”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시작이다.
저의 의무는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이 책, 곧 성경에 있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이다. 제가 포고자로서 여기에 선 목적은, 여러분에게 삶에 대한 저의 이론이나 사상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제가 여기에 선 이유는, 제가 황궁의 메시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모든 의문이 이미 다 풀렸으며 여러분의 모든 문제가 이미 다 해결되었음을,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권위 있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여러분은 이 선포를, 이 포고를 들어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평안과 안식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전파와 선포, 권위 있는 포고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깨 감사를 드리자!
두 번째 살펴볼 단어는 “때”이다. “때가 찼고”. 이 말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될 때가 실제로 이르렀다는 뜻이다. 구원의 메시지이다. 구원의 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도 전에 이 계획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것이 선포의 핵심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진리를 찾아보라고 촉구하지 않는다. 성경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진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성경의 전체적인 핵심은 자신을 아시고 인간을 아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인간을 실패와 죄에서 구해 내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귀한 시민으로 삼을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알리셨다고 말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여기에 선포가 있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내 방법이요, 이것이 내 계획이다. 이것을 믿어라. 그러면 이것이 참되다는 것을 알리라.’” 이것이 메시지이며, 하나님의 계획이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시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에 자신의 성품을 계시하셨다. 그분은 거룩한 하나님이다. 그분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벌하신다. 그분은 “빛들의 아버지 —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시다(약1:17). 그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시다. 그분은 영원히 절대적인 하나님이시며, 만유의 하나님이시며, 만유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이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똑같이 참이다. 사람이 예전과 다른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달라졌는가? 원자를 쪼겠기 때문에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가? 인간을 우주에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도덕한 행위를 버렸는가? 이 모든 것이 엄청난 진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정욕과 악한 열정을 버렸는가? 그 대답은, 물론 엄청난 과학적 진보가 있었지만 우리와 전혀 무관하다 할 정도로 우리 삶에 아주 작은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문제는 그대로이다. 그동안 쌓아 놓은 엄청난 지식도 아주 작은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취하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메시지를 주고, 성령으로 그를 인도하시며, 그에게 영감을 주어 그 메시지를 정확히 기록하게 하셨다. 사도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앞으로 10억 년간 계속된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나 천국이나 지옥이나 구원에 대해, 지금 영적인 눈으로 성경을 읽을 때 알 수 있는 것보다 결코 더 많이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 또한 핵심이다.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가르침이 아니라 기록된 역사이다. 기독교는 “들으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이오.”라고 말한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11).
본문에 “요한이 잡힌 후에”라고 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시간 속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다. 그 순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다”고 하셨다. “내 말을 들어라 그 일이 이루어졌으며, 그때가 왔다.”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궁극적으로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이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에 달려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의지하면 구원받는다. 이것은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시대”는 그 어떤 것도 바뀌 놓지 못한다. “핵 시대”일지라도 말이다. 역사의 전환점은 2천 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시간을 초월하는 결정적인 사건, 유일무이한 사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요한이 --- 예수께서 갈리리에 오셔셔” 이것은 역사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시대는 바로 그 순간, 새 시대, 하나님의 시간이다. 이렇게 해서 복음이 선포된다.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뒤를 돌아보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 놓으셨고 여러분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이루어 놓으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분이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is at hand”라고 하셨다. 이것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더 좋은 번역이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곁에 왔으니 has drawn near”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리라가 아니고 이미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르렀으며 이미 가까이 와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중요한 일을 하시겠다고 오랫동안 약속하셨다. “‘너희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3:15).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8백 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사40:5).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질 것이라고 했다(사40:4). 대로를 준비하라. 예비하라. 메시야, 구원자가 오신다. 그분이 오신다! 모든 선지자가 똑같이 말했으며, 사람들은 그분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때 주님께서 갑자기 나타나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하나님은 그분이 오랫동안 약속하신 것을 이제 이루셨다. 주님은 “이것이 좋은 소식이며,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이것은 왕의 선포이며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세상이 지금과 같은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행한 악의 열매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고 말한다(잠13:15).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말한다(사57:21). 핵시대의 똑똑한 현대인들이 고통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한, 이들의 고통은 커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이것은 의가 도래하며 평안이 온다는 뜻이다. 악이 제거되고 패배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며 우리에게 영원한 복락의 소망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인간은 죄의 노예이다. 인간은 비참하게 결박당해 불행 가운데 있지만 스스로 결박을 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쇠사슬을 끊고 놋문을 부술 수 있는 분이 오신다. 그분이 포로를 자유하게 하실 수 있다! “그분이 오시네. 두꺼운 악의 장막을 뚫고, 밝은 마음의 빛으로 임하시니 눈먼 자의 눈에 천상의 빛이 비치네. 그분이 오시네. 상한 마음 붙드시고 피 흘리는 영혼 치유하며 은혜의 보화로 비천하고 가난한 자 부유케 하시네.”(필립 다드리지)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의미하는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4:18-21).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 해방의 날, 용서의 날, 갱신의 날, 새로운 생명의 날이 임하였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그분과 그분의 통치를 기뻐하는 날이 임하였다. 그날이 왔다. 전능자의 사랑의 날, 은혜의 날이 임하였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그날이 그분에게서 임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이라고 말하며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내가 구원자를 보내리라” 말씀하셨다. 이제 그분이 오셨다. 베들레헴 마구간에 오셨다. 그분은 왕이시다. 하나님 나라가 왕과 함께 임했다. 그분이 오셨고 이제 선포하고 계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러, 여러분을 해방하러 오셨다. 그분은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과 자신의 일을 통해 여러분을 구원하신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이것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저는 이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반자이며, 죄인이며, 우리는 악인이다. 우리가 자격 있는 시민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분이 해답이다. 이것이 복된 소식이다. 그분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메시지는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19,21).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셨고, 이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니 들으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제 그분은 그저 이렇게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다시 생각하라. 나의 메시지를 믿으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라. 여러분의 어리석음과 죄를 인정하시라. 여러분의 수치와 무능력을 인정하시라. 탐구를 멈추시라. 여러분의 대단한 지성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시라. 그저 이렇게 말하시라.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저는 유한하고 죄악된 인간입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내 영혼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전부이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
“믿기만 하면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가 너의 모든 것 중에 모든 것 되심을”(존 몬셀).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이와 같은 소식은 없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복된 소식이다. 이것만이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이다. 한 번도 회개한 적이 없는가? 그렇다면 회개하시라. 복음을 믿고 구원받으시라. 여러분은 구원받을 것이다. 여러분은 곧 죽든 한참 후에 죽든 상관이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과 화해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영원한 미래는 절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다. p.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