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장 신랑의 친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 요한복음의 중대한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참 기독교는 아들에게서 생명을 받는 것, 더 풍성히 받는 것, 그 안에 있는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사실상 신약성경 전체의 주제이다.
오늘날 세상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자극제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생명인데,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는 그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점점 더 받고 있는가? 지금 교회는 무시당하며 거부당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 참 부흥과 개혁이 일어난다면 세상이 교회를 다시 보기 시작할 것이다.
- 우리는 왜 충만함에 대해 더 알지 못하는 것인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대표하는 장애물을 이미 살펴보았다. 이제 세례 요한의 친구와 제자와 추종자들이 대표하는 장애물을 살펴보려 한다.
교만이다. 교만은 여러 가지 형태로 –지성의 교만, 성취의 교만, 이해의 교만- 로 나타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본질로서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다 교만하다. 원죄는 다름 아닌 교만의 죄였다. 이 교만이 모든 문제의 원천이 되었다. 교만만큼 자주 하나님의 성도와 지도자를 불구로 만든 죄가 없다. 다윗도 교만 때문에 여러 번 스스로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일이 있었다.
요한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의 메시지를 듣고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활기가 넘쳤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라는 인물이 등장하더니, 얼마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무리가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요한의 제자와 추종자들은 요한을 능가하는 무언가가 예수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용인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욕이었다. 그들은 이처럼 교만에 사로잡혀 세례 요한의 교만 또한 부추기고 자극하려 들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3:26) 요한은 즉시 대답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27))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작동하는 원리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의 제자들처럼, 지금 이대로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실한 종교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교회 영역 안에서 독실하게 살 수 있다. 니고데모에서 문제를 보았고, 요한의 제자들에게서 동일한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그들은 교리를 알고 자기 지식을 의지하며, 그 밖의 모든 것을 비판한다. 자기만족에 빠져있다.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남들과 다른 것에 감사드린다. 더럽고 극악한 죄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선행도 한다. 그런데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지은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를 구하겠는가? 더 충만해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남들이 다 자기 같지 않는 것만 애석해 할 뿐이다. 이 제자들의 입장도 그런 것이었다.
교만은 체험의 영역에도 작동한다. 늘 수년 전의 결단의 일에 의지하고 그 상태에 머물러 있다. 중생하고 회심할 때 받은 것이 전부이다. 이처럼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은 새로운 가르침을 싫어하게 된다. 이들의 문제도 요한의 가르침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미 다 있는데 왜 굳이 다른 것이 필요하겠는가? 종교개혁 때도 당연히 그러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신약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된다. 참된 메시지를 듣고도 새롭고 낯설고 다르게 보인다는 이유로 분개하며 멀리할 수 있다.
그 이면에는 동요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다 자기 삶을 관리하고 싶어 하며, 자기 통제 아래 두고 싶어 한다. 이것은 죄의 징후이다. 멜버른 경은 “종교가 인격적이 되기 시작하면 참으로 곤란하다”라고 했다. 종교는 일반적이고 모호한 것으로 남아 있어야지 나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동요하게 하거나 나의 부족함을 각성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주님을 미워한 이유, 요한의 제자들이 불쾌감을 느끼며 이런 태도로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문해 보자. 우리를 점검하고 방해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들을 때 분개하게 되는가?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자신이 복된 복음의 영광스러운 제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것보다 긴요한 일이 없다. 육에 속한 자는 십자가의 도, 특히 중생의 가르침에 그릇된 반응을 보인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1:18) 예수는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연인에게 호소력을 발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진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분개한다. 그것은 내가 거듭나야 한다면 난 개선이 불가능할 만큼 부패한 존재라는 말이 된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이런 정신이 고집스럽게 남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여러분이 자신의 부족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충만함을 더 받고자 할 때, 주위 사람들이 “신앙은 적당한 것이 좋은 거야. 조심하지 않으면 광신자가 된다”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세례 요한을 지지하고 그의 평판을 지키며 그를 찬양하려 했던 것처럼, 주위 사람들도 그것이 여러분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은 그 말의 본질을 파악해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7-30)
- 요한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는 주님과 그의 가르침에 분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 먼저 요한의 반응이 중요한 만큼, 다른 이들의 예를 들려고 한다. 위대한 전도자 무디는 어느 날 예배를 마친 후 두 여성이 와서 말하기를 “저희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더 큰 능력으로 사역하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후에 무디는 고백하기를 그 말에 분개했다고 했다. 존 웨슬리는 폭풍우로 배가 곧 난파하여 빠져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죽음이 두려웠다. 그런데 같은 배를 타고 있던 모라비아 형제단은 아무 동요 없이 편안히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분개하기는커녕 그것을 갈망하고 열망했다. 이것이 요한의 반응이었고 웨슬리의 반응이었다.
① 요한은 주님을 인정했다.(요1:29. 3:31-34) 그가 “흥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그가 누구시며 어떤 분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승천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모든 원수를 정복하고 위로 올라가셨다. 그가 여러분을 위해서 하실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늘 위에 계신 분을 바라보고 그가 누구신지 알 때 모든 제약이 사라지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면서 그의 충만함을 받게 된다. 주님에 대한 교리를 분명히 모르면 그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다.
② 요한은 주님에 대한 참된 평가를 내렸다. 요한의 훌륭한 점은 겸손에 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절대 충만함을 받지 못한다. 이미 가득 찬 단지에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보다 큰 능력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요한은 자신의 위치와 크기를 알았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가진 것은 전부 받은 것이므로 결코 자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가진 것은 다 받은 것이다. 난 자랑할 것이 없다. 난 도구요 수단이요 통로일 뿐이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다.(고전4:7)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랑이 사라지고 겸손해진다. 듣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③ 요한은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요한의 관심은 진리 자체와 그 성공에 있었다. 그는 ‘친구’에 불과했기에 신부에게 관심을 두었다. 진리에, 주님이 백성에게 해주실 수 있는 모든 일에 관심을 두었다.
④ 요한은 자기 위치에 온전히 만족하였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노라” 신랑의 친구가 할 일은 준비하는 것뿐이다. 신랑의 친구가 된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 이것이 요한의 정신이다. 자신의 특별한 은사 및 남보다 높아지는 일에 대한 관심은 이제 그만 버리라. 자아는 이제 그만 버리라.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보냄받으셨고, 항상 그 일을 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특별한 은사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게 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작은 자리를 채우는 데 만족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셨다. 그는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충만함만 바랐기에 그가 주신 자리를 더 진실하고 철저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몸의 어떤 지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내 역할을 감당하는 것, 나를 통해 몸에 영양과 힘이 공급되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과 주님의 영광에 항상 시선을 고정시키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은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여는 은혜를 주시길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