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장 가련한 자아는 점점 작아지게 하소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에 그 답이 있다는 점을 말해왔다.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와 연합하여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 것이다.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살며 주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만 하면 모든 상황이 완전히 바뀌고 달라질 것이다. 교회도 지금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 능력과 활기에 넘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무언가 박탈당하는 듯한 인상을 줄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밖에 머무는 것이요, 기독교가 협소하고 옹졸하며 갑갑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삶의 영광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고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걸인처럼 살고 있고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은 자아만큼 번번히 충만함을 앗아가는 것이 없다.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내가 쇠하지 않는 한 그가 내 삶에서 흥하실 가능성은 없으며, 내가 그의 충만함을 받을 가능성 또한 없다. 현대 많은 그리스도인의 비극은 중생하는 순간 전부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던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상태가 그랬다.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몰랐기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지난 설교에 이어 자아가 쇠하는 증거를 제시하려 한다.
- 자아가 쇠하면 감정에 점점 덜 기대고 믿음에 점점 더 기대게 된다.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온갖 감정과 체험이 포함된다. 감정이 없으면 기독교도 없다. 복음은 우리의 일부가 아닌 전인을 요구한다. 마귀는 선한 것에 과도히 집중하게 만듦으로 악하게 변질시켜 버린다.
감정에 기대어 사는 삶이 위험한 것은 자아를 우쭐하게 만들고 자기만족과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러 올라가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그런데 ‘육체의 가시’가 생긴 것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하나님은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라고 가르치셨다. 이처럼 우리가 쇠하여야 그가 흥하신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해주는 일을 하나님도 영적인 삶이 유아기와 유년기에 해주신다. 아이는 계속 체험이 주는 감정에 기대어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감정은 왔다가 사라지는 아주 기만적인 것이기에 안정된 것이 못 된다. 감정에 기대어 살면 결국 혼란과 실망에 빠지고 실패하기 쉽다. 감정에 점점 덜 기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에 점점 더 기대어 살게 되는 것이야말로 성장의 표시요 자아가 쇠하는 표시이다.
성령의 은사보다 은혜를 높이 평가하는 것 또한 우리는 쇠하고 그는 흥하신다는 표시이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기대어 살며 늘 은사 이야기만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은사를 열망하지 말라거나 은사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균형을 잃고 은사를 은혜보다 앞세우는 태도이다. 성령의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은사를 드러내는 일보다 자기 속에서 은혜가 자라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자아가 쇠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 자아는 반드시 쇠하여야 한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 자아가 점점 작아지는가?
① 성경을 읽는 것이다. 무지는 늘 자만심과 자부심의 가장 큰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읽되 지속적으로 읽으라. 성경은 성령 안에서 읽어야 한다. 기도하고 읽어야 한다. 여러분은 왜 성경을 읽는가? 그저 날마다 읽을 분량을 채웠다고 말하기 위해, 단순히 성경 내용을 알기 위해 읽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글자만 읽는 것이다. 글자가 영보다 앞서면 성경 읽기의 가치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성경 읽기의 전적인 목표는 성경이 가르치는 영을 아는 데 있으며, 그 영에 붙잡히는 데 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그 성경이 나에게 무슨 일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 읽기의 가치를 검증하는 시금석이 이것이다. 시간을 내서 조용하고 차분하며 꾸준하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아야 하며, 말씀이 나를 점검하고 조사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자아를 없애는 방법이다.
이처럼 올바로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다. 그런 사람은 사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임한다. 성경을 통해 그의 영광을 알아 갈수록 자기 자신은 보지 않게 된다.
그 다음에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그렇게 쉽게 말하던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분임을 상기하게 된다. 모세가 들었던 떨기나무의 음성을 성경에서 듣게 된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성경에는 성급하게 달려들면 안 된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나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율법과 정의와 공의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피상적이고 번지르르한 지식이 아니라 중심이 진실함이다.(시51:6) 또한 다가올 심판에 대한 말씀을 읽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사실 앞에 겸손해진다. 이 또한 자아를 없애는 방법이다. 하나님을 얼핏이라도 본 자는 쇠하게 된다. 이사야처럼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사6:1-5) 사도 요한도 큰 환상을 보고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계1:17)
또한 성경을 읽으면서 성도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자손의 이야기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서 성도들의 긴 목록과 마주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경고와 본보기를 얻는다. 성도들의 높이와 깊이를 보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처럼 오직 성경을 읽은 결과, 자아가 급속히 쇠한다.
② 성경 읽기 다음으로 성도의 생애를 읽는 일이다. 성경 다음으로 성도의 전기만큼 제 작은 삶에 도움을 준 것은 없다. 설교자들이여, 자신이 굉장한 설교를 했다는 생각이 들 때 『조지 윗필드의 일기』를 읽어보라. 자신이 거의 ‘소리나는 구리와 괭과리’에 가까운 듯한 느낌이 즉시 들 것이다. 모든 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이 한 개인을 어떻게 다루시며 그를 통해 무슨 일을 하시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런 거인들을 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거인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황급히 그리스도께 달려가게 된다. 이 또한 자아를 없애는 방법이다.
③ 또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삶의 덧없음과 죽음과 영원한 세계를 묵상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한 가지가 바로 묵상이다. 세상은 우리를 바쁘게 만든다. 우리는 계속 바쁘게 만드는 세상에 휘둘려 결정적으로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잊고 지낸다. 가만히 멈추어 생각할 때가 없다. 성결키 위해 시간을 내어야 한다. 덧없는 삶의 본질과 특징을 상기해야 한다. 존 번연이 충고하듯 “잘 살고 싶다면 마지막 날을 끌어와 늘 자신을 지키는 동료로 삼아야 한다”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 사라질 존재임을 깨닫는 것보다 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영원한 세계를 묵상하고 세상의 덧없음을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그 자아를 없애는 해독제이다.
④ 자기 점검도 추가하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고후13:5) 자신이 한 일을 보지 말고 자신에게 은혜가 있는지,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고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롬6:6) 여러분이 책임져야 할 사람은 ‘옛사람’이다. 그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마지막으로 할 말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빌2:5) 그는 자기를 비우셨다. 우리와 우리 필요를 보셨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비우셨다.
-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라. 그러면 자아가 쇠할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긴요한 이 일들을 행할 능력과 지각을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길 바란다. 이 일들을 함으로 우리의 가련한 자아는 점점 작아지고 그는 흥하시게 하자. 그의 충만한 데서 받고 은혜 위에 은혜를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