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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木 | 火 | 土 | 金 | 水 |
계절 | 봄(春) | 여름(夏) | 환절기 | 가을(秋) | 겨울(冬) |
방위 | 東 | 南 | 中央 | 西 | 北 |
색깔 | 푸름(靑∙蒼) | 빨강(赤∙朱) | 노랑(黃) | 하양(白) | 검정(黑∙玄) |
(133)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 봄에 물은 못마다 가득하고
(134)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 여름 구름 기묘한 봉우리 많기도 해라.
(135) 秋月楊明輝 (추월양명휘) /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추고 (*輝: 빛날 휘)
(136)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 겨울 언덕 소나무의 외로움이 아름답구나.
(137) [涵仁亭 追記] 현판
*[涵仁亭追記] 내용
敬寧殿(肅宗의 繼妃 仁顯王后의 魂殿), 孝寧殿(肅宗의 魂殿), 敬昭殿(景宗의 魂殿)과 같은
昌慶宮 文政殿에 설치되었던 魂殿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 魂殿들의 이름은 仁元王后(肅宗의 제2繼妃)의 魂殿이었던 孝昭殿까지 표시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揭板은 英祖 때 만든 것으로 보이며, <宮闕志>에도 가을 제삿날 밤에 지은
英祖의 글이라고 敍述하고 있다.
내용은 ‘英祖 자신의 나이가 어느덧 60이 넘어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先大王을 볼 面目이
없다. 이는 첫째도 둘째도 자신의 不德이니, 불현듯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예전의 淸廟(魂殿)가 涵仁亭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제사를 지내기 전 두 時刻 전에 옷을
정돈하고 涵仁亭에 앉아서 承宣을 불러 陪席하게 하고 때를 기다리며 이 詩를 짓는다.
(*魂: 넋 혼 *揭: 걸 게 *廟: 사당 묘)
(138) ‘之字’로 꼬인 소나무 줄기
(139) 明政殿과 崇文堂 뒷모습
(140) 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호-
昌慶宮의 正殿으로 臣下들이 임금에게 新年賀禮를 드리거나 國家의 큰 행사를 치르며,
外國使臣을 맞이하던 장소로 조선시대 궁궐의 大殿은 南向으로 세웠으나, 明政殿은
예외적으로 東向이다.
明政殿은 成宗 15년(1484) 처음 건립하였으나 壬辰倭亂 때 불에 타 光海君 8년(1616)에
다시 지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單層 건물로, 景福宮의 勤政殿과 昌德宮의 仁政殿이
2층의 거대한 규모인데 비해 궁궐의 正殿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明政殿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기는 하나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殿閣 중에서 가장 오래된 木造建物이며 朝鮮 前期 建築樣式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41) [明政殿] 편액
(142) 明政殿 龍床과 日月五嶽圖(日月崑崙圖) 병풍
明政殿 내부 바닥에는 塼[벽돌]을 깔고 뒤쪽 가운데에 왕의 자리인 龍床과 그 뒤에
日月五嶽圖 병풍이 있고 용상 위에는 닫집으로 짠 寶蓋를 만들었다. (*塼: 벽돌 전)
*日月五嶽圖. 日月崑崙圖, 日月圖, 日月五峰山圖라고도 한다.
(*崑: 산 이름 곤 *崙: 산 이름 륜)
원래 日月崑崙圖는 해와 달, 그리고 중국의 五岳 중 하나인 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崑崙山을 主題로 그린 그림으로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독특하게 발달하여
精巧한 筆致와 화려한 채색을 사용, 莊重한 모습의 定型化된 그림으로 발전하였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昌德宮 仁政殿, 昌慶宮 明政殿, 景福宮 勤政殿, 德壽宮 中和殿의
그림들이 대표적이다. (*崑: 산 이름 곤 *崙: 산 이름 륜)
日月五嶽圖를 구성하는 素材들은 해와 달, 다섯 봉우리, 소나무와 波濤이다.
각 소재들은 해와 달은 임금을 상징하며, 다섯 봉우리는 산신에게 祭를 올리던
五嶽(金剛山, 白頭山, 智異山, 妙香山, 三角山)을 의미하며 동시에 임금의 長壽를
기원하는 것이며, 소나무는 소나무가 무성하듯 王孫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그려진 것이며 파도는 朝廷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日月五嶽圖는 왕의 절대적인 권위의 稱頌과 王族의 무궁한 번창을 기원하는 궁궐
吉祥裝飾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頌: 기릴 송 *祥: 상서)
(143) 明政殿 三分閤 꽃살문
(144) 明政殿 추녀
(145) 明政殿 추녀마루의 雜像
雜像은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줄지어 놓이는 瓦製 土偶이다. (*偶: 짝 우)
宮殿, 樓門, 神殿 등 전통적인 지붕에 장식하는 짐승모양의 기와로 맞배지붕은 내림마루
끝에, 우진각이나 팔작지붕에는 추녀마루 끝에 한 줄로 장식한다.
建物守護의 상징과 장식을 겸하고 있으며 法僧, 奇人, 怪獸 등의 像을 형상화하여 안쪽에
용머리를 두고 3, 5, 7 등의 홀수로 늘어놓는다.
(146) 明政殿 月臺의 드므
드므는 궁궐의 正殿과 같이 중요한 건물의 月臺 네 모서리에 防火水를 담아 놓는 그릇으로,
靑銅이나 돌로 만들며 모양은 圓形과 方形이 있고 솥 모양도 있다
木造建物은 불에 취약하기 때문에 火魔를 막기 위해 상징적으로 만든 것으로, 火魔는 너무
험상궂게 생겨 불 내러 왔다가 드므에 담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防火水의 容量이 작아 實用性보다 呪術的인 의미가 크다.
(147) 明政殿 月臺 계단과 소맷돌
月臺는 궁궐의 正殿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는 넓은 臺로 宮中의 賀禮∙嘉禮와 같은
큰 행사 때 사람들이 올라서서 행사에 참여하는 데 이용되며 祭禮 때에 사용하기도 하고,
건물의 品格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대개 方形의 넓은 壇으로 지붕이나 다른 시설을 하지 않으며, 月臺는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月見臺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月臺는 공통적으로 건물의 前面에 놓이며 長臺石을 가지런히 쌓아 올려 壁面을 구성하고
月臺 바닥은 벽돌[磚]이나 薄石을 깔며 모서리에 香爐∙드므를 올려놓기도 한다.
(148) 明政殿 月臺 계단의 踏道 (*踏: 밟을 답)
宮闕 正殿 階段의 임금이 사용하는 踏道(陛石이라고도 함)는 원래
'神靈 앞에서 존경심을 표시하는 뜻'으로 설치한 것으로, 궁궐의 답도는
王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뜻과 함께 왕이 다니는 통로를 祥瑞롭게
조성하는 의미를 지닌다. 보통 四分心葉形 윤곽에 鳳凰 또는 용을 새기는데,
昌慶宮 답도에는 鳳凰을 새겼다. (*陛: 대궐의 섬돌 폐)
*景福宮 ∙昌德宮 ∙慶熙宮 踏道에는 鳳凰을, 德壽宮 답도에는 龍을 새겼다.
(149) 昌慶宮 明政殿 앞 朝廷, 品階石
*朝廷: 임금이 나라의 政治를 議論, 執行하던 곳으로 王廷, 朝家, 朝堂이라고도 한다.
*品階石: 조선시대 文武百官의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正一品에서 從九品까지 18등급으로
품계를 나누었는데 그 品階에 따라 돌에 품계를 새겼으며 그것을 궁궐의 正殿 앞 마당
朝廷에 품계의 순서에 따라 羅列하였다.
나라의 朝會나 賀禮, 國王誕辰 등 중요한 행사 시에 文武百官이 정렬할 때 자신의 벼슬
품계석 앞에 정렬하였다.
궁궐의 正殿 앞에 세운 品階石은 좌우 12개씩 24개를 세웠는데 1품에서 3품까지는
正, 從으로 구분하여 6개를 세워 文∙武官 12개의 품계석을, 4품에서 9품까지는 正, 從을
구분하지 않고 6개씩 12개를 세웠다.
正殿을 바라보며 동쪽인 오른쪽에는 文官, 왼쪽인 서쪽에는 武官이 정렬했는데
東班은 文官, 西班은 武官의 별칭으로 東∙西班을 통틀어 ‘兩班’이라고 했다.
*御道와 臣道: 가운데 조금 높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御道이며, 양 옆 조금 낮은 길은
臣下들이 다니는 臣道이다.
(150) 昌慶宮 明政門 -보물 제385호-
明政門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多包式 건물로,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훤히
보이는 椽燈天障이나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의 짜임새가 착실하고 알차, 조선 中期의 문을 대표할 만하고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궁궐의 中門建築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椽: 서까래 연)
*椽燈天障: 별도로 천장을 만들지 않고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만든 천장.
(151) 明政門 內行閣
(152) 玉川과 昌慶宮 玉川橋 (보물 제386호)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고 玉川이라 했으며 明堂水가 昌德宮의 尊德亭을 지나
昌慶宮의 북쪽 春塘池를 거쳐 玉川橋를 지나 남쪽으로 흐른다. (*塘: 못 당)
궁궐 정문 안에 흐르는 明堂水를 일반적으로 禁川이라 하고, 그 위에 놓인 다리 禁川橋는
건너는 官人들이 淸廉한 마음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禁川 위에 놓인 다리를 일반적으로 禁川橋라고도 불렀으며, 창경궁은 玉川橋,
경복궁은 永濟橋, 창덕궁은 錦川橋라고 이름 붙였다.
(153) 昌慶宮 玉川橋 -보물 제386호-
玉川橋는 花崗石製 교량으로 成宗 15년(1484) 창경궁이 완공될 때 架設 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半圓아치형의 虹霓 2개를 이어 붙여 안정감이 느껴지고,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虹: 무지개 홍 *霓: 무지개 예)
궁궐 안의 교량으로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昌慶宮 玉川橋는 다른
궁궐의 玉川橋(禁川橋)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154) 昌慶宮 弘化門 -보물 제384호-
弘化門은 창경궁의 正門으로 成宗 15년(1484)에 建立하였으나 壬辰倭亂(1592) 때 불에 타,
光海君 8년(1616)에 再建하였으며 그 후로 여러 차례 補修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 건물로 東向이 특징이며, 栱包는 多包樣式으로 꾸몄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彫刻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彫刻像이 건물의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栱: 두공 공)
여러 차례의 수리와 丹靑으로 固有의 아름다움은 잃었으나, 昌慶宮과 昌德宮의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木造建築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55) 月覲門 (*覲: 뵐 근)
昌慶宮의 정문 弘化門 왼쪽(북쪽)에 있는 東門으로, 正祖 3년(1779)에 건립했다.
正祖는 父親 思悼世子(莊祖)의 位牌를 모신 祠堂을 ‘敬慕宮’으로 格上하고, 이 문을 통해
참배하러 다녔다고 한다.
<承政院日記>에 正祖가 ‘이 문을 거쳐 한 달 혹은 한 달 걸러 한 번씩 展拜하러 다니며,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풀 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매달 초하루 景慕宮에 거둥할 때 통과하는 문이라 하여 月覲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56) [月覲門] 편액
서울 景慕宮 址
景慕宮址는 지금의 서울大學校病院 부근 일대에 있던 含春苑의 옛터로 成宗 15년(1484)
昌慶宮을 건립하고, 風水地理說에 따라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출입을 통제했던 것이
始初였으며, 成宗 24년(1493) <含春苑>이라 命名하고 창경궁에 딸린 정원이 되었다.
壬辰倭亂 때 德嬪(明宗의 아들 順懷世子의 嬪)의 屍身을 임시로 묻는 등 점차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仁祖 때 含春苑의 半을 太僕司(임금의 車馬와 調馬 등을 관장하던 官署)에
나눠주어 이후 140여년간 말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僕: 종 복)
英祖 40년(1764) 思悼世子의 祠堂을 이곳으로 옮기고, 正祖가 즉위하자 이곳을
<景慕宮>으로 불렀으며, 正祖 9년(1785)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光武 3년(1899) 경모궁에 있던 莊祖(思悼世子)의 位牌를 宗廟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景慕宮도 景慕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光武 4년(1900) 景慕宮 터에 六聖祖 즉 太祖∙世祖∙成宗∙肅宗∙英祖∙純祖의 肖像을 모시던
永禧殿을 옮겨 세웠다. (*禧: 복 희)
日帝强占期에 경모궁 일대에 京城帝國大學을 세우면서 원래의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고,
6∙25전쟁으로 옛 건물이 불타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157) 서울 景慕宮 址 -사적 제237호-
含春苑은 조선 후기의 세련된 시설 중 하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石壇과 三門인
含春門뿐이며, 원래 명칭은 ‘含春苑址’였으나 2011년 文化財廳 告示로 ‘서울 景慕宮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58) 含春門
서울 景慕宮 터에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 맞배지붕 건물이며
섬세하게 彫刻된 翼工과 보아지(甫兒只)로 구성된 지붕이 아름답다. (*只: 다만 지)
*甫兒只: 기둥과 보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을 보강해 주는 建築部材.
(159) 서울 景慕宮 址 基壇, 階段과 소맷돌
(160) 서울 景慕宮 址 건물터
(161) 서울 景慕宮 址, 뒤에서 본 모습
(162) 현충탑. 이름 모를 自由戰士의 碑.
鍾路區 蓮建洞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언덕 昌慶宮路 쪽에 있다.
6∙25전쟁 발발 3일째 서울이 점령된 날인 1950.06.28,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있던 國軍 負傷兵과 일반환자 및 가족 등, 北韓共産軍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된 900여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顯忠塔이다.
1963년 韓國日報社가 희생자들이 묻힌 장소 위에 탑을 세우고, 1999년
서울대학교병원이 ‘이름 모를 자유전사비’ 유래 안내판을 세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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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산의 자세한설명을 읽자니 어렴풋이 지난 번 답사시 생각이 나는 데 하여튼 고산의 수고 덕분에 역사공부 잘 허고 갑니다그런데 모든 궁의건물이나 절에 가보면 거의가 임진왜란 병자호란등 대 불탔음에 울분을 참지 못하곤 하는 데 요새는 나라를 깡그리 김정은에게 바치려는 문재인의 음모를 때문에 더 걱정입니다
설명중 오층석탑과 함인전인가 사이에 빈터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있던 곳이라고 백구의해설을 들은 기억이나는데 어디인지?
나는 어디인지 모르겠고, 자료도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