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 안희제는 기업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국외에서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한 민족기업인의 전형이었다. 특히 그가 꾸린 발해농장은 민족종교인 대종교인들이 해외에 건설한 독립운동 기지이며 동시에 대종교적 이상향을 시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희제는 1885년 8월 5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안발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백산(白山)이고 본관은 순흥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해 한학에 재질을 나타냈다. 그는 지리산, 하동 쌍계사, 악양 고소성, 섬진강 등지를 유람하며 32수의 한시를 지어 <남유일록>에 적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책만 읽고 지내지 않았다.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허울만 남게 되자 상경해 보성학교, 양정의숙을 다니며 구국비밀결사에 정력을 쏟았다.
나라 망하자 연해주로
1907년에 교남학우회를 조직했고 1908년에 동지들과 손을 잡고 구포에 구명학교, 의령면 중동에 의신학교, 고향인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세웠다. 1909년에는 이원식, 남형우, 김은용, 윤병호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다.
1910년에 나라가 완전히 망하자 그는 활동무대를 해외로 넓혔다. 1911년에 연해주로 넘어가 망명 지사들과 대의를 도모했고, 191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안희제는 국내외를 돌며 많은 동지들을 접촉하는 과정에서 자금문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1914년에 귀국해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만들었다. 백산상회는 동지들과 양심적인 부호들의 지지에 힘입어 곧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됐다. 사실상 독립운동자금의 공급원이요, 해외와 국내의 비밀연락 거점이었다.
그는 1925년에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 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안희제는 만주로 몸을 피했고, 1931년 10월 3일에는 대종교에 가입했다.
안희제는 1933년에 동경성에 정착해 발해농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대종교 총본사가 동경성에 자리를 잡자 그는 발해농장 일과 함께 대종교의 요인으로 활약했다.
1942년 대종교 총본사는 천진전(天眞殿)과 대종학원을 건축할 계획서를 목당강성공서(牡丹江省公署)에 제출했다. 목당강성공서에서 지지의사를 밝히면서 전문 인원을 파견해 회의에도 참가시키고 격려의 연설도 하자 대종교 쪽은 힘을 얻어 건축공사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간계를 미처 몰랐다. 일제 경찰은 이를 계기로 대종교의 요인들을 낱낱이 파악한 뒤 같은 해 10월 19일 하루에 만주의 10여개 시와 현, 조선의 여러 도에서 21명의 대종교 요인들을 몽땅 체포했다.
천진전 건축준비위원회 총무부장인 안희제 역시 체포되어 여러 경찰국을 거쳐 목단강 액하 감옥에 갇혔다. 안희제는 감옥에서 갖은 악형으로 사경에 이르게 됐다. 그러자 당국은 옥사에 따른 비난 여론을 피하기 위해 1943년 8월 3일 살 가망이 없는 안희제를 병보석으로 내보냈다.
발해국으로부터 비롯
안희제는 감옥문을 나선 지 세 시간 반 만에 족제(族弟)가 경영하는 동경성 영제병원에서 광복을 2년 앞두고 운명했다.
영제병원은 현재의 동경성역에서 서쪽으로 약 5백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안현 동향성 동신촌에 계시는 이병조 노인은 영제병원을 이렇게 소개했다.
“영제병원은 동향집인데 남북길이가 40m쯤으로, 당시로선 큰 건물이었다. 함석지붕에 시멘트로 앞면을 바른 단층집이다. 정문 옆에 영제병원이란 간판을 걸었다.
이만동, 방광희 노인 부부가 병원 안에서 살며 할머니는 빨래와 청소를, 영감은 약품을 날라 오거나 숙직을 서는 일을 했다. 광복 뒤 두 노인이 사망하자 노인의 자제가 우리 마을에 이사 와서 살았다.
나도 25살 때 영제병원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다. 안희제는 우리 집에 여러 번 왔다. 영제병원에도 자주 다녔다.”
영제병원 건물을 이젠 없어지고 지금은 벽돌 단층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주소를 보니 영안현 동경성 2무 1골목 2-3호였다.
안희제가 꾸린 발해농장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곳 발해진의 내력을 간략히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봇둑물로 8개마을 이용
발해진은 목도선의 동경성진으로부터 철도 서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장백산맥 자락의 동경성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서북쪽으로는 목단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마련하가 흘러 4면이 산이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임산배수의 명승이다. 벌이 넓고 토지가 비옥해 물산이 풍부하고 수륙교통 또한 편리하다.
발해진이란 지명은 발해국으로부터 비롯된다. 발해국은 기원 698년부터 926년까지 292년간 존재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서 5경, 15주, 130여현을 설치했었다.
발해진에 자리 잡은 상경용천부는 발해국 5경 중의 으뜸으로 두 번이나 발해국의 도읍이 된 바 있다. 160년간 도읍일 때의 궁성 유적과 풍부한 유물들이 있어 국내의 학자와 유람객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발해진은 이와 함께 근·현대에도 왜 적과 싸우는 근거지로서 비장하고 눈물겨운 투쟁사적을 남겼다.
발해진에서의 조사과제는 안희제 선생이 꾸린 발해농장이었다. 이를 위해 성동향 동신촌에 사는 이병조 노인의 도움을 받아 안희제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노인 두 사람을 찾아냈다.
조상호 노인은 1920년생으로서 80살, 1927년에 발해진에 와서 지금까지 60여년 살았으니 안희제보다 먼저 발해진에 온 셈이다. 조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안희제가 오기 전에 먼저 이곳에서 수로를 내고 논을 푼 사람은 용정에서 순사노릇을 한 적이 있는 조두원이다. 1931년부터 동만농장을 건설하기 시작해 봇둑을 막아 물을 끌어들였다. 이듬해 사무실을 세우고 ‘동만농장’이란 간판을 걸었다.
안희제가 1933년에 발해에 와서 조두원의 동만농장을 몽땅 사고 그밖에 수 백 쌍을 더 매입해 규모를 훨씬 늘렸다.
안희제가 쌓은 봇둑은 조두원이 쌓은 것 보다 더 높고 길이도 갑절은 됐는데 지금의 아보수력발전소(阿堡水電所) 자리이다. 나의 형이 대장장이였는데 봇둑공사에 참가했다.
안희제의 ‘발해농장’ 간판을 걸었던 사무실이 지금도 절반쯤 남아있다. 우리무식한 농사꾼이야 농장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몇 개 마을이 이 물을 끌어들여 논을 풀었으니 아마 몇 백 쌍(1쌍은 줄잡아 2,000평)은 될 것이다.”
발해농장 사무실1933년에 안희제가 꾸리던 발해농장의 사무실
“안희제는 대종교에 경제적 지원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대종교 3대종사인 윤세복과 함께 일본 헌병대에 잡혀가 목단강 액하 감옥에서 맞아죽었다.
대종교 요인 21명 체포
서울에서 김씨라는 큰 자본가가 안희제의 발해농장 자금을 대줬다고 들었다. 김씨는 안희제가 잡혀가자 후임으로 문세경이란 사람은 파견했다. 문세경은 김씨의 처조카이다.”
대화를 마친 뒤 조상호 노인과 함께 발해농장 사무실에 가봤다. 사무실은 지금도 남아 있었다. 8칸짜리 보통 조선족 농가에서 동쪽 절반만 남은 모습이었다.
구조는 앞면만 붉은 벽돌로 쌓고 동쪽과 북쪽 두 면은 흙벽이다. 원래의 집이 너무 퇴락해 서쪽에는 함석지붕의 새집을 붙여지었는데, 결과적으로 옛집과 새집이 결합한 예술품이 됐다.
1985년에 출간된 영안현 민족지 <영고탑 조선족>에서는 발해농장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안희제가 동경성에 온 뒤 정밀하게 측량한 다음 시공대를 조직해 봇둑을 만들도록 했다. 공사 책임자는 박주호이고 측량은 유도혁, 회계는 박찬희, 출납은 최관의였다.”
이 사무소 주위로 길이가 약 100m, 너비가 약 40m 되는 큰 마당이 있었는데 탈곡장, 뒤주, 겨와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발해봇둑 발해농장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쌓은 발해봇둑이 오늘날 아보저수지의 콘크리트 둑으로 바뀌었다.
양재욱 노인은 85살(1992년)인데 자신이 발해농장에 온 경위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강원도 화천군 화천면에 살았는데 27살 때 발해에서 조선농민들을 많이 받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발해학교 교장인 박권의 처가 우리 마을의 친정에 다니러온 김에 발해에서 큰 농장을 꾸리고 농군을 수백 호 받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우리 집이 이사 왔을 때는 벌써 발해 봇둑을 다 쌓았고 신답을 풀어 몇 개 마을이 자리 잡은 뒤였다. 그때 봇둑물로 논을 푼 마을들은 동경성, 강서, 향수, 상관, 하대원, 유창, 하관지, 봉화 등 8군데였다. 논 면적을 합치면 1,500쌍은 됐다.”
발해봇둑이 이곳에서 얼마나 먼가를 물으니 10리쯤 된다고 했다. 꼭 가봐야 했다. 그런데 여든 노인이 함께 갈 수 있을지 걱정됐다.
“봇둑이 큰길에서 멉니까?”
“둑까지 자동차가 들어가오.”
옳지, 잘됐다. 걱정을 덜고 양 노인에게 함께 가보자고 부탁했다. 즉시 택시를 타고 둑으로 갔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당시의 봇둑자리에 지금은 아보수력발전소가 들어섰다.
“발해봇둑 자리는 이곳이 옳지만 그때 모습은 하나도 없다. 안희제는 순전히 물보를 만들었으므로 지금의 언제보다 작고 저수지의 물도 지금 것의 절반 밖에 안 된다.”
해방 2년 앞두고 운명
“안희제는 자리를 잘 선택했다. 이곳은 땅이 좋고 벌이 넓어 힘 있는 대로 농사지을 수 있었다. 몇 천 쌍이라도 문제없다. 그러기에 서울의 부자가 안희제에게 돈을 대 농장을 꾸리게 했다.”
안희제는 일생을 독립투쟁에 꼭 필요한 재정 조달에 기여를 했다. 발해진과 동경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니 이곳을 찾을 때마다 고인의 사적을 더욱 널리 알려야겠다는 충동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