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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암 장지연 (1864~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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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규탄한 신문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한 구한말의 언론인 장지연이 일제 강점 이듬해에 일왕을 찬양한 한시를 작성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경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1911년 11월 2일 <경남일보>에 게재한 천장절(메이지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시를 4일 공개했다. 이 신문에 게재된 한시는 메이지 일왕의 '성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일왕을 태양으로, 일제를 동양의 중심으로 각각 묘사했다.
김 연구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신문들이 기명기사를 내지 않는 관례 때문에 장지연이 한시를 직접 지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경남일보는 그가 주필로 있던 언론사이며 문장의 수려함을 고려해 보면 장지연이 기재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김 연구원은 "경남일보는 일왕 찬양시를 게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천장절 당일 휴간까지 하면서 경남 진주 수정봉 정상에서 1000개의 등화를 봉장한 가운데 축제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영남대가 경남일보 영인판을 분석한 결과, 장지연은 1909년 10월 창간된 경남일보 초대 주필이 된 뒤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1913년 3월까지 4년 가까이 이 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장지연의 친일행각이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3월 <경남도민일보>는 1915∼1916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 기사를 인용해 "위암이 일제 식민지 아래 동양평화를 외쳤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보도한 바 있다.
이번에 발굴된 1911년 경남일보 한시는 장지연의 '변절'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음을 보여주는데, 김 연구원은 "경남일보가 1910년 10월 11일자에 일제 강압에 의해 국권이 찬탈당한 것이 억울해 음독자살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했다가 정간된 뒤 10일 만에 복간되면서 신문 논조가 친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장지연의 일제시절 행각이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1962년 추서된 국가유공자 서훈이 박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시일양방성대곡 발표 100돌을 맞아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비' 건립을 추진해온 독립기념관도 위암의 친일 행적이 새롭게 드러남에 따라 '건립'에서 '신중 검토'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김삼웅 관장은 "기념비 건립 예산 등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현재로서 건립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