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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겸비함과 그 영광
-그의 낮아지심에 대한 첫 번째 묵상
이 세상에서의 믿음의 행사는 가장 먼저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8-10).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사도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께 배교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생겼으며, 그런 상태에서 의로운 화평을 도모할 수 있거나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하늘에나 땅에나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께 배교하는 자체가 모든 인류의 완전한 파멸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둘 사이의 의로운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보자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토록 그 화평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10:5).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10:9).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격을 그대로 지니신 채로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이 직무를 감당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처를 강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이 이 직무를 감당하셨다.
먼저 우리는 이 직무를 담당하기로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보되, 겸비함과 사랑 가운데 나타나는 영광을 주목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성을 입고 중보자의 직무를 담당하신 것은 그가 무한히 겸비해진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거기서 그 영광을 주목한다. 중보의 직무는 그리스도에게 우연히, 또는 제비 뽑아 주어진 것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의 의지에 거슬러 부과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분의 자원에 의한 것이며, 은혜롭게 이 직무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여기서 사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 즉 친히 자원하는 심령으로 그리하신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다. 그리고 스스로 낮추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신 것은 참으로 자신을 무한히 낮추신 것이다. 신자들은 바로 그 일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지극히 영광스러우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위대함
하나님의 신성이 지니는 말할 수 없이 우월한 탁월성에 대해 시편 기자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113:5-6)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 탁월하심으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시기 위해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셔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1) 하나님과 피조물 간에는 본질과 존재와 본체와 관련된 무한한 차이가 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본질에 비해서 무한하게 탁월하신 하나님은 본질의 무한한 위대하심 때문에 그 피조물에 대해 관계하실 때에 자신을 낮추고 낮아지셔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너무 높고 고상하시기에 그분이 땅 아래 있는 존재들을 내려다보시기만 해도 그것은 은혜의 행동이 된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서 행동하고 목적하는 바를 이루시는데 스스로 무한히 충분하신 분이기에, 그분이 자신을 낮추신 것은 위대한 일이다
어떤 피조물도 자기 스스로 복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을 만족시키거나 복되게 하기 위한 일에 조금도 공헌할 수 없다.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자신을 낮추시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35:6-7).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의 직무를 감당하신 것은 얼마나 자신을 낮추시는 일이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어느 누가 우리를 위해 중보의 직무를 감당하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인성을 취하시는 그 낮아지심의 영광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어느 누가 이것을 말로 미리 표현했겠는가? 그처럼 스스로 영원히 복될 만큼 충분하신 그리스도가 어떤 피조물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면, 그것은 마땅히 자신을 낮추시는 행동이요, 자신의 존재와 그 보좌의 특권에서 내려오시는 행동이다.
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특별한 본질
1)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지셨다는 것은 그가 가진 신성을 벗어 버렸거나 신성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지셨다는 것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으로 존재하시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권위와 존엄과 능력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요5:17-18 참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신적 행상의 모든 능력이 아버지와 동등하게 자기에게도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런 신성을 지니신 채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한다(빌2:7 참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다.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인자로서 이 땅에 계셨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 되심을 멈추신 것은 아니며, 인자로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여전히 하늘에서는 신성을 취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분이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듯이, 하나님이신 분은 결코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
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옛 아리우스파가 상상했던 것처럼 신성이 인성으로 바뀐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 같이 그 ‘말씀’의 본질이 그렇게 변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성이 인성으로 바뀌는 본체론적인 변화를 상상하였다. 이것은 마치 교황주의자들이 화체설(化體設)을 주장하면서 상상하는 바와 같다. 그런 상상대로라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로서 가지고 계신 신성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실 때 신성은 조금도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게 되었지만 그분의 신성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분의 신성에는 ‘어둠이나 회전하는 그림자’(약1:17 참고)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 안에 여전히 동일하게 존재하였다. 그 신성의 본질적 속성들과 작용들과 복됨이 영원 전과 똑같았다.
4)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실 때 그 인성으로 신성의 영광을 가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성의 영광을 인성으로 가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신성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나타나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세상은 그분을 참 하나님으로 보기는커녕 선한 사람으로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격분하여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요8:59 참고)하였다. 한 인격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논리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연 속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어떤 예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시니안들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
5) 그리스도께서 환영(幻影)이나 허깨비의 방식으로 낮아지신 것이 아니다
이단들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곧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가 행하고 당한 모든 일들은 정말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고 당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적 낮아지심의 참된 본질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격위, 또는 아들의 격위 안에 있는 신성이 형언할 수 없는 그분의 신적 능력과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인성을 자신의 개인적인 실체로 취하셨다. 다시 말하면, 신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의 요소이듯이, 인성을 인격의 요소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틀림없이 믿음의 기초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시사 행하고 당하신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발견되셨으며, 그분의 신적 격위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이 또한 그분의 낮아지심에 속한 것이다. 그것이 낮아지심의 가장 보편적인 효과요 열매였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실 때 그 인성을 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으로 바꾸지 않으셨다는 점을 관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 인성의 본질적 속성과 활동을 그대로 보존하셨다. 그래서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이 고통을 당하였으며, 시련과 시험을 받았고, 버림당했다.
3.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관점
우리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이 낮아지심의 영광을 합당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신적 지혜의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이며, 성자의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견줄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와 같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광이요, 모든 복음 진리의 살아 있는 혼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과 천사들의 이해나 추론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지혜의 신비를 믿음과 감탄의 유일한 대상이 되게 한다. 바로 이 신비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되, 모든 피조물보다 무한히 더 위대하심이 드러난다. 바로 이 신비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방식과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로 계신 그분,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분,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신성을 가지신 ‘영원토록 찬미를 받으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분께서 친히 자신을 낮추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인성을 취하사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영원 전부터 계신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와 같이 참사람이 되신 것이다.
계획하신 바를 이루기 위하여 이 신비의 기이함을 높이시고자 그분은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자신을 낮추셨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서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하실 정도까지 되셨다. 존귀함을 얻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그런 지경에까지 들어가신 것이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 힘을 얻고 소생될 것이다. 그리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에게로 피하려 할 때, 자신을 비워 낮아지신 분,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충족하시는 자신의 영광의 특권을 사양하시고는 우리를 위한 중보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그분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곤고함 속에서 우리를 구출해 내시지 않겠는가?
그분의 능력을 의심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무한히 낮아져 고난받는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능력을 조금이라도 상실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없이 낮아지셨음에도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곤고한 죄인들을 위한 성소가 되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우리가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믿음의 빛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낮아지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곤고한 자에게 안식을 준다. 이것이야말로 새 힘을 북돋아 주는 요소이다.
믿음의 행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적 격위에 관해 아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것에 관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속에 나타난 영광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신적 격위에 관한 진리를 바르게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지런히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그 영광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면서 가장 중요한 복음적인 동기를 제공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자기 부인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마땅한 방식으로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자기 부인의 강력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부인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포기해야 할 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재산과 자유, 우리의 여러 관계들 속에 존재하는 문제이다. 곧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스스로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결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죄악된 혼돈을 효과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나는 말하는 바이다. 물론 나중에는 우리가 직접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떤 영광도 볼 수 없으며, 영원히 찬탄할 요소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분명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고 영원히 찬탄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의 가장 효력 있는 열매이다. 믿음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영혼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