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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부 약속의 완성
13장 하나님 나라의 완성
본서의 논지는 예수깨서 보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 시대에서 메시야 시대의 축복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 자신과 그 사역 안에서 역사를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의 역동적 다스림이었고, 또한 그 다스림은 이 시대의 종말에 다시 드러나서 메시야의 구원을 완성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 종말론적 완성의 본질을 검토하고자 한다.
감람산 강화(講話)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미래관에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인이 있다. 역사적 안목과 묵시론적 완성과 종말의 임박성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감람산 강화에서 가장 생생하게 드러난다.
세 복음서는 모두 인자가 영광 중에 임하여 그의 택한 자들을 모으실 묵시론적 완성의 때에 대하여 말씀한다. 이러한 인자의 강림은 자연 질서를 흔들며(막13:24-27) 사람들을 심판하며(마11:22=눅10:14; 마24:37-39=눅17:26-27; 막8:38,마25:31)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구약적인 신현(神現)의 언어로 그려지고 있다.
감람산 강화에서는 두 가지 요소들이 서로 역동적인 긴장 관계 속에 있다. 곧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예상과 종말론적 완성이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긴장은 역사적 안목과 임박성에 대한 언급 사이에서 볼 수 있다. 감람산 강화는 예루살렘의 역사적 패망을 바라보며 또한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주는 것이다(막13:10,마24:14). 이 두 가지 사건들은 확정되지 않은 어느 기간 동안 역사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 강화에는 종말의 임박성과 그에 대한 대망에 대한 강한 언급이 나타난다. 제자들은 거듭해서 경계하라고 주의를 받는다. 종말이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막13:33-37;마24:37-25:13). 그리고 거기에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라는 진술이 덧붙여져 있다(막13:30).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의 형식: 선지자적인가 묵시론적인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의 형식을 보면, 예수는 묵시론자들보다는 선지자들에게 훨씬 더 가깝다. 감람산 강화는 형식상 묵시론에 속하지 않는다. 상징적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예수는 묵시론자들보다는 선지자들에게 더 가깝다. 예수께서는 종말 때의 조건들에 대해서는 별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가르는 일상적인 경험에서 이끌어내서 한 가지 극적인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마지막 심판의 원리를 가르치셨을 뿐이다.
의인의 최종 운명을 메시야의 연회나 혼인 잔치 등의 재래적인 표현으로 묘사하며, 악인의 운명을 불이나 어두움 등의 표현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 최종적 형벌의 사실을 불이나 어두움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형벌의 상태가 실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실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완성의 상태를 시에 가까운 언어와 비유적인 표현들로 묘사하셨으며 그 표현들은 문자적으로 취할 것이 아니요 종말론적 사건들과 현재의 역사적 경험을 초월하는 그런 존재 질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의 내용: 이원론
예수의 종말론적 사상의 내용도 묵시론자들보다는 선지자들에 더 가깝다. 선지자적 종말론은 지상적인 나라와 다윗 가문의 인간 왕을 상정하는 역사적인 종말론이며, 묵시론적 종말론은 초월적인 나라와 천상의 인자를 상정하는 초역사적인 종말론이다. 전자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심으로 생겨나는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인 성격을 띤다.
예수께서 묵시론자들과 두 시대라는 이원론적 용어를 함께 공유하셨지만, 그는 또한 마지막 최후의 상태를 지상적인 표현으로 묘사할 수 있으셨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세상을 부인하는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 세계를 보존하시는 창조주로 남아 계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관심사들을 아예 무시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들을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종속시키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일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마6:33=눅12:31).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선지자들과 함께 구속 받을 땅에 대한 기대를 공유하셨다고 결론을 내릴 이유가 충분하다 하겠다.
역사와 종말론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예수께서는 묵시론자들과 대항하여 선지자들의 편에 서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긴장인데, 이는 묵시론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선지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바로 앞의 역사적 미래를 최종적 종말론적 완성을 배경으로 하여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최종적으로 세우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로 활동을 시작하실 단계였으므로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 그 역사적 사건은 진정한 의미에서 마지막 종말의 사건을 예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도 동일한 구속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일하신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종말론은 역동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둘 모두가 여호와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묵시론에서는 이러한 긴장 관계가 깨어진다. 종말론은 미래에 속하여 있어서 현재의 역사적 사건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선지자적 긴장이 새롭고 더 역동적인 형태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가까이 임하여 선지자들의 소망을 성취시켰다. 그러나 아직 종말론적 완성은 미래에 속하여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시기를 아신다(막13:32).
우리는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활동이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구원을 의미하며 그 메시지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 이 구원과 심판은 주로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선지자들까지도 초월하셨다.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일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또한 그 일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완성을 이루실 그분이 바로 역사 속의 그의 나라 속에서 활동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역사와 종말론이 서로 역동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을 가르치신 것은 아니다. 그는 묵시론적 하나님 나라의 강림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예수의 사역과 죽음을 통하여 행하시는 일에 의존한다는 것을 또한 가르치셨다.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역사 속에서 구속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하나님의 활동에는 선지자들의 견해와 비교할 때에 새로운 한 가지 차원이 더 첨가되었다.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미리 역사 속으로 침입하여 죄와 사망의 옛 시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의 축복들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악에게 내어버림을 당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악의 권세들 사이의 우주적인 싸움의 현장이 된 것이다. 사실상, 묵시론자들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한 악의 권세들은 패배를 당했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역사 속에서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축복들을 경험함으로써 그런 악의 권세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종말의 표적들
감람산 강화는 종말을 계산할 수 있는 어떤 표적들을 명확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사실상 거기에 나타나는 표적들은 종말론적인 표적들이 절대로 아니다. 거짓 메시야가 일어날 것이며,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막13:7). 그런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종말은 연기되고 있다. 그것들은 종말의 표적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온 시대에 걸쳐서 나타날 “재난의 시작”(막13:8)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감람산 강화와 또한 종말을 계산할 수 있는 그런 표적들이 전혀 없이 종말이 임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게 되는 것이다.
종말론의 윤리적 목적
마지막으로,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그 성격과 목적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그는 미래 그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일이 없다. 다만 미래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의 말씀들을 토대로 산뜻한 종말의 과정을 그릴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감람산 강화의 주 목적은 윤리적인 목표에 있다. 곧 깨어서 경계하여 종말에 대비하라고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심판 날에 대비케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윤리적 관심으로 예수께서는 종말론적 사건의 때에 대해서 선포하신 것이다. 임박한 사건을 예견하면서도 그 실현의 날짜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바로 이 지점에 우리를 남겨 둔다. 이것은 윤리적인 목적을 위한 긴장인 것이다.
제 5 부 결론
14장 신학을 위한 영속적인 가치
결론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성경적인 교의가 현대 신학에 대하여 지니는 영구적인 가치를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연구는 주로 역사적인 것으로서 예수의 메시지를 그 자체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우리는 현대 신학이 복음서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우리 세대에 해석하려 할 때에 반드시 보존해야 할 특정한 항구적인 가치들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이 왕으로서 역사를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목표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창조주요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비신화화하는 일은 성경적 계시와는 다른 철학적인 하나님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서 복음의 본질적 요소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은 인간사를 그저 아무 상관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그저 개인의 “순전한 실존”에 이끌려 들어가는데 관심을 가시질 뿐 아니라, 역사를 통제하시는 분이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 속에서 몸소 활동하신 분이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이 하나님 나라 속에서 활동하셨다면, 그는 역사를 그의 나라로 이끄실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의 목표로 또한 인간의 구속에 대한 유일한 소망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심판 이후의 사물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멸절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선이 악에 대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헛된 꿈이 되고 말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개개인은 물론 인류 전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기독교 복음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며 역사의 종말에 그의 나라를 반드시 세우실 역사의 주이신 것이다.
악의 본질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신학에 담겨 있는 두 번째의 기본 요소는 악의 급진적인 본질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시다. 그러나 그를 대적하는 요소들,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무력화시려고 노력하는 반대의 세력이 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성경적 견해가 아니다. 역사와 인간의 경험 속에는 마귀적인 세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여 움직인다. 악은 단순히 선이 결핍된 상태가 아니며 그것은 인간의 참된 복지를 막는 무서운 원수로서 하나님이 권능으로 개입하셔서 악을 이 땅에서 도말하시기 전에는 절대로 없어지거나 제거되지 않는다.
악은 급진적인 것이어서 오직 하나님의 권능의 개입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악은 사람보다도 더 강하다. 악은 사회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악의 영역 사이의 계속되는 갈등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전체의 사람들과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제자들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상, 반대와 고난을 당하는 일이 그들의 정상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이것이 악의 마귀적인 본질의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지배한 여러 가지 악들의 근원이 사탄, 마귀, 바알세불이라 불리는 초자연적인 인격체에 있는 것으로 보셨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최종적인 완전한 실현은 오직 초자연적이며 세계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논한다. 예수께서 보신 완성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심지어 그 비밀한 임재에 있어서조차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활동이며 또한 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 자신의 인격에 내재하고 있다고 가르치셨다. 복음서의 예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그 속에 임재하고 활동하는 하나의 신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의식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역사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가 스스로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자신 속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역사를 구속하신 것이다. 종말론적 구속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가리워진 형태로 행해 놓으신 것이 영광스럽고도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의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씨처럼, 한 숟갈의 누룩처럼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역사한 하나님의 구속적인 활동은 아직 그 참 모습이, 곧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가 다 드러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이다.
현재의 상황
마지막 남은 문제는 교회의 역할과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갖는 현재의 관계이다. 교회는 스스로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것과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승리를 증거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교회의 증거는 역사 속에서 이미 성취된 승리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단순히 소망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교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는 바로 예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세상에 증거하기 위하여 생겨난 것이다.
교회는 “두 시대 사이”를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죄악된 세상 사이의, 다가올 시대와 현재의 악한 시대 사이의, 긴장 속에 갇혀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이미 경험했다. 그러나 교회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권세에 영향을 받고 있다. 교회는 소망의 상징이다. 곧 하나님이 이 시대도 인간 역사도 악의 세력에게 내어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창조했으며 또한 세상 속에서 교회를 통하여 계속 역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극심한 긴장을, 아니 처절한 싸움을 조성한다. 교회는 이 시대의 종말이 오기까지 계속되는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갈등이 벌어지는 중심점이다. 교회는 절대로 쉬거나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없으며 언제나 투쟁과 싸움 중에 있는 교회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심판 아래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13:35-36). 이는 교회가 처해 있는 마지막 긴장으로 이어진다. 곧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긴장이 그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임박성에 대한 인식과 역사에 대한 인식 사이의 긴장은, 하나님이 교회를 위하여 두시는 그런 긴장이다. 선지자들이 임박성을 강조한 데에는 윤리적인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 임박성은 항구적인 의의를 지닌다. 교회는 언제나 긴박감을 지니고 살아야 하며, 항상 종말의 압박을 느껴야 한다.
임박성에 대한 역동적인 인식은 교회가 그 종말론적인 성격을 보존하며 세상에 휩쓸리지 않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며 세상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교회는 정교한 조직과 기득권을 지닌 하나의 기구다. 그리고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임박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성격을 보존시켜주며, 또한 교회가 그저 하나의 세상적인 현상으로 그쳐버리지 않도록 막는 구실을 해줄 것이다. 교회가 종말론적 성격과 운명을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사는 한,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교회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지니고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광신주의나 날짜를 계산하는 행태나 근시안적인 태도를 경계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 역사와 종말론 사이의 이런 긴장을 의식하게 되면 각 세대마다 신자들에게 강력한 동기와 힘을 줄 것이다.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 승리를 거두기 전에 있을 마지막 세대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또한 미래에 대한 먼 안목으로 차분하게 계획하고 일해 나가야 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긴장이다. 진정으로 성경적인 교회는 미래의 세대들을 위하여 스스로를 세워나간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다음과 같이 열심히 기도할 것이다: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 p 409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