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실록① 선덕여왕은 '실패한 지도자'였다!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幸也.
(신라부기여자, 처지왕위, 성난세지사, 국지불망행야)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대구 부인사의 선덕여왕 초상화/경북대학교 유황 화백 1990년작
삼국통일의 기틀’을 세웠다고?
한국사의 기본 상식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여왕은 단 세 명, 신라에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여왕은 최초의 여왕이었던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입니다.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덕여왕은 대중의 인식 속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지혜로운 군주’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이라는 업적을 남긴 임금’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탤런트 이요원이 주연한 TV 드라마 ‘선덕여왕’(2009)에서는 ‘정적(政敵)과 싸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인물”로서 형상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을 ‘한국 여성 지도자의 바람직한 롤모델’로 삼아도 될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정말 큰일날 소리다.”
왜냐하면 여왕의 재위 기간인 15년은 정치·외교·경제·사회적으로 신라가 커다란 위기에 몰린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 때 이룩했던 신라의 중흥이 이 때에 이르러 빛을 잃었고, 신라는 바야흐로 망국(亡國)을 코앞에 둔 누란(累卵)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몇몇 기록대로 개인적인 현명함이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이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가적인 곤경을 뒤집을 능력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경주 낭산의 선덕여왕릉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즉위하다
그러면 어떻게 선덕여왕, 본명 덕만(德曼)이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보다도 반 세기 전에 여성 군주로 즉위할 수 있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진흥왕의 차남인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은 서기 576년에 즉위해 579년까지 왕위에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분명 “가을 7월 17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지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이와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러워졌고 음란함에 빠져(정란황음·政亂荒淫)” 신하들에게 폐위당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선 이 ‘진지왕 폐위 사건’이 한 인물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진흥·진지·진평왕 등 신라 왕 3대(代)와 잇따라 육체적 관계를 맺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인물. 심지어 나중엔 왕위에 오르기 전의 선덕여왕인 덕만 공주의 정적으로까지 묘사된 인물. 바로 미실(美室)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미실/학계에서는 미실이 실존인물이 아닌 것으로 본다
‘미실’은 학계에서 공인받은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후대에 창작된 가공 인물이라는 것이 정설(定說)입니다. 진지왕 폐위 사건은 신라의 왕계(王系)에 핵폭풍과도 같은 여파를 몰고 옵니다. 신라 귀족 중에서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최고 클라스는 성골(聖骨)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지왕이 쫓겨나게 되자 그의 후손들은 한 단계 아래 계급인 진골(眞骨)로 강등됩니다. 왕이 될 자격을 상실해버린 것이죠.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의 아들이 26대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으로 즉위합니다. 진평왕의 재위 기간은 무려 53년이나 됐습니다. 문제는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왕위 계승자의 ‘인력풀’이 사라진 것입니다.
서기 632년에 진평왕이 죽자 신라의 화백회의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습니다. 성골 왕계를 그만 여기서 끝내고 다른 계급에서 새 왕을 선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성골 등극의 원칙’을 고수해 진평왕의 장녀 덕만을 추대해야 할 것인가?(드라마에선 덕만이 차녀로 나옵니다만, 이것도 박창화 ‘화랑세기’에서만 나오는 얘깁니다. 덕만은 진평왕의 ‘장녀’라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이들이 후자를 택함으로써 ‘첫 여왕’인 선덕여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왕 등극’은 철저히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성골 원칙을 깨뜨리는 것보다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후술하겠지만, 서기 7세기의 신라는 철저한 남존여비 분위기의 사회는 아니었던 것으로 봐야 합니다
복지와 사회통합’을 최우선 정책으로
여왕 또한 ‘민심’을 얻는 데 상당한 공을 쏟았습니다. 선덕여왕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뒀던 것은 바로 ‘복지’였습니다. 여왕의 즉위는 서기 632년 1월.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여왕이 불과 9개월 뒤인 632년 10월에 “나라 안의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노인,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진휼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돈’입니다. 다른 곳에 쓸 예산을 아껴서 지금의 ‘복지’와 유사한 분야로 돌렸던 것입니다.
이런 정책은 계속됩니다. 즉위 2년째인 633년 1월에는 대사면을 실시하고 여러 주(州)와 군(郡)의 조세 1년치를 면제해 줍니다. 빈곤층과 차상위 계층에 대한 ‘복지’에서→중산층을 위한 ‘감세’까지 다방면으로 민심을 얻는 정책을 펼친 모습입니다. 그러나 ‘복지’와 ‘감세’라는 모순적인 정책을 취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634년에는 분황사가 건립됩니다. 종교의 힘으로 민심을 얻고 여론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635년에는 당나라 사신이 와 여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합니다. 여왕의 권위가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선덕여왕의 원찰 대구 팔공산 부인사
신라판 1·21 사태, ‘여근곡 매복 사건’
즉위 5년째인 636년부터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삼국사기’의 기록. “3월에 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 효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해에 신라의 국방은 크게 흔들립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영묘사의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철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 울었다. 국인(國人·단순히 ‘나라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던 ‘중앙 귀족’에 가까운 개념)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신라 17관등 중 1등급 관직) 알천·필탄 등을 시켜 ‘정예 병사 2천 명을 뽑아서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 죽여라’고 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이를 포위해 쏴 죽였다.”
나중에 신하들이 신기해하며 “어떻게 그곳에 백제군이 매복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라고 물어보니 여왕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개구리는 노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병사의 형상이다. 옥문(玉門)은 여자의 생식기다. 여자는 음(陰)이니 그 음의 색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이다(‘좌청룡 우백호’라고 할 때 ‘우’는 서쪽을 말합니다―필자 註).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다.”
이 이야기는 그 유명한 ‘선덕여왕이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옛 국민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일화와 함께 나오는 얘기입니다. 숱한 어린이용 전기와 역사서에, 절대로 자세히 쓰지 않고, 대충 얼버무려 쓰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 기록은 겉보기에는 ‘여왕의 총명함과 신라의 빛나는 군사적 승리’를 서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여근곡’은 어디에 있는 곳일까요?
경주시 건천읍 건천IC부근의 여근곡
지금의 경주시 서면 건천읍 신평리의 서쪽 약 5㎞에 있는 단석산의 북쪽 기슭,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 경주IC에서 영천 쪽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등산객들에겐 ‘건천 오봉산’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에는 지금 ‘여근곡 산책로’라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도인 금성(金城·지금의 경주)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지점인 여근곡에 백제군의 특공대 500명이 국경을 넘어 잠입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특공대장격인 백제 장군 우소가 고개만 하나 넘으면 왕궁이 있는 경주 남산에 매복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신라판 김신조 사건’이라 할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신하들과 웃으며 지혜를 자랑할 상황이 아니라, 정말 간담이 서늘해져 앓아 누울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동요하는 민심과 ‘대야성 함락’의 충격
이 무렵부터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그것을 암시합니다. 선덕여왕 7년인 638년 3월에는 “칠중성(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 주변)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35보 옮겨갔다”는 기록이 등장하더니, 7개월 뒤에는 실제로 고구려군이 침공하자 놀란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피난을 갑니다. 같은 해 9월에는 “누런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2년 뒤인 639년에는 “동쪽 바닷물이 붉게 되고 더워져 물고기와 자라가 죽었다”고 기록됐습니다. 옛 사서에서 이런 일들이 연속해서 나오면 보통 ‘나라가 망할 징조’라는 해석이 나오기 십상입니다. 바닷물이 붉어지고 누런 꽃비가 내린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불안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 불안은 오래지 않아 커다란 군사적 재앙으로 나타납니다.
선덕여왕 11년인 서기 642년 8월.
신라 서부 최대의 요충지, 백제군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이었던 대야성(大耶城)이 윤충(允忠)이 지휘하는 백제군의 공격으로 함락됩니다. 당시 대야성은 금성(경주) 다음가는 신라 제2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신라 정계의 실력자였던 여왕의 조카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성주 품석과 딸 고타소랑이 모두 백제군의 칼에 참변을 당했습니다(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이 선덕여왕의 여동생).
이것은 백제가 신라의 목덜미에 칼을 겨눈 형국을 만들었습니다. 신라는 서부 국경지대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대(對) 백제 방어선은 지금의 경북 경산인 압량(押梁)까지 후퇴했습니다. 압량에서 서라벌, 그러니까 왕궁이 있는 금성까지는 불과 40㎞도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군사적 공격을 계속해 옛 가야 지역으로 추정되는 40여개 성을 한꺼번에 빼앗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