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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1948년 제헌의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근거해 구성된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정철용 선생님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본 위원회의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57년 전에 반민족행위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처벌을 위해 활동하신 정철용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위원회 활동에 대한 기대와 역사적 소임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 정철용: 제가 우선 말씀을 드려도 되겠어요? ○ 중앙조사과장 변은진: 예. ○ 정철용: 결국 여러분들 하시는 일이 제가 과거에 한 60년 전에 하던 일입니다. 친일청산 없이는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올바로 설 수가 없고 또 그 당시에 말하자면 우리 반민특별조사 특위에서의 반민법과 지금과는 내용은 같을지 모르지만 방법은 다릅니다. 그 당시는 그야말로 ‘조사, 처벌’ 이런 규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사하는 분들이나 그 조사대상자가 모두 이 세상을 뜨고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올바른 역사를,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규명위원회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고, 저 같은 부족한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아서 그래도 여러분들이나 각 매스컴들에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 겪었던 진실 그대로, 올바른 역사 그 자체 이것만은 제가 말씀드리고 싶다 이런 데서 가끔 언론들과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대가 큽니다. 비록 처벌이 안 된다 하더라도 민족정의를 세운다든지 올바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세우기 위해서는 친일청산이 안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는, 우리 마음속에는 일제시대에 일제로부터 오염된 더러운 역사를 우리는 안고 지금 그 옷을 입고 있어요. 때 묻은 그대로, 더러운 그대로 이것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데요, 남들이 볼 때는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일본 놈들이 망언을 합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도 그야말로 지성인의 지성인인 대학교수라는 분들도 가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뭐냐, 과연 우리가 친일청산이 됐다면 감히 그런 얘기가 못 나옵니다. 그대로 덮어두고 넘어가고, 요행수로 넘어가고 어물어물 하자. 이럴 경우 과연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나라를 팔아먹건 어찌됐건 어물어물 넘어가면 그만 아니냐, 이런 말하자면 국가의 가치관이 완전히 소멸되고 있습니다. 참 한심스러워요. 만일에 참, 만일에 소리를 자꾸 하고 있습니다. 을사조약 그 당시에 우리나라 주변의 정세나 지금 우리 현재 있는 정세 다른 것 아무 것도 없어요. 지금 솔직히 이런 얘기 못 하지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 있습니까? 어려운 것 아니고 말하자면 그런 와중에 있어요. 이럴 경우 과거에 말하자면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치고 자식들 다 버리고 가족들은 비참한 생활속에 던져놓고 한 결과가 뭐냐, 해방된 독립 후 이 나라에서 온 게 뭐냐, 빈곤과 가난 이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반면에 그 침략자들한테 그 놈들한테 빌붙고 그 놈들을 위해서 공을 세우고 우리 독립 운동가를 괴롭히고 잡고 밀고하고 이런 인간들의 자손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주객이 전도되는 상태예요. 이런 경우에 앞으로 또 만일의 얘기를 합니다. 일어날 때 독립을 위해서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비참한 얘기예요, 솔직한 얘기가. 비록 처벌이 안 된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하는 목적이 과거에도 그랬지만 꼭 처벌위주가 아니라 올바른 역사를 우리가 세우자 이겁니다. 우리 국민들이 말하자면 앞으로 어느 경우든 나라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길을 열어주고 그런 역사를 후세에 남겨야지 그대로 우물우물하고 넘어가면 아하 이것도 우물우물하고 넘어가면 되는구나. 이왕이면 권력에 붙어서 돈도 있고 권력도 얻고 해서 자손들에게 좋게 하지 뭐 하러 거지 만들어서 독립운동 하겠습니까! 정말 우리 여야 할 것 없이 이것은 국민들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솔직한 얘기가. 그래서 저는 금년서부터 그런 것입니다. 내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 만나고 신문기자들에게 누누이 얘기했어요. 이 문제는 여야가 있을 수 없는 문제이고 정치권에서 간여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양심에서 이루어져야지 왜 정치세력들이 개입해서 달라붙어서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야단하느냐 나는 손을 떼라 이거예요, 정치적으로. 그런데 결국 16대국회에 와서 어물어물해서 실시해서 결국은 미완성되나마 법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새로 생긴 진상규명위원회는 그 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거 안 만들면 우리나라는 국민들한테 남겨 줄게 없어요, 솔직한 얘기가. 그런데 지금 아이러니컬하게도 기가 막힌 생각을 합니다. 어떤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와요, 뭐냐 하면 그 사람들 처벌 못 해서 그런 것 아닙니다, 지금 독립운동가의 자손들, 후손들이 지금 살고 있어요. 또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같은 시대에 같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그 사람들의 양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생활상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얘기가 안 되는 소리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해방되고 나서 그 많은 친일파들, 군인들, 첩보원들, 이런 사람들 중에 “내가 친일행위해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죄하는 인간 하나 보지 못 했습니다. 지금 현재까지 말이지요. 이게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지금 불란서 같은데 보십시오. 그 짧은 시일 내에도 수천 명이 처벌당하고, 지금 독일 같은 데는 어떻게 하냐 하면 지금도 나치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찾아가서 사과하고 찾아가서 보상합니다. 말하자면 시효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시효랄 것도 떡하니 참말로 중단되었는데, 그나마도 진상규명위원회의 법 테두리 안에서 정말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야지 안 만들면 우리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어요, 누구한테도 할 말이 없고, 외국사람들이 우리한테 욕을 해도 할 말이 없고, 우리 자신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요전에 어디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직도 자기의 부를, 현재 누리고 있는 환경 좋은 친일세력들의 후손들, 그 사람들은 비록 경제력도 있고 지금 현재 지위도 그렇고 확고부동합니다. 누가 건들래야 건들 수 없는 것이고 자기들은 알고 있어요, 자기들은 알고 있지만 조상이 친일파니까 그런 얘기를 못합니다. 또 이쪽에서 그걸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요구하고 싶은 것은 저는 자기 양심적으로 시대를 한번 보라 이겁니다. 과연 내가 올바른 위치에 서있는가, 말하자면 지금 과거의 잘못 승계한 모든 권리나 부를 정말 지금도 잔뜩 붙들고 앉아서 무덤까지 들어가려고, 현상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옳은 태도인가, 이걸 스스로 물어보라 이겁니다, 취지가. 솔직한 얘기지만 양심에 스스로 물어봐서 용서를 받는다면 마음이 홀가분할 거예요. 인간이라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나면 홀가분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분들의 심리를 알고 있습니다. 혹시나 무슨 새로운 법이 생겨서 자기들한테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또 어물어물하다가 행여나 요행히 넘어가는 요행수, 이런 것도 자기들도 암만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 반성하고 그럼 태도가 달라져야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관습을 털어 내놓아야 해요, 혼자만 쥐고 있지 말고. 여태까지 이웃도 안 봤습니다, 자기 혼자만 생각했지. 못사는 이웃들, 옆에 사람들 쳐다보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아량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분들한테 가끔 그런 얘기를 해요, 아직도. 개혁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물꼬가 트여 있는 것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빠르냐 늦으냐, 개혁이라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이것입니다. 빨리 동참해 달라 이겁니다. 동참하는 것이 뭐냐 하면 무슨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행동으로서 동참해 달라, 그래서 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직도 우리 국민들의 동포애, 형제자매로서의 사랑의 불씨가 식기 전에 스스로 참회해주었으면, 그래서 독립운동의 후손들과 지금 친일파라고 하는 후손들과, 누구라고 지명 못하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용서하고 자성하고 해서 손에 손을 잡고 우리가 국민의 화합을 모색하자, 이것이 결국 목적입니다. 이래야지 꼭 어느 누구를 지명해서 너는 나쁘다, 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 국민의 총화를 이루어서 올바른 우리 역사를 이루면 좋겠다. 아직도 우리 역사, 숭고한 우리 국민의 역사, 어려울 때 그래도 손잡고 이겨나가고 그래도 괴로우나 우리 국민들이 합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를 말하자면 아직도 더러운 역사를 주워 담는 그런 말하자면 깡통 든 우리 역사가 아니에요, 올바로 만들어서 나가는데 이것이 결국 여러분들이 할 일입니다. 저는, 회고록에도 있을 거예요, 앞으로 내가 늙었어도 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언제든지 부르면 심부름하겠습니다. 뒤에 따라다니면서 흘린 싹이라도 줍는 그런 맘으로 내가 늙었더라도 끝까지 가서 여러분들 하는 일 끝까지 돕고 머슴노릇 하겠다 이런 얘기하겠습니다. ○ 변은진: 회고록 출판계획이 있으신가요? ○ 정철용: 글쎄요, 이것은 사담입니다, 알겠어요? ○ 변은진: 예. ○ 정철용: 거기서 무슨 회고록을 내고 그러한 자격도 없습니다, 저는. 저는 그런 생각이 추호도 없고, 다만 스스로 얘기 하다보니까 각 인터뷰를 하면서 각계에서 그것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가 많이 나왔어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런 걸 써 본 것이지 저 개인에 대해서 추호도 그런 자격도 없고 내가 그런 걸 한다면 교만한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나라도 살아 있어서 그 당시에 겪었던 사실을 증언 해줘야합니다. 이것이 저의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검토를 하고서, 대부분 초고는 완성이 됐어요. 그래서 여기서도 봅니다, 아까도 거듭 봤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 이사장 조문기나 여러 사람들 회고록 쓴 것을 회의도 많이 가보고 내가 가서 축사도 하고 많이 해봤는데, 그런 사람들 그만한 능력과 공로가 있던 사람이지 저 같은 인간이 무슨 나라에 공로세운 사람이라고 감히 무슨 회고록이나 이런 걸 하겠습니까. 단지 제가 하고 싶은 사실 그대로 올바른 역사를 우리가 전해줘야지 잘못하면 정부가 잘못된 역사로 흐지부지 가면 우리 후손들이 안 됩니다. 국가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이것을 올바로 꼭 세우는 것이 앞으로 이것은 꼭 해내야합니다. 그래서 요새 혼자, 이제 여러분들은 그렇게 어려운 길을 안 걸어도 된다, 이렇게 보고 있어요. 조문기랑 나랑 가깝습니다, 내가 한 살 위에요. 한 달에 한 번씩 꼭 만나고 하는데 결국은 고생 많이 한다, 왜 우리 위원회가 가도록 민족문제연구소가 앞에서 탱크 밟고 나가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밟고 나가고 뒤에서, 제가 볼 때는 그래요. 뒤에 또 자문위원회다 뭐다 하나 있어야합니다. 해서 바람막이도 해야 하고 심부름꾼도 해야 하고 떨어진 이삭도 주워서 자꾸 주워야하고 이래서 누가 뭐래도 역사는 세워야합니다. 이것 안 세우면 보세요, 일본놈들 그 어려운 일도 해나가려고 하는데 우리는 왜 못 합니까? 지금 10명의 위원들 말하자면, 강만길 위원장하고 전부 다 대부분 압니다. 난 그 분들이 참말로 훌륭한 분들이고 상임이건 비상임이건 간에 어디서 추천했건, 대통령에서 했건 국회에서 했건 좋다 이겁니다. 일단 여기에 들어온 이상 10명은 진상조사의 위원이지 절대 당을 위해서나 대통령만을 위해서는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난 4년 동안에 되리라고 믿습니다, 또 돼야 하고. 그래서 여러분들 하는 일 앞으로는 내가볼 때 큽니다. 국내에서도 도별로도 조사하고 때에 따라서는 일본도 가야하고 중국도 가야하고 4년 동안에 모든 것을 만들어야합니다. 여러분들 제가 걸어온 그 당시 그 길은 그것이고. 제가 그동안 입원하고 있을 때 강 위원장한테서 특별한 위문도 있었고 정 사무처장도 왔다갔고 여기 청와대에서 수석들 몇이 왔다갔어요, 나한테. 한성조 신부, 친구들, 병원에 많이 왔다갔어요. 그래도 난 당시 정신이 없어 몰랐어요. 그래서 몸이 나아 건강하면 제가 가야합니다. 위원장을 꼭 만나야 할 일도 있고 인사 겸 해서 꼭 가서 한 번 만나고 싶고, 그 현판식 할 때 제가 갔어요. ○ 최재성: 현판식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 변은진: 오셨으면 좋겠어요. ○ 정철용: 한성조, 어제도 한성조 신부한테 ‘어떻게 됐냐’고 전화 왔는데 신부님 고맙지만 나 지금 걸음마 걸으니까 걸음마 걷걸랑 나중에 하고, 어디 무슨 냉면집 기가 막힌 데가 있다’면서, ‘아이고, 냉면이고 뭐고 나는 지금 먹도 못하고 그것 끝나고 나서 만납시다’, 이러고 말았습니다. ○ 변은진: 말씀 잘 들었는데요, 원래 예전에 반민특위하실 때 그때 심정하고 지금 말씀하신 것, 그때도 똑같은 심정이셨습니까? ○ 정철용: 그럼요, 변함이 없어요. 다만 방법뿐이고, 그런데 지금 안타까운 게 있습니다. 솔직히 왜 안타까우냐? 금년에도 독립기념식 때 청와대에서, 자치장관한테서 한 열 몇 번 왔어요, 꼭 나와야한다고.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어 못 나간다, 그런데 사진까지 그려서 단상에 초청된 자리까지 마련했는데, 아예 못나갔어요. 그래서 작년에 제가 갔었어요. 작년에 자리도 만들어서 장관 제쳐놓고 바로 대통령내외와 나랑 둘이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이렇게 마련해서 많이 얘기했어요. 그 당시 대통령이 무슨 얘기했냐 하면, 원고도 없이 올라와서 작년에 말하자면 ‘부자가 망해도 3대가 가고’ 뭐 이런 얘기했는데, 친일파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부자고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은 거지다, 이런 얘기했어. 꼭 과거를 청산해야한다는 걸 원고 없이 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하고 영부인하고 친해져서 ‘나 오늘까지 솔직히 대통령에게 마음에 안 들어 답답한 게 많았소, 그래서 오늘 얘기 듣고 자신도 생겼고 마음이 든든하다’, 그러니까 ‘아, 그러냐고’ 말이야, ‘앞으로 이것만은 해야 한다’고 내가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미안한 얘기지만 요새 자꾸 후퇴하는 것 같아요, 후퇴. 이거 어떻게 되겠느냐 말입니다, 답답하다 말이야. 그래서 열린당 사람한테도 많이 얘기했어요. 도대체가 너희들은 대통령을 바보로 만든 것이 너희들이야, 비서실도 마찬가지야. 왜? 대통령 머리 좋은 양반이에요. 대통령이 생각하고 걸어가면 뒤에 따라가서 열린당이고 내각이고 비서실에서 따라가서 뒷받침 해줘야 돼요, 이걸 모르고 우물쭈물 하다보면 혼자 가다 보면 뒤에 아무도 없어, 창피하고 외로워서 결국은 돌아와서 할말 없으니까 사과예요, 2년 동안 그 짓만 했다 이거예요. 또 열린당도 나한테 혼도 많이 났어요. 왜 그러냐 하면 당신들 일 잘못하면 혁명을, 개혁이랑 혁명이랑 오인하고 있어요. 당신들 과거에 학생운동하고 돌아다닐 때 그저 왕왕하다 유치장에 들어가고 그게 버릇이 되어버렸어, 그것을 재미로 알고 말이야, 정치라는 것은 데모가 아니에요. 이제는 리더십이 있어야 하고 타협이 있어야 하고 서로가 이웃과 상의해야 하는데 이것은 순 개인주의에요, 저 잘난 척 하고 데모하는 식으로 말이야! 그래서 내가 어느 사람한테 누구라고 지목하지 않지만, 나한테 터지다시피 했는데, 왜 그러냐 하면 처음에 날 때 개혁이라 그래서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당신들 실력으로 된 것은 아니야, 노무현은 바람이 불어서 됐는데 바람이란 절대 가만있는 것 아니야. 오늘은 동남풍 불수 있고 내일이면 북서풍도 불수가 있는데 바람이 잘못되면 당신들 날아가! 당신들 정신 차려라! 당신들 무슨 생각하냐, 혼자 공 좀 세워보려고, 개혁에. 산불이 났으면 여럿이 같이 꺼야 되지 욕심 부리다 혼자 없애려고 혼자 달려들다가 너도 죽고 말이야 산도 다 태우고 말이야 전부 이런 식으로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리더십이 없어, 여당이 누구냐, 신기남씨도 처음에 나한테 혼났어요, 결국 자기 아버지 때문에 낙마하고 말았잖아. 그러니까 김희선이도 딱해, 조선일보한테 그렇게 시달리고 당하고 말이야, 여러 가지 있을 때 좀 뵈는 게 없어요, 리더십이 하나도 없어. 누구냐 도대체, 차라리 그러려면 대통령 앞에 무릎 꿇고 가서 차라리 우리 당수 돼주십시오 하고 사정을 해라, 이게 뭐야 하는 짓이,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요새 가만히 보면, 나 지금 기도하고 있어요. 우리 독립 운동가들한테도 내가 부탁한다는 얘기했어요. 소리 좀 내라, 왜 자꾸 말 못하고 죽어 가느냐. 저쪽에서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보면 옛날에 대학교수 된 사람, 총리 지낸 사람, 그 사람들 필적을 빌려서 조선일보에 맨날 자기방어하고 있는데, 이쪽은 없어요. 말하자면 내가 사위를 보든지 며느리 보든지 얼굴 봐야 할 거 아니에요. 얼굴이 없어요. 말하자면 신문이 없어요, 겨우 한겨레신문. 우리 국민들 90%이상이 조․중․동입니다. 그래서 내가 언론정책도 머리 좀 써라, 하다 안 되면 옛날처럼 솔직히 매수를 하든지 뭘 하든지 우리 편이 있어야지 생전. 국민들이 이해가 안된다, 어렵다 말이야. 그래서 어렵고, 독립운동가들 위해서 암만 늙어가지만 얘기 좀 해라. 당신들이 얘기 안 하면 누가하느냐, 자꾸 죽어가고. 저쪽은 자기들이 크려고 하고 있어, 이러다 뭐가 되느냐. 만일에 이번에 조사위원회에서 올바른 일 못한다면 이제는 이건 글러먹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속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당신들이 지원해줘야 되는데 자꾸 죽어가 말이야, 소리 좀 내라, 독립운동가들 만나면 그런 이야기해요, 내가. 임시정부 친구들, 옛날 정보부장 이종찬이 또 홍범도 장군 사업하고 그러는데, 만나면 ‘그래 병신들아 소리 좀 내라, 죽었느냐 말도 못하고, 모이기만 하면 뭐 하냐’ 말이야 가끔 그런 얘기해요. 그래서 모두 이제는 뭐가 됐건 간에 위원회가 많지만 이 친일진상규명위원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우리 국내법뿐 아니라 외국법과도 관계 이상이에요. 나 같으면 이대로 안 해요, 위원장을 말이지 장관급이 다 뭐야? 총리급을 해야 돼, 청와대에 확인해서 해야겠어요. 무슨 짓이냐 이것은 달라, 다른 위원회하고 잠깐 있다 가는 것과 다르고 이것은 국제적으로 걸리는 문제이고, 우리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뭐 장관급이 우리 위원장을 총리대우를 해줘야지 청와대 가서도 어떻게 떠들었는지, 결국 한나라당도 그때 반대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이나마도. 그래서 참말로 이번만큼은 잘 하리라고 믿고 또 해야 합니다. 바람막이도 해줄 것도 생겨야 하고, 또 앞으로 또 가요. 민족문제연구소에 계속 할 테니까 탱크처럼 앞으로 기어나가라, 다음에 가면 밟히잖아요. 우리 위원회에서는 세밀하게 조사하고, 안심하고 비난이나 바람이 와도 뒤에 무슨 자문위원회에 뒤따라가면 자빠지면 해서 해드리고 앞으로 4년 동안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없어도 이걸 만들어야 되요. 안 만들면 우리 역사가 없어요. 난 지금 농담으로 이런 생각해요, 사실은 일본사람들에게 당한 36년간 을사조약 해서 100년밖에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당한 게 중국 놈은 몇 백 년, 몇 천 년이에요.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소국 노예 생활한 것이 말이에요. 다만 그 대신 나라는 안 뺏어갔단 말이야, 어떻게 됐든 우리를 골탕 먹였고 뭘 했건 말이야, 우리가 힘만 있으면 그런데 힘이 없으니까 못 따라가요. 만주 같은 데, 중국 땅이 많은 데 보란 말이에요. 역사왜곡하고 중국 사람들, 그래도 우리 힘이 없어서 말을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친일청산 빨리 끝내서 우리가 참말로 우선 남한의 국민이라도 여야 할 것 없고 말이지, 정말 똘똘 뭉쳐야 돼요, 지금 어려운 시기에 놓여있어요. 내가 요새 고이즈미가 압도적으로 하고 있는데 난 속으로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저놈 자식들이 또 우리한테 하는 행동이 뭔지 압니까, 야금야금 먹어 들어옵니다. 하나 씩 하나 씩 먹어 들어오고, 그 놈들이 와서 뭐하냐 하면 왕족들을 전부다 일본 놈이 영국식으로, 세계에서 작위가 있고 백작이다 공작이다 하는 곳은 둘뿐이 없어요. 그 식으로 만들어서 귀족을 만들어서 한국 사람한테 적용을 했어요. 그래서 높은 놈이 있으면 이렇게 치켜세웁니다. 그 대신 그 밑에는 막 조져요, 나머지 국민들은 싹 잡아 죽여요, 그 놈들이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요. 어느 교수가 ‘우리 경제발전을 했다, 철도 놓아준 것’, 나머지 전부 농토부터 광산, 모조리 다 가져갔는데. 옛날에 우리 어떻게 산 줄 압니까? 그놈들이 일제시대 청일전쟁 때 제일 먼저 점령한 게 대만이에요, 대만이라는 나라가 원래 중국 땅이 아니에요. 청일전쟁 때 중국 놈들이 일본 놈들을 조금 생각했다가 인천 앞바다에서 불과 이틀 만에 중국함대가 다 절단이 났어요, 그래서 대만 뺏겼어요, 옛날에 전쟁이면 땅 뺏는 것이 일이에요. 그래서 소련 놈이 어물어물 달려들었다가 일본 노기마르스키 대장한테 절단 나버리고 나서 일본사람들이 여순, 그곳을 일본 놈이 만들었어요. 그래놓고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화태(사할린)를 옛날에 다 집어먹어 뺐었다 이거예요, 그 뒤로 소련 놈들이 그 뒤로 일본 놈 겁을 보통 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해 놓고 나서 뭐를 했느냐, 우리를 잡아먹고 나서 만주를 만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내몽고 점령하고, 소련 놈들이 만주에 있는 말하자면 그걸 만들어서 만주에 관동군 백만이 있었어요, 세계에서 제일 크다 말입니다. 그것 무서워서 소련 놈들이 못 따라 내려왔어요, 우리한테. 물자가 없어서 결국 못 들어오고 말았는데. 일본 놈 하는 거 태도 가만 보고, 중국사람 하는 것 보고, 소련도 지금 6자회담을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왜 옛날마냥 끼어드는 것이 미국사람들이 끼어드는 것뿐이지, 이게 뭐냐 결국 한국을 중심으로 해서 서로 야단하고 있어요.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어떻게 이걸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느냐, 지금 참말로 노 대통령 정신 차려야 되고, 나는 인천에 맥아더동상 철거문제 가지고 일어날 때 한심스러워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나도 청와대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신청하고 있어요, 할 말도 많다. ○ 변은진: 사실 지금 연세도 많으시고 아까 말씀하셨던 분들도 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남기실 말씀도 다 듣고 조사할 것도 하고 이렇게 해야 하는데요, 선생님 당시에 708명 반민특위에서 조사하셨던 그런 구체적인, 저희는 앞으로 주로 인물들 그러니까 당시에 활동했던 인물들 하나하나 행적들을 조사를 해야 되잖아요, 아까 말씀하셨던 대로 법에 기초해서. 그런 부분들을 하는데 그 당시에 반민특위 활동하시면서 708명에 대한 그 명단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예를 들면 이광수나 이런 체포하실 때 경험 같은 것 인터뷰에 많이 나오는데요,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경험들이 많이 있으신지. ○ 정철용: 대개 저 뿐만 아니라 만나야 할 사람들 만나고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한정이 되어있어요. 어떻게 옛날에 있었던 사람 만났으면 좋겠는데 다 세상 떠나서 만나서 얘기할 재주가 있나 말이야. 다만 2년 전에 이원용이라고 딱 한 사람 살아 있었어요, 조사관이. 조사관 겸 총무과장을 하던 그분을 60년, 50년 후에 어떻게 만나서 그렇게 반가워서 하다가 만나고 나서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참, 기가 막힌 얘기지요, 그러니 외톨박이가 되고 말이야. 그래서 저 혼자뿐이고 그래서 민족정기를 이어가는 모임이라고 있어요. 뭐냐 하면 옛날에 임정 문화부장하고 초대 위원장 하던 김상덕씨 아들, 그도 국가유공자, 나오고 있어요. 또 부위원장 김상돈, 부위원장 아들이 참여하다가 외국 갔다고 그래요. 경북(경남) 북한 빨갱이로 몰려서 죽었어요, 김명동(경남 도조사부 김철호 조사관을 잘못 말함) 그 아들이 참여했고, 또 옛날에 노일환이라고 특검 차장하던 전라도에서 변호사하고 국회 프락치라고 걸린 사람, 장조카라고 참여하고, 거기다가 내가 조문기 씨가 하도 유명해서, 나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지만 내가 고문을 모시겠다고 하니까 깜짝 놀래요, 무슨 얘기냐, 자기가 일부러 민족문제연구소에 들어와서 하고 또 여기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하고 모두 정 처장하고는 참 막역하고 사이고 책도 많이 짓고 다 똑똑한 훌륭한 분들이에요. 그래서 우리 모임은 항상 어디가도 참말로 마음 변하지 않고 해 나가고 하는데 하여튼 여러분들. ○ 변은진: 선생님 원래 예전에, 처음에 반민특위 참가하실 때요, 추천방법은? ○ 최재성: 박우경 의원의 추천. ○ 정철용: 박우경이라고 지금은 국회의원이에요. 그 분은 특별한 것이 없어요. 옛날에 군청 군서기예요. 그러고 그 당시는 지금마냥 정당이라는 것이 없었어요, 처음에 할 때 무소속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들 특별히 말하자면 그것도 내가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 할 때도 김상돈, 김상덕, 김명동이라고 있어요, 김갑순이 잡은. 그 외에는 별로, 왜 그러냐하면 특별한 기억이 안 나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 불과 실제 활동한 게 5개월밖에 안 돼요. 6월 6일 날 실제 당했으니까 실제로 같은 부내에서도 얼굴 모르고 지내는 사람도 많았어요. 왜냐하면 우리들이 형사에 대한 법을 아는 사람이냐, 그것도 아니다 이거예요. 대부분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조사관이나 서기관이나 모두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말하자면 옛날 독립운동 하던 그 사람들의 가족들이나 그 분에 가까운 사람들 적어도 일제시대에 민족의 양심을 지킨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한 것이지 무슨 조사업무에 능해서 한 것도 아니다, 그러다가. ○ 변은진: 국회의원들이 추천을 해서? ○ 정철용: 예, 대부분 그렇게 되었어요. ○ 변은진: 독립운동가 어떤 분과 친분이, 아니면 가족 중에 있으셔서, 아니 선생님도 독립운동가 후손인지. ○ 정철용: 나는 그건 아니에요. ○ 변은진: 그건 아니시고요? ○ 정철용: 예, 아니고 다만 박우경 초대의원하고 아버지하고 친하고 그렇게 인간적으로 가까웠는지 몰라도 하여튼 그 양반이 추천해서 나는 잘 직장 다니고 있었는데, 갔다가 괜히 얻어터지고 실업자 되고 별생각이 다 들고 그랬는데 기억이 나는 것이 그것하고, 우리 사실 춘원 이광수를 우리 젊었을 때 그 사람 숭배했어요.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내손으로 가서 명령에 의해서지만 연행을 하고 와서 얘기하다 보니까 참말로 한편으로 안타까웠고 아깝고, 한편으로는 하는 짓이 괘씸했고 그러나 최린 씨 는 33인중에 하나이지요. 똑같은 문인 중에도 다 같지 않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 딱 한 사람 말하자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나를 죽여다오.” 말이야, 참회한 것은 그 양반 한 뿐이에요. 특히 내가 기억나는 것이 뭔고 하니, 나도 참 이상한 것이 투서에 의해서 내가 가서 잡고 보니까 전부 거짓말이고 다 은사의 아버지더라고요. 세상에 할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있었는데 제일 내가 많이 열중하고 싸우고 한 것은 내가 당시 헌병사령관 전봉덕이라고 있어요. 일제시대 때 고시패스 다 하고 경시까지 한 아주 똑똑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반민특위 조사관의 열정가지고 한 이틀간 무지하게 싸워댔어요. 나중에 새벽까지 나오고 그랬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 했어요. 그 놈들은 절대 반민특위에 대해서 굴하지 않았어요, 그 놈들 경찰이 끌고 가고 별짓 다 했어요. ○ 변은진: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해방되고 나서 원래 다른 데, 신한공사에 취업을 하셨는데 그런 생각을 평소에 그런 뜻을 가지고 계셔서 그렇게 추천이 되신 것입니까? ○ 정철용: 반민특위는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 변은진: 어떻게 갑자기 그런 생각을. ○ 정철용: 나는 처음에는 못 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무슨 지식이 있습니까, 능력이 있습니까? 오히려 잘못하면 이러한 중대한 일을 잘못하면 나라에 폐 끼치고 나라에 미안하고 선생님한테도 죄송하고 해서 한사코 끝끝내 안 된다 이 말이야. 그래서 해보니까 처음에 와서 1.5일 할 때 이범석이 총리였어요. 거기 가서 만나보고, 대통령도 우리 청와대 가서 만나보고, 신익희 선생도 청와대 가서 만나고 일을 시작하고, 부통령 하시던 이시영, 그 양반도 사실 우리랑 같이, 제일 처음에는 우리가 그 자리가 아니고 중앙청에 있었어요. 그 앞에 지나다가 그 양반 찾아뵙고, 내가 계단에 엎고도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 양반을. 그리고 이승만 박사도 만나봤는데 처음에는 그런 분 아니었는데 그렇게 독재자로 변할지 몰랐고, 세상사가 어렵고 그 당시는 참 대한민국에 있어서 혼란의 혼란기에요. 그 군정이 뭔고 하니 우리나라 힘으로 했으면 반 달에 끝난 겁니다. 친일파들은 그들이 죽을지도 안다 그런데 우리 앞에 딱 가로막은 것이 군정 3년, 꼼짝도 못하고 국민들은 말이야. 심지어 김구 선생 임정도 인정 안 했어요. 개인적으로 들어오라 말이지. 그러니 뭐가 됩니까! 그 당시에 여운형씨는 번개같이 해서 미국 군정 하에서도 인민공화국 다 만들었지요. 나중에 그 이북에서 깡패들, 여운형이 죽어, 김성수 당해, 장덕수 당해, 김구 선생. 뭐 뭐 그저 살인, 난장판이야. 여수순천반란사건, 대구폭동, 제주반란사건 그 당시 군정 하에서, 그 복잡한 속에서 우리 반민특위라는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이박사가 애지중지하고 하는 경찰들 잡아야 되요, 그놈들이 독립운동사를 방해했는데 왜 안 잡냐 말이에요. 정부와 국회의 마찰, 우리와 경찰의 마찰 그런 모순 속에서 이게 되겠느냐 말입니다. 이박사가 몇 번 얘기했어요. 그 사람 잡지 말라고, 누가 잡으라고 그랬냐, 그 사람들 없으면, 공산당과 싸우는 사람들 왜 잡느냐, 못 잡게 하고 별짓 다 했다 말이에요, 그러나 그 와중에서 그게 되겠어요? 무력에 의해서 우리가 당하고 우리는 6.6사태라고 합니다. 6월 6일 날 아침부터 내가 나가면서부터 당하고 그렇게 해서 허무하게 끝나고 나니까 지금 우리도 각 도지부에 지부장이 누구인지 얼굴도 몰라요. 왜 한참 일하다가 뭘 하려고 하면 해외로 도망가는 놈 있으면 그 놈 잡으러 가야 되고 또 한편에서는 조사업무를 해야 되요. 한참 그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욕심으로 하다가 결국 그때 가서 이박사가 경찰을 갖다 하는 바람에 뭐 일할 수 있어요? 나는 그 다음에 이인 씨라고 옛날 초대 법무장관 하던 그분이 올 때 위원장으로, 청소부장 온다고 했어요. 일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청소시키려고 온 거다. 그 당시 복잡한 시대에 억울하고, 그렇다고 오늘날까지 누구한테 누구마냥 데모해서 우리를 대우해 주시오 이렇게 말해 본적도 없어요. 나 혼자인데 누구한테 얘기합니까, 숨어서 60년 동안 쭉 살아왔어요, 불평 없어요. 다만 살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서 그 당시에 사실을 증언하고, 거짓말 아니고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그 자체로서 저로서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지 정부에서 나를 뭐 어떻게 하시오, 그런 역사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 변은진: 중앙조사국 조사2과에서 하셨던 걸로 나왔던데요. ○ 정철용: 조사 1부, 2부, 3부로 해서 1부는 정치, 2부는 경제, 3부는 문인관계. ○ 변은진: 경제 쪽에 많이 하셨습니까? ○ 정철용: 그렇게 부서는 나눴어도 사실은 부탁하고 급하면 같이 협조하고 그 사람 잡으러 가고 한참 열심히 일하는데 당연히 내 일 할 것 뭐 있어요? ○ 변은진: 그 당시에 중앙조사국에서 직접 검거한, 체포한 사람들이 몇 명 정도 됩니까? ○ 정철용: 그것도 많아요. 그 당시 끝날 때까지만 해도 체포하고 송치하고 그런 것이 아마 500여건 될 거예요, 많이 했어요. ○ 변은진: 선생님께서 직접 관여하셔서 한 건 몇 건? ○ 정철용: 내가 직접 한 것은 한 건, 두 건. 이광수, 그 다음에 잡았다는 선생님 아버지, 그 다음에 경찰에 갔다가 싸움만 하고 그리고 나서 나뿐만 아니고 다 그래요. 특별히 어느 것을 몇 건 했다는 것은 이런 것은 시간이 없었어, 할 시간이 없었어요, 누구를 막론하고 말이야. ○ 변은진: 저희가 그때 체포된 사람들 명단이거든요, 잘 안 보이실 텐데. ○ 최재성: 반민피의자 명단입니다, 글씨가 작아서 잘 안 보이실 텐데. ○ 변은진: 안 보이시죠? ○ 정철용: 이건 명단이고 직접 체포한 것은. ○ 변은진: 그래서 나중에 한 사람 한 사람 체포되신 분들에 대해서 혹시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면 듣고 싶거든요. ○ 정철용: 그러세요, 나중에 여러분들 하시는데 병이 다 나으면 제가 나가볼게요. ○ 변은진: 지금 건강도 안 좋으시고 나중에 기운을 차리시면 이름들을 보시면서 혹시 기억, 많이 생각을 해 보시면. ○ 정철용: 고향이 나는 원래 충청북도이지만 거기도 명단이 나오데요. 거기에도 담당하는 분이 있데요, 도별로. 내가 거기에 대해서는 그 당시 내용을 쭉 아는 청주인인 문화원장이, 우리랑 똑같은 길을 가고 있는 신문사가 있어요. 전화해서 너 앞으로 하여튼 여기가 누가 됐든 충청북도에 대해서는 책임지고 다 알려줘라, 전부 현장에도 가보고 유적도 가보고, 그 사람들 하는 것에 대해서 명단은 다 나와 있으니까. 각 군도 연락하여 협조하라고 해서 충청북도 담당한 조사관, 그분 후원회를 내가 지금 만들어주고 있어요. 그 당시 내용 훤히 아는 사람들. 지금도 문화원장, 충북인 뉴스편집국장, 과거 시의원 도의원 지낸 친구들 많이 있어요. 청주도 지금 공원에 가면 김춘수(정춘수를 잘못 말함) 목사 공원에 잡아들인 것도 있고 많이 있어요. 그런 실적을 갖다가 충북담당 조사관한테 절대 협조하라고 충청북도에는 다 조직을 만들었어요. 협조해 줘라 말이야. 앞으로 4년 동안 있으니까 그동안에 열심히 해서 올바른 명단 만들어서 참말로 끝나고 나면 큰일이 될 거라고 봅니다. 다른 데 위원회 많아요, 과거사진상위원회다 뭐다, 그런 문제와 차원이 다르다 그랬어요. 이전에도 아팠을 때 청와대에서 민정수석이 화분도 보내고 그랬을 때 그런 얘기도 했어요. 거기와 여기는 다르다. 내가 몇 번을 강조했어요, ‘여기 위원장은 장관급 아니야, 당신들 총리 대우해야 한다’, 몇 번 앞으로도 기회 있으면, 법을 고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 위원회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할 때는 지원이고 뭐고 우리가 받았던 푸대접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양반 한분 한분이 인격체로서 일할 수 있도록 조사관들한테 뭔가 해 줘라 하는 것을 행정자치부와 청와대에 강력하게 얘기할 거예요. 이제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내가 정부에 대해서 나한테 뭐 해달라고 요구할 사람이에요? 뭐 할 사람이에요? 올바른 얘기를 해야겠단 말이야. ○ 변은진: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자세히 구체적으로 여쭤볼게요. ○ 정철용: 내가 몸이 나았으면, 위원장을 만나서 꼭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이 있어요. 인사도 해야 하고 내가 여러 가지 아플 때 걱정을 해 준일 도 있고 그래서 내가 만나야.
카페 이름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kokoin 카페 소개 : 민족 반역자 및 그 후손을 처단하는 모임 |
첫댓글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 나라의 힘이.....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