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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 9,26-31
제2독서 요한1 3,18-24
복음 요한 15,1-8
포도나무가지 비유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전해주던
앞의 주일 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포도나무와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복음에서 저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성경 구절은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입니다.
하느님이 ‘농부’라니,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저에게 농부는 푸근한 인상,
그러나 누구보다도 진실하게 땀 흘리는
삶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사람이 뭘 잘못하나를 감시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며
좋은 포도나무들이 자라도록 땀 흘리며 애쓰는
농부라고 예수님은 말하시는 것 같습니다.
밭에는 돌이 있고,
잡초도 있고,
해충들도 있기에 농부는 바쁩니다.
이런 것들을 제거하고 거름도 주고,
비바람에도 대비하고 때론 가뭄이 들 때
물도 대어주어야 포도나무가 잘 자라기에
정말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로 바쁘실 것 같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세상에서
사랑과 평화가 넘치도록 온 인류의 소리를 들으시고,
하느님의 초대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초대에 응한 사람들에게는 사명을 주시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다
더 사랑하시는데 온 힘을 다 하실테니까요.
아니,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믿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이
가장 흡족해하는 포도나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포도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따뜻한 햇빛,
적절한 비, 땅이 주는 영양분이 다 필요하듯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
은총과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섬기는 삶
모두를 양분으로 해서 살아가셨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살아가는
내내 맺고 나누셨기에 그렇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가장 건강한 ‘참 포도나무’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이 말씀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과 내 인생이 별 관계가 없는데도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말일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내 인생은 나 혼자 알아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인생의 진실을 물으며,
그분의 삶에서 구원의 신비를 발견하고,
따라 살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 우리는 성경 묵상을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 나와는 너무도 다른, 아무 걱정도 없이
알아서 잘 살아가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갖는 한계와 어려움을 온전히 겪으면서도
인간의 삶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신
‘나와 같은’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성사 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내 삶의 근원적 지혜와 힘을 얻고
그분의 제자로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삶은 너무 이상적이기에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단정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일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이 쉽지 않고 치열하다고 느낄수록,
나 혼자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인생을 허락하셨는지,
우리는 어떻게 인생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살 수 있는지를 묻고 배우도록 초대받은 것이 축복 아닐까요?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는 내 경험,
내 생각, 내 판단이 옳다고 믿고 그것들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인생에 관심을 갖고,
그분이 삶에서 가장 중시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나 역시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맺게 해주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우리가 정말 원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이 필요
한 은총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맺는 열매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이고,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아버지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과
연결지어 다시 묵상해 봅니다.
부활은 단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걸었던 사랑의 길이야말로
죽음을 이기고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
길임을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사랑의 길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사랑의 길을 믿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롭게 태어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그 구원 사업에 우리도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이라 고백하고
그분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알아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하느님은
포도나무가 건강히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시고,
건강한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
달린 가지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축복하십니다
-현재우 에드몬드-
[한주간 전례]
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가타리나 성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으며,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14,21-26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최후의 만찬을
배경으로 하는 요한 복음서 14장은
‘제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먼저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고(14,5-7 참조),
필립보의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며(14,8-21 참조),
마지막으로 유다(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의
질문과 그 대답(14,22-26 참조)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필립보와의
대화 마지막 부분으로 시작하는데,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제시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유다와의 대화에서도 되풀이됩니다.
다만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내 말을 지키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한 필립보와의 대화와,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한
유다와의 대화를 하나의 본문으로 구성함으로써,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말씀을 지키는 것임을 명시합니다.
규범(계명)만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르침(말씀)을 자발적으로 지키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성의 문제이고,
그래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알아보고 따르며 행
동에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 없이 진행되는 삶은
신앙생활이기보다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걷게 하자, 군중이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외치며 그들을 신격화하였듯이,
우리의 신앙도 기적과 경이로움만을 사랑하는
우상 숭배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섬세하게 반응하고
내 삶의 절대적 지침으로 삼는 것,
그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길이며 참다운 신앙으로 가는 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4월 30일 (화) [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4,27-31ㄱ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오늘 복음으로 요한 복음서
14장의 가르침이 마무리됩니다.
공포와 불안으로
산란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평화를 주시겠노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구별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면,
“내가 주는 평화”는 상대가 다시 싸움을 걸어와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절대적 평정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샬롬’은 ‘전체적이고
충만하여 결핍이 없는 상태’를, 부족하거나
손상된 부분이 없어서 서로 싸우거나 다툴 필요가 없는 상황을 뜻합니다.
이러한 완전한 평화는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들은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어도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그 어떠한 악이 방해를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성찬 전례 가운데 사제는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데,
우리가 나누어야 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견고한 평화로
하느님의 일을 이룩하여 나가셨습니다.
신앙은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주님의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오면 이내 위태로워질
‘마음의 평화’를 찾기보다,
그 어떠한 악도 방해하거나 붕괴시키지 못하는
‘주님의 평화’를 서로 빌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체 예식 가운데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가장 엄격한 사랑이며 기도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1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
(요한 13—17장)의 한 부분입니다.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써,
당신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본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연이어 나오는 ‘깨끗하게’
또는 ‘깨끗이 하다’라는 낱말입니다.
2절의 “깨끗이 손질하시어”로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카타이로’는 3절의 “깨끗하게”(‘카타로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가지를 쳐 내어
깨끗이 손질할 필요가 있듯이,
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내면의 가지치기로
깨끗해져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작업이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이 선언은 유다인들의 통념과는 다른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을 제시하는
중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가 깨끗해지고
구원됨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독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초대 교회가 정리하여야 하였던
‘구원관 논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독서가 보여 주듯 유다인들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외적인 표식(할례)이나
율법의 준수가 한 인간의 삶과
생명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신 “참포도나무”이시기에,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실행함으로써
깨끗해지고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으며, 328년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성인은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을 벌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특별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5,9-11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어제에 이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의 ‘옛 계명’과
그리스도인들의 ‘새 계명’이 대조됩니다.
독서는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새롭게 믿게 된 이들이
더 이상 유다인들의 외적 관습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복음은 유다인들의
옛 전통과 율법을 완성할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율법의 준수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특별히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비유
’(참포도나무와 가지)와 달리 갑자기
명령형이 사용되고 직접 화법으로 강조됩니다.
그리고 이때 쓰인 동사 ‘사랑하다’(‘아가파오’)는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의지적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죽는 것’,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저 가만히 멈춘 상태로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 끊임없이 그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을 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때, 오히려 그 사랑은 온전히
살아나고 자신도 구원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만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실존하는
가장 큰 힘이며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려 주시고, 그 이유도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소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며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복음묵상] 요한 14,6-14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오늘 미사에서는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의 일화가 봉독됩니다.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고,
독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사도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필립보가 하느님을 뵙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하고 되물으십니다.
사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그분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더 깊이 나의 내면으로 들어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하시며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 계시고,
그분 안에 온전히 하나로 계시며,
서로의 ‘안’에 ‘깊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긴밀한 관계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삼위일체 하느님을 온전히 뵙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이론이나 설명, 논증으로 확인되는 일이 아니라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럴듯한 설명을 들으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께, 여전히 필립보처럼
‘어서 하느님을 보여 달라.’,
‘그분을 만나게 하여 달라.’고 우기는 일이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21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고별 담화’가 계속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제자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시며
앞으로 제자들이 받게 될 고난을 예고하시는데,
예수님의 착잡한 심정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또한
당신처럼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이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인도 고통받는데, 하물며 종이 고통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지가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의 고통은 스승과 ‘연결’되어 있고,
스승에게 ‘종속’되어 있기에 겪게 될 것이지만,
이는 복음적 열매를 맺게 하는 은총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종속성’(하느님께 속함)은
독서에서 그대로 발견됩니다.
바오로와 티모테오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지시하시는 내용을 따릅니다.
이는 ’성령’, ‘예수님의 영’, ‘하느님’이라는
주어가 제시되는 문장에서 확인됩니다.
그들은 아시아에 가려고 하였지만 “성령께서 ……
막으셨으므로”, 그리고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계획을 바꾸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곳으로 향합니다.
독서에 나오는 주어들(성령, 예수님의 영, 하느님)은
바오로의 선교 여행을 이끈 이는 바오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초대 교회의 경이로운 선교 사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이루신 기적이요 성과임을 밝혀 줍니다.
내가 어디에 속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어렵고 신중하여야 할 일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는지에 따라
삶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속하기,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사람들이나 세상이 좋아하는 일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기, 이것이 영성 생활의 기본입니다.
놀랍게도 하느님께 속하여 그분께서 바라시는 일을 할 때
우리 삶은 비효율적으로 소모되지 않고 최상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오로 선교 여행의 결실이 이를 증언합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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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로사리오 성월인 5월
행사도 많은 5월 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행복한 5월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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