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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5월 5일 (일)
[백]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제1독서: 사도 10,25-26.34-35.44-48
제2독서: 1요한 4,7-10
복음: 요한 15,9-17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
최후의 만찬에서 남겨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일상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교무실 자리 건너편에는
안전생활부장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생들의 갈등이나 일탈을 담당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학생주임이라고 불리던 그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편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갈등과 일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선생님의 한숨은 실패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상합니다.
본당 사목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공정과 정의이겠으나,
반대편에서는 배제이고 편애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신자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계명에다 묵상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싶습니다.
도리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질문은 예수님이나
요한 복음사가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 젊은 시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요한은 노년을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순교했고,
그는 홀로 세상에 남아 주님에 대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시간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질문을 하던 청년 요한은, 이제 유일한 사도로서 답해야 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대답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렇게 매 순간 사랑을 고민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님과 제자들, 사랑의 사도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시도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실패할 일이라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계명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겠지요
.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전형천 미카엘 신부-
[한주간 전례]
2024년 5월 6일 (월)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5,26─16,4ㄱ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요한 복음서의 긴 ‘고별 담화’가 마무리되면서,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심을 예고합니다.
“보호자”로 옮긴 그리스 말 ‘파라클레토스’는
‘파라’(- 주변에, - 옆에)와 ‘클레토스
’(‘칼레오’ 동사의 수동태, ‘불린’ 또는 ‘부름받은’)가 합성된 낱말입니다.
직역하면 ‘어떤 것 주변에 있도록 부름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곧 ‘파라클레토스’는 우리 주변에 늘 함께하도록 불린 존재를 뜻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성령’이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어떤 것의 ‘증언’이 필요한 경우는
관련 사건의 정보나 진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때입니다
. 법정에서 증인은 그때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분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제자들’이
“나를 증언할 것”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신원에 의문이 생길 때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모두 ‘진리’였음을 증언할 존재는 성령과 제자들입니다.
물론 이들이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함께한’ 이들만이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소통이 쉽지 않은 이유는
누구의 문제라기보다 처음부터 서로 ‘함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함께하지 못하니
소통에도 한계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소통’은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며
“처음부터 나와 함께” 계신 ‘진리의 영’과만 가능합니다.
참된 보호자이시고 변호자이시며 증인이신 성령!
이제 다가올 성령 강림 대축일에 우리가 받게 될 최고의 선물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7일 (화) [백]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6,5-11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오늘 복음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 그래서일까요?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은 ‘가다’와 ‘오다’입니다.
예수님의 ‘가심’에 제자들은 ‘근심에 가득차게’ 됩니다.
지금까지 함께한 스승님의 부재가
커다란 상실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가 단순한 공허가 아님을
성령의 ‘오심’으로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전에 저는 이 말씀을,
예수님의 ‘가심’이 성령의 ‘오심’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마치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넘겨받듯,
성자의 시대가 성령의 시대로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삼위일체 사이의 바통 넘겨받기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빈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선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더 이상 지상에 머물러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중개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그분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더욱 돈독한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성령께서 오시면
“잘못 생각하는 것”(9.10.11절, 세 번 나옴)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더욱 깊은 이해와 통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은
계절 사이의 바통 넘겨받기가 아닙니다.
겨울 속에 봄이 있고, 여름 속에 가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더욱 깊고 견고하게 만드는
연속된 단계요 이어짐입니다.
이 초대의 의미를 깨닫고 더욱 깊은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성령 강림 때 우리가 청하여야 할 은총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8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6,12-15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모든 것을 곧바로 알아내고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여러 생각과 질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깊어져, 점차 그 의미가 명료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한계를 전제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듣고 체험한 제자들이었지만,
여전히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을 말씀하시며 그분께서 진리로 이끌어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이후 본문은 ‘알려 주다’라는
낱말을 되풀이하여 쓰는데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아낭겔로’이며,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여 알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마치 기자들이 어떤 사건의 정황을 대중에게 보도하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본문은 복음의 진리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알려졌고’,
아들은 이를 성령에게 ‘알려 주었으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언제나 참된 ‘진리’로
존재하시는 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은 진리의 영께서 알려 주십니다. 그
알려 주심을 왜곡 없이 받아들이고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은
가지런하여지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알아 가는
과정이 우리 신앙인의 삶이고 영성 생활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6,16-20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문학적 기법이 있습니다.
두 개의 대조되는 낱말을 조합하여 주제를 두드러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조금 있으면”과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 대조되고
, ‘보지 못하다’와 ‘보다’가 대조되며, “근심”과 “기쁨”이 대조됩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구문은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오는데,
그리스 말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조금 있으면(‘미크론’) ……
다시 조금 있으면(‘팔린 미크론’)”입니다.
이 구절은 ‘보다’라는 동사와 연결되어,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보게 될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만듭니다.
제자들조차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며
술렁이자 예수님께서 그 의미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니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으니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언급된 기쁨은 인간적 쾌락이나 즐거움과는 구별되는
매우 깊은 내적 감정으로,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역설적 신비를 일컫습니다
. 상실을 체험하고 견딘 뒤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영적 기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빛나는 순간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 뒤 다시 어떤 사건을 만나면
이내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며 버려진 듯한 느낌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은총입니다.
슬픔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겠지만, 조금 더 있으면
그 슬픔이 다시 진정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모순적 진리를 번갈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어떤 순간에 체험한 가슴 아픈
‘상실’이 조금 뒤에 지나고 보면 깊은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역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여정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진리의 영’이십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0-23ㄱ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를 계속해서 전하여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 곧 수난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잠시는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해산을 앞둔 여자의 이미지를 통하여 지금 제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묘사하시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의 의미까지 알려 주십니다.
사랑하는 존재나 마음을 다하여
애착하던 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해산의 고통만큼이나 혹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여정일 때,
반드시 ‘부활’과 새로운 ‘생명’이 주는 ‘기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술적 영감과 철학적 사고는
슬픔이나 비극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행하여야 행복을 그리워하고 슬퍼하여야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을 만큼의 고통에서 태어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쁨은 가식적 행복일 수 있고,
언제 슬픔으로 바뀔지 모르는 불안을 품고 있습니다.
영적 기쁨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 내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믿을 때 생기는 은총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3ㄴ-28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과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곧 ‘기도’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본문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강조 용법으로 시작되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청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마치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바라는 것이
뚝딱 이루어진다는 현혹처럼 들리기도 하고,
무모한 약속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뒷부분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전제하시며, 당신께서 대변인처럼
우리의 처지를 하느님께 청하여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곧 기도는 청탁이나 거래, 주문을 외우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소통하는 자리임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그렇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그 만남이 주는 평화와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들어주십니다.
주문이나 주술로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에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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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날 과
어버이날이 있는 주간입니다.
5월의
시작과 함께 되는 가정의 달 행사
아이와 손자와 부모님 모두에게
성모님의 전구로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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