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깊은 사유를 해야 합니다. 흔히들 불교에서는 사유를 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세계가 유한한가 무한한가 등과 같은 문제에 대답하지 않은 이유를 들어 사유는 불교의 수행에 무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기의 의의를 살펴보면서 알 수 있었듯이 부처님은 사유를 배제하기 위해서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바른 사유로 인도하기 위해서 침묵하신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방법은 문聞, 사思, 수修, 증證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본뜻을 깊이 생각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하여, 스스로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아함경>에 보면, 당시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들 듣고서는 조용한 곳에 앉아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사유했다고 합니다. 중도는 이와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불교공부의 바른 길입니다. 부처님은 중도에 입각하여 말씀을 설하신 것이므로 우리도 중도에 들어야 부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을 수 있고, 중도의 입장에서 사유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중도의 입장에서 수행해야 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중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십이연기법은 생사를 벗어나는 길을 보여준 법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법문을 외우고 있으면서도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중도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중도에 입각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사견을 가지고 듣기 때문에 그 말씀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도의 이해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중도의 이해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무기의 문제에서 지금까지 이 강좌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중도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강의가 분명히 어렵고 복잡할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쓸데없는 망상만 키우는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 봅시다. 오늘은 단상중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일가요, 죽으면 그만일까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대부분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이 생에서 지은 업에 따라 다음 세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은 대부분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각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부처님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단견이라고 하며 배척했습니다. 그렇다고 영혼이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 가서 태어난다는 생각을 올바르다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상견이라고 하며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단견과 상견을 모두 물리친 것을 단상중도라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아마 상당한 혼란을 느끼실 것입니다.
절에 가면 흔히 스님들이 옷을 갈아입는다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육체라는 현세에서의 옷을 벗어 버리고, 내세에 가서 새로운 육체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같은 말 속에는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은 상견이므로 버려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같은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잡아함300경> 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단상중도를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는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고 하면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의미있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주장은 이들 두 변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 법이니,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남이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큰 괴로움 덩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어떤 업을 지은 사람이 죽어 다음 세상에 가서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뜻이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업을 지은 사람은 죽으면 사라지고 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는 다음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업을 지은 사람과 그 업의 과보를 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이 같은 두 가지 생각은 잘못된 것이므로 버려야 하며, 의미있는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십이연기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부처님은 우리는 죽으면 그만인가, 죽은 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 가서 태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대답하지 않으시고 십이연기를 설하고 있는 것일까요? 쓸데없는 논의는 그만하고 무명을 멸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수행에나 전념하자는 의도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 문제를 도외시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답으로 십이연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기의 문제를 살펴보면서도 이야기했듯이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의심은 사견에서 비롯된 허망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기법은 부처님이 깨달은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인간과 세계의 실상, 즉 연기법을 통달하게 되면, 생사윤회의 실상을 깨달아 그같은 허망한 의심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우리의 생이 끝이라는 단견과 영혼은 죽지 않고 내세에 가서 태어난다는 상견은 모두 외도들의 주장입니다. 외도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아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바라문교에서는 상주 불멸하는 아트만을 자아라고 주장하고, 자이나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지바가 자아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유물론적 요소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여러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몸이 우리의 자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이 외도들은 영원하게 존재하든 일시적으로 존재하든, 자아란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시간적으로 존속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ㅑ7
이렇게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가 상견이고, 현생동안은 존재하지만 죽으면 사라진다는 견해가 단견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아를 주장합니다. 시간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는 우리의 생각속에만 있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간적으로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영원한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은 마치 토끼의 뿔은 한 개인가 두 개인가 라는 물음처럼 무의미합니다.
. 연기법의 도리에서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와 세계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인연의 끈으로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세계,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을 때, 온 우주는 그대로 참된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는 태어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없이 인연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무상하고,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무아이지만 인연따라 항상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외도들은 이같은 우리의 참된 자아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제멋대로 자아라는 것을 꾸며놓고서는 상견과 단견에 빠져 있습니다.
십이연기는 이렇게 상견과 단견이라는 무명에 휩싸인 중생들이 어떻게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를 밝혀주는 교리입니다.
중생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외부에 있고, 그 세계 속에 자신과는 별개의 중생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 가운데서 중생들은 몸은 자아라고 생각하거나, 몸과는 다른 죽지 않는 영혼이 있다고 믿고 이것을 자아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허망한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십이연기의 무명입니다.
중생들은 자신의 참모습을 모르는 무명의 상태에서 자기들이 제멋대로 꾸며놓은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십이연기의 행입니다. 거짓되고 허망한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의식이 형성됩니다.
우리는 의식이 태어나면서부터 일정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의식을 형성시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양 사람의 의식구조와 서양 사람의 의식구조는 다릅니다. 태어나면서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환경과 그 환경 속에서의 삶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같은 동양 사람이라고 해도 개개인의 의식구조는 같지 않습니다. 이렇게 삶에 의해 의식이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다르면 보이는 세상이 달라지고, 이렇게 저마다 다른 의식을 토대로 살아가는 가운데 자아와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중생이고, 이같은 중생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십이연기입니다. 따라서 이같은 사실, 즉 십이연기를 깨달은 사람은 결코 상견과 단견에 빠지지 않습니다.
단상중도는 이와 같이 십이연기를 깨달아서 단견과 상견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외도들처럼 단견이나 상견에 빠지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위 글쓴이는 12연기법이 무엇이며,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께서 어떤 목적으로 12연기법을 설하셨는지 알지 못하시고, 이제까지 여러 사람들이 말한 내용을 토대로 중도를 설명하려고 하니 근본불교에 전혀 없는 내용을 끌어다가 어리석은 사람들이 대충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논법으로 중도를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근본불교의 입장에 서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글 내용 중 아래 내용은 이치에 맞는 말씀입니다.
시간적으로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영원한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은
마치 토끼의 뿔은 한 개인가 두 개인가 라는 물음처럼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위 글쓴이는 12연기법이 무엇이며,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께서 어떤 목적으로 12연기법을 설하셨는지 알지 못하시고,
이제까지 여러 사람들이 말한 내용을 토대로 중도를 설명하려고 하니
근본불교에 전혀 없는 내용을 끌어다가
어리석은 사람들이 대충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논법으로
중도를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중도를 이해하면 근본불교의 교리에서 아주 크게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바르게 본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뗏목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위 글 내용 중 아래 내용은 불교의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연기법의 도리에서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와 세계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인연의 끈으로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세계,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을 때, 온 우주는 그대로 참된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위 글 내용은 상견(상주론) 입장인 브라만교(바라문교)의 범아일여 사상입니다.
위 글을 쓴 글쓴이의 입장은
자신은 무아인 중도의 입장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실상은 항상하는 자아(참된 자아)를 전제한
전형적인 상견론(상주론)자인 것입니다.
위 글은 불교의 변질, 왜곡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상견(상주론)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주 교묘하게 그 어떤 말(진아, 참나, 법성, 불성, 신, 영혼 등)을 붙여서라도
불교의 근본교설인 무아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석가모니)께서는
인간 존재의 실상이 무아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5온설을 꺼내놓으셨고,
인간이 왜 부질없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5취온설을 꺼내놓으신 것입니다.
5온의 연기법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상이 무아임을 증명하셨고,
5취온의 연기법(12연기법, 4성제)을 통해
정신적 고통(고성제)이 왜 일어나고(집성제)
어떻게 하면(도성제) 사라지는지(멸성제)를 증명해놓으신 것입니다.
바르게 본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뗏목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지기님의의견 감사합니다 요즘 이중표교수의 불교이론공부하다 발췌했습니다
여러학자 여러스님의 글으봅니다만 각자의주장이다가지 가지네요
부처님 찾아뵙고 문의해볼랍니다 ㅎ ㅎ ㅎ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이 카페에도 이중표 교수의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중표 교수는 일찌기 아함경을 접하고
대승불교의 입장에 서서 아함경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이 분의 글에 대해 일일이 다 반박하는 글을 게재하고자 했으나
너무 많아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아함경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진 경전 중 초기경전으로 분류되고,
고타마 붓다의 원가르침(근본불교)이 남아 있는 부분도 들어 있으나
많은 곳에서 후대 사람들이 변질, 왜곡, 창작한 경전들(변형불교)도 뒤섞여 들어 있어요.
이중표 교수는 대승불교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근본불교를 변질, 왜곡, 창작한 경전을 근거로
근본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전파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는 태어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없이 인연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무상하고,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무아이지만 인연따라 항상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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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는 무아라고 하면서 "나"를 놓지 못한 말입니다.
중도=올바른 8정도 실천으로 탐진치를 빼 없애어 행복하게 사는 삶
진리는 간결하다 가짜들은 복잡하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무아= 하지 말아야할 짓을 저지르면(오취온,나쁜 사람,더러운 사람) 사람을 망침, 망가뜨림(나 또는 남 또는 나와남 모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