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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제1독서 사도 1,1-11
제2독서 에페 1,17-23
복음 마르 16,15-20ㄴ
'당신은 복음의 증거자입니까? 방관자입니까?'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대중매체를 통한 효과적인 교회 사도직 수행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홍보 주일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이 홍보 주일로 제정된 이유를
조심스럽게 짐작해보자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특별사명을
제자들에게 내리신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복음 홍보대사’로 부름받았습니다.
가톨릭신문사로부터 ‘말씀묵상’
원고청탁을 받고 망설일 무렵, 친구 수녀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녀님 모친 고 분다(베네딕타) 어르신은
시골 작은 동네에 사시는 여건상 주일미사를 대체로
공소예절로 하셔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 때문에
매주 가톨릭신문을 꼭 읽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홍보 매체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 순간인 것은 물론,
가톨릭신문이 수행하는 ‘집 안으로 찾아가는 교회’
역할이 강렬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주님께서
강복하시며 하늘로 오르신 사건으로,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영원한 축복의 복음입니다.
아울러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주님의 승천은 부활 사건의 완결입니다.
그런데 주님 승천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복음서가 매주 적은 지면만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마르코복음의 승천 이야기는 단 한 구절에 불과하고
마태오와 요한복음은 승천 이야기를 아예 생략했으며
, 루카복음 역시 후속책인 사도행전에 유보한 탓인지
매우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간결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주님 승천 이야기를 요약하면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승천은 주님의
지상 사명의 완성으로 사도들 앞에서
일어난 공개적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 승천은 주님 재림의 약속과 더불어
성령의 약속까지도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듣게 되는 마르코복음은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사도들과 우리 모두를 복음선포 홍보대사로
위촉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명은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선포(16,15)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부활 메시지 전체는 다른 이를 향한
기쁜 소식의 선포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여인들에게 선포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전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부활 체험과 주님 부활 소식은 선교라는
사명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 후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와 사도신경이 선포하지만,
복음서에서는 마르코만이 전하는 사건입니다.
시편(2편과 110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이 구절을 마르코가 전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확증하고,
그분이 우주의 통치자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다섯 표징으로 보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쫓겨나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손으로 뱀을 잡고 독을 마셔도 무해하며, 병자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이적들이 그 보증입니다.(16,17-18)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위임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당신이 하셨던 귀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부재하면서도 존재하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거리를 극복하고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은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이 표징과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16,20
) 주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크고 대담한 배포를 선물한 듯 보입니다.
기적의 첫째 목적은 기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습니다
. 이제 그들은 교회의 탁월한 본보기로,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선교 사명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근원에 닿아있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선교지가 ‘온 세상’임을 확인합니다.
지역과 대상의 제한 없이 온 세상이 우리의 일터인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말씀의 첫 번째 선포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복음의 증거자입니까? 방관자입니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사명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우리의 존재가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 속에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 삶의 지표를 재정립하는 은총을 빕니다.
-전형천 미카엘 신부-
[한주간 전례]
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어제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낸 우리는
이제 성령 강림 대축일이라는 매우 역동적이고
강렬한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세상을 이겼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승천 사건은 부활의 완성임을 선언합니다.
곧 부활은 죽음을 극복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악과 한계, 어둠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사건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의 완성은 승천뿐만 아니라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독서에서 바오로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한 그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도 받습니다.
성령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는 에페소 신자들의 고백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 성령과 그 역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의 준비는 단순히 이 천 년 전
예루살렘의 이 층 방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데에만 집중하여서는 안 되고,
그 은총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지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불의와 부패,
기만과 폭력에 상처받고
무뎌 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러한 ‘세상의 악을 이기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부활의 승리가 성령의 활동으로
날마다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승리가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한” 듯
늘 두려움과 불안을 붙잡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이기신 분,
바로 그 하느님의 힘을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시는
성령의 강림을 준비하는 벅찬 시간이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로,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유다의 자리를 채우게 된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하여
확실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복음묵상] 요한 15,9-17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전하여 줍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사도로 선출된 마티아를 이야기하면서, ‘사도’가 어떤 사람이고
그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이를 요약하면 일단 사도는,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예수님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증인’이
되기 위하여 요청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함께함’입니다. 함께하면서 보고 듣고
공유한 것이 있어야 증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서는 사도가 되려면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이어야 함을 천명합니다.
독서는, 사도로서의 직무에
실패한 본보기로 유다를 제시합니다.
유다는 분명히 사도들과 함께 “이 직무를 받았”지만,
“제 갈 곳으로 가려고” 이 직무를 ‘내버립니다.’
“내버린 이 직무”를 대신 받으려고 제비를 뽑는데,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됩니다.
독서는 사도를 선발한 방식이 제비뽑기였다고 전하지만,
복음은 이러한 선택이 단순한 요행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의지의 구현임을 분명히 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곧 마티아의 선발은 제비뽑기라는 단순하고 가벼운 듯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사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단호한 의지와 계획이 들어 있던 것입니다.
아무리 찰나의 우연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일은 모든 면에서 섬세합니다. 제비뽑기로 뽑혔어도,
그 안에는 뽑힌 사람이나 뽑은 사람이 모두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할 거대한 하느님의 질서와 섭리가 들어 있던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7,11ㄷ-19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고별 담화’는
이제 남겨진 이들을 위한 ‘고별 기도’로 이어집니다.
늘 함께하였지만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게 될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드리신 ‘마지막 기도’가 오늘 복음의 내용이고,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한 ‘마지막 담화’가 독서의 내용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만큼의 비장함과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와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이 주제들은 그리스 말 본문에 모두
명령형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지켜 주십시오’(보호).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성화). ‘보호’를 청하는 기도에는,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 분열에서
보호하는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지켜 주십시오.’라는 표현과 함께 “이들도 ……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곧 ‘일치’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하고 권고한 뒤, 그들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임을 경고합니다.
내부의 분열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성화’는 하느님께만
속한 존재로 축성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곧 어떤 존재를 거룩하신 하느님과 같은 속성으로 만들어,
그분께 온전히 속하고 장애 없이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복음은 이 성화가 ‘진리이신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곧 우리를 성화시키는 진정한 도구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지막 당부를
우리 삶 안에 구현할 때, 비록 그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존재는 우리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내부의 분열에서 공동체를 보호할 때,
말씀을 통하여 거룩함에 가까이 갈 때,
이를 당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실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7,20-2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일치’에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하나 됨은 사상의 강요나
이념의 주입으로 이루어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
안에 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우리 안에 계시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그 어떤 억지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발적 일치는 어디에서 생길까요?
복음은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 ……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저절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를 무시하고 하나 됨을 강요할 때 나오는 결과가 ‘불일치’이며 ‘분열’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를 고발하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불일치’를 묘사합니다.
바오로를 고발하는 일에는 담합하였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그들은 결국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지고 맙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입장 차이는 격렬하였습니다.
사상과 이념, 원칙과
엄격한 교의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려 주고 그 사랑이 진심임을 믿게 할 때
서로는 상대의 마음 안에 하나 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것이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교회에 하신 당부이고 기도였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무리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십니다.
당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과 함께 주어집니다.
그리스 말에는
‘사랑’을 뜻하는 낱말이 세 개가 있습니다.
격정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호의적 감정과 끌림을 뜻하는 ‘필로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아가페’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는
‘아가파오’(‘아가페’의 동사형)가 쓰이는데, 이 동사를 통하여
‘너를 희생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지’를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필레오’(‘필로스’의 동사형)를 통하여,
예수님을 좋아하고 기쁜 마음으로 따르지만,
아직 자신을 희생할 만큼의 사랑은 아님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큰 사랑인지를 묻는 예수님의 물음과,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는 베드로의 대답이
두 번 되풀이되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물음의 내용을 바꾸십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 라고 옮긴 문장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에는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서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지(‘아가파오’)
물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사랑할(‘필레오’) 뿐임을 고백하자,
세 번째로 당신을 인간적으로는 사랑하는지(‘필레오’) 고쳐 물으신 것인데,
이 상황이 슬픈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필로스’)에서
참된 사랑(‘아가페’)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독서에서 묘사된 바오로처럼, 베드로 또한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21,20-25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이제 지난 7주 동안 계속된 부활 시기가 끝나 갑니다.
독서와 복음도 각 책의 마무리 부분이 봉독되는데,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맨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사도단의 대표들이 부활 시기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요한 복음서의 마지막은 이 책의
저자와 저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두 번이나 되풀이되며
이질감을 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는 이 물음이,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는 데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옮긴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
“그것이 너에게 무엇이냐?”입니다.
주변과의 비교나 경쟁, 불필요한 견제에 휘말림 없이
나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삶의 자세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지만
불안과 공포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는 모범을 누구보다도 훌륭히 실천한 것입니다.
“남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책을 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나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날마다 그날의 말씀을 붙잡고 나의 길을 가는 것,
비교에 휘둘리거나 경쟁하느라 소모되지 않는 것,
내 삶에 집중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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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계절인 오월
각 본당에서는 "성모의 밤"이 진행됩니다.
올 해는 예년보다
코로나의 영향을 받지 않아
많은 신자들의 참여가 예상됩니다.
초 봉헌과 묵주기도
함께 하는 "성모의 밤"을 기대해 봅니다.
-Berar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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