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태복음 7:15-20)
지난 한 주간은 개인적으로 이단, 사이비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넷 들풀교회 게시판에 신천지 글이 올라오고, 어느 회원은 이단사설로 가득한 자기의 홈페이지를 링크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도 품고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제명처리를 했습니다. 저는 감당할 수 있지만, 인터넷 들꽃교회를 찾는 다른 분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이전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시대가 어수선해지니 또다시 이단이 그 틈을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김응교 시인이 회개 없는 성욕망에 빠져있으면서도 교회를 개척하는 전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물신욕망에 빠져 초대형교회를 짓는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 교회세습을 옹호하는 한기총을 비판한 글의 일부도 올라왔습니다.
그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개신교에 대해 염려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들을 비판하지요. 그러면 그 동업자들은 입을 맞추어 “주의 종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던가요? 아니죠. 오히려 구별하라 하셨죠. 예수님은 양의 옷 닮은 하얀 성스런 옷을 입고 성스러운 말로 다가오는 ’노략질하는 이리'를 구별하라 하셨어요. 불교에서 존경받아 마땅한 큰 스님이 있고, 반대로 '땡중'이 있듯이, 개신교에도 존경해야 할 목사님이 계시고 반대로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전혀 예수님 닮지 않은 목사인 척하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말합니다. "비판하지 말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세요"라고요. 판단을 하나님께 남겨두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19~22).
사기꾼들을 꾸짖어야 합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깨닫게 해야 합니다.
옛날에도 이리 떼들이 속여도 용납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노략질하는 이리의 설교를 성실하게 들어주고, 착하게 십일조 내고 헌금 내는 것이 노략질하는 이리를 양산하는 길이 될 수 있어요.
**
한국교회는 이런 면에서 ‘이리 떼’, ‘거짓 선지자’를 양산해 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왜곡했습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신앙인’의 삶이 어떤 삶인지 모르는 이들을 현혹하는 이단들과 사이비들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버젓이 목사라는 직분이나 교회간판이나 기도원 간판을 달고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JMS정명석, 신천지,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뿐 아니라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가짜목사도 많습니다. 그 원천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노략질하는 이리의 설교에 감동하고, 헌금하고, 순종하는 어리석은 교인들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무조건 크면 속된 말로 ‘장땡’입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어디가도 대접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단체들도 거반 다 그렇습니다. 돈 많이 내는 교단, 돈 많이 내는 목사가 모든 자리를 독식하고, 자기 생각대로 이끌어갑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종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오로지 자기들 귀를 만족시켜주는 설교만 좋아합니다. 성경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른 것을 선포해도 자기 생각과 다르면 적대시합니다. 교회의 직분도 섬기는 직분이 아니라 군림하는 직분이 된지 오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인식을 하고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려는 목사도 있고, 교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루터기’를 남겨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시대가 악하므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나쁜 나무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
이번주일의 교회력에 따른 성서본문은 이사야 57:1-19, 시편 34:1-8, 야고보서 2:1-12, 누가복음 14:1-11절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저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이사야 57:15)께서, ‘겸손한 자들,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이들’(누가복음 14:11)을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시편 34:1) 그의 뜻을 이뤄 가신다는 연결성을 보았습니다. ‘겸손’이라는 열매는 우리에게 행동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본문 2장 1절의 말씀에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구체화됩니다.
올해 우리는 67주년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광복은 곧 우리 민족에게는 분단의 시작이었고, 강제징용으로 다른 나라에 끌려갔던 이들에게는 이 나라와 등지고 살아야 하는 세월의 시작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에는 아직도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그곳에서 온갖 차별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어떠합니까? 동남아 등지에서 돈 좀 벌어보겠다고 온 이주민 노동자들, 혈육도 없는 나라에 팔려오다시피 시집을 온 이주민 여성들, 한 민족이었던 조선족을 또 얼마나 차별하고 있습니까?
이런 문제들은 그냥 사회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결해야할 문제들입니다.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던 하나님의 동산인 창조세계의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의 문제, 환경의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인들과 구조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혹은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려면, 그런 현상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떠합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 세상이야기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라고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세상과 동떨어진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문제들을 등한시하거나 혹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인 냥 호도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이단과 사이비가 판을 치고, 거짓 선지자가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그 분별하는 기준 하나,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지 아닌지를 보십시오.*
지난 한 주간은 개인적으로 이단, 사이비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넷 들풀교회 게시판에 신천지 글이 올라오고, 어느 회원은 이단사설로 가득한 자기의 홈페이지를 링크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도 품고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제명처리를 했습니다. 저는 감당할 수 있지만, 인터넷 들꽃교회를 찾는 다른 분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이전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시대가 어수선해지니 또다시 이단이 그 틈을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김응교 시인이 회개 없는 성욕망에 빠져있으면서도 교회를 개척하는 전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물신욕망에 빠져 초대형교회를 짓는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 교회세습을 옹호하는 한기총을 비판한 글의 일부도 올라왔습니다.
그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개신교에 대해 염려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들을 비판하지요. 그러면 그 동업자들은 입을 맞추어 “주의 종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던가요? 아니죠. 오히려 구별하라 하셨죠. 예수님은 양의 옷 닮은 하얀 성스런 옷을 입고 성스러운 말로 다가오는 ’노략질하는 이리'를 구별하라 하셨어요. 불교에서 존경받아 마땅한 큰 스님이 있고, 반대로 '땡중'이 있듯이, 개신교에도 존경해야 할 목사님이 계시고 반대로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전혀 예수님 닮지 않은 목사인 척하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말합니다. "비판하지 말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세요"라고요. 판단을 하나님께 남겨두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19~22).
사기꾼들을 꾸짖어야 합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깨닫게 해야 합니다.
옛날에도 이리 떼들이 속여도 용납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노략질하는 이리의 설교를 성실하게 들어주고, 착하게 십일조 내고 헌금 내는 것이 노략질하는 이리를 양산하는 길이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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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이런 면에서 ‘이리 떼’, ‘거짓 선지자’를 양산해 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왜곡했습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신앙인’의 삶이 어떤 삶인지 모르는 이들을 현혹하는 이단들과 사이비들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버젓이 목사라는 직분이나 교회간판이나 기도원 간판을 달고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JMS정명석, 신천지,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뿐 아니라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가짜목사도 많습니다. 그 원천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노략질하는 이리의 설교에 감동하고, 헌금하고, 순종하는 어리석은 교인들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무조건 크면 속된 말로 ‘장땡’입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어디가도 대접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단체들도 거반 다 그렇습니다. 돈 많이 내는 교단, 돈 많이 내는 목사가 모든 자리를 독식하고, 자기 생각대로 이끌어갑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종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오로지 자기들 귀를 만족시켜주는 설교만 좋아합니다. 성경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른 것을 선포해도 자기 생각과 다르면 적대시합니다. 교회의 직분도 섬기는 직분이 아니라 군림하는 직분이 된지 오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인식을 하고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려는 목사도 있고, 교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루터기’를 남겨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시대가 악하므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나쁜 나무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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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일의 교회력에 따른 성서본문은 이사야 57:1-19, 시편 34:1-8, 야고보서 2:1-12, 누가복음 14:1-11절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저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이사야 57:15)께서, ‘겸손한 자들,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이들’(누가복음 14:11)을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시편 34:1) 그의 뜻을 이뤄 가신다는 연결성을 보았습니다. ‘겸손’이라는 열매는 우리에게 행동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본문 2장 1절의 말씀에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구체화됩니다.
올해 우리는 67주년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광복은 곧 우리 민족에게는 분단의 시작이었고, 강제징용으로 다른 나라에 끌려갔던 이들에게는 이 나라와 등지고 살아야 하는 세월의 시작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에는 아직도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그곳에서 온갖 차별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어떠합니까? 동남아 등지에서 돈 좀 벌어보겠다고 온 이주민 노동자들, 혈육도 없는 나라에 팔려오다시피 시집을 온 이주민 여성들, 한 민족이었던 조선족을 또 얼마나 차별하고 있습니까?
이런 문제들은 그냥 사회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결해야할 문제들입니다.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던 하나님의 동산인 창조세계의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의 문제, 환경의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인들과 구조적으로 얽혀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혹은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려면, 그런 현상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떠합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 세상이야기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라고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세상과 동떨어진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문제들을 등한시하거나 혹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인 냥 호도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이단과 사이비가 판을 치고, 거짓 선지자가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그 분별하는 기준 하나,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지 아닌지를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