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8일(주현 후 첫째 주일)
폭풍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음성
시편 29:1~11
오늘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폭풍우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오셨다면, 예배하는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안식하십시오. 지난주에 새해 덕담으로 드린 말씀 중 ‘지금 여기에 몰입하십시오.’라는 권고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상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은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몰입하지 못하고, 몸은 여기에 있지만 여전히 세상이라는 풍랑에 우리의 눈과 귀를 내맡긴다면 우리의 생각이 세상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시길 바랍니다.
■ 제임스 웹 망원경
2021년 12월 25일, 나사는 제임스 웹 망원경을 발사했습니다.
1990년 발사했던 허블망원경도 우주의 신비를 밝혀내는데 굉장한 역할을 했지만, 제임스 웹 망원경은 그것을 능가하는 망원경입니다. 지구에서 150만km 떨어진 관측지점에 도착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우주의 모습을 지구로 전송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느 디지털 은행 광고에 제임스 웹 망원경으로 촬영한 영상으로 광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해당 광고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덕분에 그동안 몰랐던 우주의 모습을 발견했듯이 기업이 고객이 알지 못하던 다양한 서비스와 혜택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주겠다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망원경이 존재하기 전에 우리가 보던 저 별들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예, 있었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빛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리도 그렇습니다.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하지만, 지구가 돌아가는 것처럼 큰 소리도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만일,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면 고막이 파열되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신비도 이런데 절대 신비, 절대자, 진리,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절대 신비와 진리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본 사람들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이른 바 ‘무지의 지’입니다.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
시편 29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오경웅은 시편사색에서 시편 29편의 제목을 ‘하늘의 소리’로 붙였습니다. 하늘의 소리가 들려오긴 들려오는데 폭풍 속에서 들려오고, 하나님의 위엄이 한없이 빛나고, 하나님의 향기가 흩날리는데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입 다물고 있을 수 없어 어린아이처럼 찬양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다보니 ‘이것이다, 저것이다’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다, 저것이다!’규정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동양사상의 진수인 도덕경 1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라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와 상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언어로 다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닌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9편의 시인 다윗이나, 이것을 해석한 오경웅이나 폭풍 뒤에 있는 ‘하늘의 소리와 빛과 향기’를 듣고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것보다, 다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신앙이야말로 진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폭풍 혹은 지진과 홍수’라는 현상 너머에 있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 알면 알수록 모호해지는 진리
진리는 알면 알수록 모호해집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잘 여물지 못했던 젊은 신학교 시절에는 하나님이 너무도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고 규정하니 나의 신앙적인 행위도 분명해서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것의 장점도 물론 있었지만, 돌아보니 하나님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목회를 하다 보니 성령 받았다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만 최고로 알고, 다른 사람의 은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목사인 저에게도 신앙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회개하라하고, 사탄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신앙은 사실, 초짜신앙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자라 단맛의 정수인 초콜릿을 처음 먹고 단맛에 놀라는 것과 흡사합니다. 어릴 때에는 단맛이 좋지만, 나이가 들면 쓴맛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그렇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는 너무 분명한데, 가면 갈수록 모호해지고, 모호하지만 가던 길을 돌이킬 수 없게 하는 그 묘한 신비가 있습니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를 지탱해온 힘이 ‘신비주의 영성가’들에게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늘 모호했지만, 그 모호한 고백들은 수많은 신앙의 결단을 맺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때론 내가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서있고,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지 모호하다고 해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본래, 진리의 길은 그런 것입니다.
■ 풍랑 속 주님의 음성
시편 29편은 창조시라고 해야 할 정도로 자연현상을 예로 들어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거룩한 옷’이라는 표현이 회개를 의미합니다. ‘우렛소리, 풍랑, 레바논의 백향목과 산맥, 광야, 숲’이 모든 것은 ‘자연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천둥번개가 치고, 풍랑이 일고, 지진이 나고, 번갯불이 치고, 숲이 다 타버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그분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영광!”하고 외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그런 자연적인 재해 앞에서 안전하기 때문에 외치는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 모인 사람들,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현상에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기 때문에 “영광!”이라고 찬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성전 밖에 있는, 즉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현상만 보기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성전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때론 우리 삶에 풍랑과도 같은 상황이 올지라도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음성을 듣는 이들은 시편의 시인이 풍랑 속에서도 “영광!”을 외쳤듯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예기치 않는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억하고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립니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
시편 29편은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시편의 시인처럼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일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통로는 크게 보면 ‘자연, 성서, 일상’입니다. 오늘날, 성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하는 일들은 넘쳐납니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신학서적들과 성서 번역본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통해서, 일상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는 일은 퇴보했습니다. 도시의 삶은 더더욱 자연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게 함으로써, 자연의 신비를 보지 못하게 하고, 그에 대한 고마움조차도 잊고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 회복해야할 영성
우리는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인문학적인 소양을 키워야 합니다. 인문학은 인간사에 관한 책입니다.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일 수도 있고, 심리학 혹은 철학책일 수도 있으며, 역사, 경제학 서적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타종교의 경전도 포함됩니다. 어떤 분들은 “성서를 알기 위해서는 성서만 읽는다!” 하시기도 하지만, 그렇게 성서를 읽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사도 모르면서 성경에 나오는 인간의 이야기를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서의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성장하고 몰락하는 과정이 세세하게 기록된 것이 성서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자연을 통해서, 일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일상과 자연, 소소한 것들조차도 그냥 스쳐 보내지 마시고, 깊게 바라보십시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
풍랑이는 것과도 같은 세상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평정하시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풍랑 속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보며 “영광!”을 외쳤던 이들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1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신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고, 그분을 볼 수도,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를 가늠하여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상만 보고 좇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현상 너머의 것들을 보고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런 멋진 삶을 살아가시어 때론 삶의 풍랑이 일지라도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창조주 하나님, 늘 우리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심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다 깨닫지 못하지만,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자연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의 삶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범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멋진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옵소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깊이 마음 깊이 새기고 현상 너머의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