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 일본 장군 사야가
사야가는 임진왜란 때 왜국 선봉의 우군장이었다.그는 1517년 일본의 해안 마을해정에서 낳아 71세를 살았다.사야가는 임진년인 1592년 3월 13일 22세의 젊은 나이에 왜군 선봉장인 기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군장으로 부산 동래에 상륙했다.그때 사야가는 너무도 아름다운 조선 나라에 이유도 없이 침략해서 마구 살륙하는 왜군들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무기인 조총을 던져버린다.그리고 장군은 측근들과 상의를 해서 당시 경상 병마 절도사인 박진 장군에게 투항을 한다.
이어서 장군은 고향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화포의 조총공장에서 익힌 기술을 우리의 권률 장군과 조선 정부에 건의해서 준비없이 밀리기만 하던 조선군을 왜군과 같은 위치로 만들어주엇다.사야가 장군은 조선군에게 향하던 총부리를 아군인 일본군에게 돌려서 많은 공적을 쌓앗다. 병자호란 때에 장군은 출전해서 청국군을 격퇴하는데 한몫을 했다.자라에서는 이 일본군 장군을 조선인으로 받아들여서 김충선(金忠善)이라 이름을 주고 본관을 김해로 만들엇다.지금 그 후손들이 경북 달성군 기장면 우록리에 2천여가구가 살고있고 김해 김씨 경인공파(敬人公派)로서 전국에 20여만명이 살고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의 두 장수 가등청정과 소서행장(小西行長), 한 사람은 불교신자였고 한 사람은 천주교 신자였다. 두 사람은 생각과 행동이 전혀달랏다. 가등청정은 사납고 난폭한데 비해 소서행장은 성품이 온화하고 평화주의자였다. 소서 행장은 원래 무사가 아니라 무역업에 종사하던 상인이엇다. 그는 허술한 조선군을 살륙하는 것이 천주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고 조선군에게 싸움에 이길 방법을 전수해주었다. 이 사실은 일본 작가 엔도 슈사꼬의 숙적(宿敵)이란 저서에 나온다. 나중에 소서행장은 도꾸가와 막부에 반대했다고 자결을 하게 만드는데 그는 천주교 신자라서 자결은 죄가 된다면서 무사가 칼로 목을 쳐 죽였다.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육종학의 권위자였다. 그러나 그이 가계를 보면 민비 난자 사건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길을 안내한 우범선의 자식으로서 후에 일본으로 도망해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우박사를 낳았다. 우박사는 후에 일본여인과 결혼했다. 말하자면 그는 반쪽 한국인이었다.부모의 조국인 한국에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조국의 치졸한 농업기술을 혁신ㅇ시키고저한 사람이었다
일제때 독립애국자를 변호한 유일한 일본인 변호사가 있다. 후세변호사가 그이다. 그는 일본관계로부터 매국노란 질타를 받으면서 조선인 변호사도 꺼리는 독립군 변호를 했다.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갖는 최상의 훌륭함이고 신이 가장 사랑하는 덕목이다.그것은 국가의 이익을 떠난 인간의 기본적인양심이다.
일본을 편들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지금 문씨 일당의 횅패를 보면 참으로 세계 양심의 기준에서 한층 멀어진 칼로 무베듯하는 위험한 정책에 노파심을 갖게 된다.일본국민들이 악당들이 아니라 일본 국민들을 선동해서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요 군부 악당들이 문제이다.일본을 가보라 그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지.문씨는 자신의 생각이 마치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할지 모르나 어림없는 일이다.막바지 몸부림을 치고있다.미국정부는 대한민국과 문씨를 분리해서 생각한다.한마디로 아베는 일본 국민에게 애국자이지만 문씨는 한국국민에게 반역자 소리를 듣는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