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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힐 소설경(維摩詰所說經) (무비 스님 강설)
一. 불국품
1. 육성취(六成就)
2. 보살대중의 덕행
1), 보살대중의 덕행
菩薩은 三萬二千이며 衆所知識이라 보살들은 3만 2천명이며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다 잘 아는 이들이다.
강설 ; 비구스님들은 법문을 듣는 대중으로서 부처님을 항상 따라다니는 이들이다. 그러나 보살들은 대승경전에만 등장하는데 그 수효도 적지 않다. 알고 보면 세상은 온통 대승보살의 세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들의 덕행도 세상에서 아주 빼어난 분들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으면 다 잘 아는 분들이다. 장황하리만큼 그들의 덕행에 대해서 찬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덕행은 법문을 듣는 보살들만의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불자들이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 실천해야할 덕목들이다.
大智本行을 皆悉成就하니 諸佛威神之所建立이라 큰 지혜의 근본 수행을 모두 다 성취하였으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의 위신력(威神力)으로 건립된 것이다.
강설 ; 보살이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자신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만큼이라도 남을 위해서 온갖 방면으로 베풀고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 유마경에서는 먼저 큰 지혜, 즉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는 것을 가장 근본이라고 하였다. 지혜는 불교의 근본이며 보살도의 근본이다. 그 또한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당겨주고 밀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의 큰 근본은 지혜다. 자비도 지혜가 갖추어진 뒤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큰 지혜의 근본 수행” 이라고 표현하였다.
爲護法城하야 受持正法하며 법의 성곽을 잘 보호하여 정법을 받아 지닌다. 강설 ; 법회에 모인 보살들은 또한 법의 성곽을 잘 보호해서 정법을 받아 지킨다고 하였는데 이 일이야말로 불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한다. 수십 년 불교 안에서 몸담아 오면서 어떤 이가 불법을 해치는데도 그것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없다면 그는 불자가 아니다. 외도며 마군이다. 그리고 불교를 말할 때는 반드시 정법으로서 가르쳐야 한다. 온갖 삿된 법과 기만하는 말과 혹세무민하는 말을 하면서 그것을 불교라고 한다면 함께 지옥에나 떨어질 일이다. 정법만이 불교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2). 이름은 시방에 알려지고
能師子吼하야 名聞十方하며 능히 사자후를 부르짖어 그 이름이 시방에 두루 알려졌다.
강설 ; 석가세존은 왜 지금까지 세상에 두루 알려졌는가. 문수 보현 관음 지장은 또 어떻게 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가. 오직 사람들의 미혹한 마음을 일깨우는 진리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단돈 만원이나 밥 한 그릇 베푼 적이 없다. 다만 모든 존재의 바르고 참된 이치를 사람들에게 깨우쳐 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시주[大施主]가 된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설법을 왜 사자후라고 하는가. 참되고 바른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삿된 소견과 잘못된 견해들을 모두 두렵게 만들고 깨뜨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 온갖 짐승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거나 도망을 가는 것과 같다.
衆人不請이로대 友而安之하며 여러 사람들이 청하지 않더라도 벗이 되어 그들을 편안하게 해 준다.
강설 ; 유마경에는 주옥같은 명구가 많다. 여기에 나오는 불청지우(不請之友)도 그중에 하나다. 사람들은 대개 가까운 사람, 또는 친한 사람, 인연이 깊은 사람들만 찾아서 함께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고자하는 보살들은 설사 누가 청하지 않더라도, 또한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우정 그에게 다가가서 벗이 되어준다. 벗이 되어주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깨우치고 배려하고 보살피며 그들을 다방면으로 도우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준다. 예컨대 세계에서 제일가는 구호단체인 <자제공덕회>를 이끌어 가는 대만의 증엄(證嚴,1937년 5월 4일생)스님은 기독교인들에게까지 교회를 지어주어 편안하게 예배를 볼 수 있게 해 준 사람과 같은 경우다.
3). 삼보를 이어서
紹隆三寶하야 能使不絶하며 삼보의 전통을 이어서 능히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
강설 ; 보살은 책임이 크다. 부처님이 세상에 영원히 계시도록 해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또한 영원히 이 땅에 머물게 해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보살의 의무며 책임이다. 세상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이 되게 하려면 반드시 성현들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야 한다.
降伏魔怨하고 制諸外道하며 마귀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들을 항복받으며 모든 외도들을 제압한다.
강설 ; 마귀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와 외도들을 항복하고 제압한다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고 바르게 수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도적을 잡으려면 먼저 도적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하듯이 마귀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와 외도들은 자신 이외의 장소에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백수의 왕인 사자는 어떤 짐승도 싸워서 이길 수 없는데 다만 사자의 몸에서 생긴 벌레가 사자를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든다. 그와 같이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지 남이 아니다. 따라서 불교를 무너뜨리는 것은 다른 종교인이 아니다. 다름 아닌 불교인이다. 마귀와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들과 외도들은 모두 자신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항복받고 제압해야 한다.
4). 덮고 속박하는 번뇌
悉已淸淨하야 永離蓋纏하며 모든 면이 청정해서 심성을 뒤덮어 어둡게 하는 번뇌[蓋]와 사람을 속박하여 부자유 하게하는 번뇌를[纏] 영원히 떠났다.
강설 ; 번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탐심, 진심, 치심에서부터 심지어 8만4천 번뇌까지 말한다. 여기에서 “심성을 뒤덮어 어둡게 하는 번뇌[蓋]”란 다섯 가지가 있다. 1) 탐욕. 2) 진에. 3) 수면. 4) 마음이 들떠서 악을 짓는 것[掉擧惡作]. 5) 의심이 그것이다. “사람을 속박하여 부자유 하게하는 번뇌[纏]”란 열 가지가 있다. 1) 남이 잘한 일이나 훌륭한 사람을 공경할 줄 모르고 오히려 꺼리고도 부끄러움이 없음[無慚]. 2) 자신의 잘못을 남이 알아도 부끄러움이 없음[無愧]. 3) 질투. 4) 인색함. 5) 후회함. 6) 수면. 7) 들뜬 마음. 8) 혼침(昏沈). 9) 분노. 10) 자신의 허물을 덮어버림 등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몹쓸 번뇌를 영원히 떠나버렸다.
5), 해탈의 경지에 편안히 머물면서
心常安住無碍解脫하야 念 ․ 定 ․ 總持와 辯才不斷하니라 마음은 항상 걸림이 없는 해탈의 경지에 편안히 머물면서 바른 기억과 바른 선정과 선한 일을 모두 가지는 것과 변재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강설 ; 보살의 마음자세다. 보살은 스스로 걸림이 없는 해탈에 머물러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유롭게 자비를 구사할 수 있다. 자신이 속박되어 있다면 남을 해탈 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해탈이 우선이며 다음은 바른 기억과 바른 선정과 선한 일을 모두 가지는 총지와 변재가 끊어 지지 않아야 한다. 보살의 조건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진다.
布施 ․ 持戒 ․ 忍辱 ․ 精進 ․ 禪定 ․ 智慧와 及方便力이 無不具足하야 逮無所得하니라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와 방편과 힘이 모두 다 갖추어 져서 얻을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
강설 ; 보살의 실천 덕목이며 모든 불자의 실천 덕목이 소개되었다. 보살의 덕행을 찬탄하는데 반드시 있어야할 여덟 가지 조건들이다. 6바라밀에서 방편과 힘이라는 두 가지가 더해졌다.
6), 깨달음을 얻은 편안한 마음[法忍]
不起法忍하고 已能隨順하야 轉不退輪하며 참다운 깨달음을 얻은 편안한 마음[法忍]에서 일어나지 않고, 능히 중생들을 수순해서 물러서지 않게 하는 법륜을 굴린다.
강설 ; 보살들이 중생을 교화할 때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떠나서 중생들의 현실에만 맞추어 가르친다면 그것은 중생과 뒤섞여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보살이 도리어 중생이 되고 만다.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지옥에 가고, 축생에 가고, 아귀에 가더라도 보살은 항상 깨달음의 경지에 머문 상태로 교화하여야 한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은 깨달음의 자리인 보리수 아래에서 일어나지 않고 일곱 곳에 법석을 펼쳤다.”고 하였다.
善解法相하야 知衆生根하며 여러 가지 가르침의 특질들[法相]을 잘 알고 중생의 근기를 잘 안다.
강설 ;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데 먼저 반드시 갖추어야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가르침의 특질들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소승법과 대승법과 연기법과 공의 이치와 일심의 내용과 비밀불교와 선불교와 부처님의 생애와 불교의 역사까지 이 모든 것들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람들의 성향과 속성과 근기와 수준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포교를 하거나 법을 설하려면 먼저 불교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며 불자의 덕목이다.
7), 잘 생긴 모습으로 몸을 장엄하여
盖諸大衆하야 得無所畏하며 모든 대중들의 으뜸이 되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보살은 흔히 표현하기를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대중들의 모임이나 단체에 나가더라도 그들 중에 으뜸이 되고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 만약 교화하려는 사람들 보다 덕이 부족하고 법이 모자란다면 주눅이 들어 법을 설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어찌 부처님의 법을 당당하게 설할 수 있겠는가. 보살로서 당연히 갖추어야할 사항이다.
功德智慧로 以修其心하며 相好嚴身하야 色像第一이라 捨諸世間所有飾好하며 공덕과 지혜로써 그 마음을 닦고, 잘 생긴 모습으로 몸을 장엄하여 그 얼굴 그 모습은 제일이어서 세간의 화장과 꾸미는 것들은 모두 버렸다.
보살의 몸과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밝혔다. 평소에 온갖 공덕을 두루 닦았으며 지혜도 또한 빼어났다. 부처님을 두 가지가 만족한 분이라고 부르는데 그 두 가지란 복덕과 지혜다. 여기서 공덕이란 복덕과 다르지 않다. 불교수행의 목적도 실은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불자는 복을 많이 짓고 공덕을 많이 닦아서 유루(有漏)복이든 무루(無漏)복이든 무한히 많아야 한다. 빈궁하고 천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법을 설하면 먹혀들겠는가. “너나 잘하세요.”가 되고 만다. 보살은 외모도 잘 생겨야 한다. 누구와 비교를 해도 빠지지 않아야 한다. 굳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성형수술이나 화장이나 의상이나 패물로써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도 환희심이 나는 얼굴이어야 한다. 부처님이나 보살들은 못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견물생심이니 상견중생(相見衆生)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의 속성은 먼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8), 깊은 믿음은 견고해서 마치 금강과 같다.
名稱高遠하야 踰於須彌하며 고명한 이름은 높고 높아 멀리까지 들리어 저 수미산을 넘어간다.
사람이 유명해 지는 데는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하고 법력이 있어야 하고 덕화가 있어야 한다. 세상을 선도하는 보살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수미산보다도 더 높아 널리 알려져 있다. 명성이 있는 사람의 말은 보통 이름이 없는 사람의 말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어서 효과가 더 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深信堅固하야 猶若金剛하며 깊은 믿음은 견고해서 마치 금강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은 금강, 즉 다이아몬드다. 다이아몬드를 조각할 때는 다른 물질로는 깎을 수 없다고 한다. 오직 다이아몬드로만 조각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깊이 믿는 마음이 견고하기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가치와 그 존엄성을 부처님으로 굳게 믿기를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믿는다면 그의 인격은 불문가지다. 진정한 보살이다.
9), 가르침의 보물로 널리 비취고
法寶普照하야 而雨甘露하며 於衆言音에 微妙第一이며 가르침의 보물로 널리 비취고 감로의 법문으로 비를 내리어 많고 많은 말 중에 제일 미묘하니라.
세상에는 보물이 많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세 가지 보물을[三寶] 말한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 모두가 세상에는 둘도 없는 보물이라고 한다. 아무리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고 모든 건물과 아파트들을 황금으로 지었다 하더라도 부처님과 같은 훌륭한 스승이 없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이 없고, 그 가르침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이 없어서 세상이 온통 갈등과 분노와 시기질투와 미움으로 가득하다면 그 황금으로 지은 집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사람이 이룩한 모든 것은 일체가 행복하기 위한 방편이요 도구다. 그러므로 행복의 가르침, 해탈의 가르침은 보물 중에 보물이다. 그래서 법보(法寶)라 한다. 달디 단 이슬이라 한다. 세상의 온갖 말 중에서 제일 미묘하고 아름답다.
10), 연기의 이치에 깊이 들어가서
深入緣起하야 斷諸邪見일새 有無二邊에 無復餘習하며 연기의 이치에 깊이 들어가서 모든 삿된 견해를 다 끊고, 있음과 없음의 두 가지 치우친 곳에 더 이상의 다른 물듦이 없다.
법회를 장엄하며 한편 법문을 듣기 위하여 모인 보살대중들의 덕행을 자세히 밝히는 내용이다.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를 보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치 중에 가장 중요한 연기(緣起)의 이치에는 누구보다도 밝아야 하리라. 연기란 무엇인가. 세계 안에 있는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의 상태와 운동에 대하여 원인[因]과 조건[緣]과 결과[果]의 관계성을 뜻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즉 성도(成道)나 성불(成佛)의 내용은 곧 연기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라고 하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연기의 원리는 하나의 원인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이나 세상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운명론적인 해석을 부정한다. 모든 사물과 사태에는 일정한 원인과 조건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며[無常],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지닐 수 없다[空]. 이 법칙은 객관적인 사실이며, 어떠한 예외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틀이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되어 나타난 초기불교의 연기론이 무명(無名)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등 12개의 범주로 이루어지는 12지연기(十二支緣起)이다. 연기론은 시대와 학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연기론은 특히 업(業)의 사상과 결합하여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로 나타났다. 이것은 중생의 생사유전(生死流轉)이 모두 자신의 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외에도 뢰야(賴耶)연기, 진여(眞如)연기, 법계(法界)연기 등이 있다. 또한 12지연기를 과거 · 현재 · 미래에 적용하여 무명과 행을 과거에 배당하고, 식에서 유까지를 현재에 배당하며, 생과 노사를 미래에 배당하여 시간적 · 태생학적(胎生學的)으로 해석한 삼세양중인과론(三世兩重因果論)이 성립하기도 했다.
대승불교에서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개조인 용수(龍樹)는 연기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이로부터 공의 사상을 이끌어냈다. 즉 모든 존재는 연기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은 어떠한 존재도 타자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자성(自性)을 결여한 공한 존재이다. 사람을 위시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사건을 이 연기의 원리로 보는 견해는 바른 견해이다. 이와 같지 않고 달리 보는 것은 삿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연기의 이치에 깊이 들어가서 모든 삿된 견해를 다 끊는다.”라고 하였다. 연기의 이치를 제대로 알면 모든 것에 “있음과 없음의 두 가지 치우친 곳에 더 이상의 다른 물듦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의 이치를 아는 일은 보살의 기본일 뿐만 아니라 불교를 믿는 보든 사람들의 기본상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기의 이치를 알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갖게 된다. 연기라는 열쇠에는 열리지 않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11), 사자후
演法無畏가 猶獅子吼하며 其所講說이 乃如雷震하야 無有量이며 已過量이라 법을 연설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것은 마치 사자후와 같고, 법을 강설하는 바는 마치 우레와 같아서 한량이 없으며 이미 그 양을 초과하였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길은 참되고 바른 이치를[法] 강설하는 일이다. 설법, 연설, 강설, 강의 등이 모두 같은 의미인데 사자가 포효하듯이 당당하게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뜩이듯이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여야 한다.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그 뜻을 소화하여 깊이 감동한 뒤라야 남을 감동시틸 수 있다. 이 경전에 등장하는 보살들은 설법을 하는 분야에서는 무한역량을 지닌 분들이다. 그래서 그 능력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정도다.
12), 법의 보물을 모으는 것은
集衆法寶하야 如海導師하며 여러 가지 법의 보물을 모으는 것은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훌륭한 선장과 같다.
보살은 법을 설하여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은 본래의 의무다. 그 의무를 다하려면 우선 법을 잘 알아야 한다. 무수한 수준과 근기들을 다 제도하려면 무수한 법의 이치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8만 4천 근기에 8만 4천 법문이라 하지 않던가. 참선이면 참선, 염불이면 염불, 경전이면 경전, 심지어 사주와 관상까지도 필요에 따라서는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야 바다를 항해하는데 훌륭한 선장과 같이 세상의 배를 훌륭히 저어 일체 중생을 저 언덕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了達諸法의 深妙之義하야 善知衆生往來所趣와 及心所行하야 모든 법의 깊고 오묘한 뜻을 잘 통달하여, 중생들이 가고 오고 나아가는 곳과 마음의 흘러가는 바를 잘 안다.
보살이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모든 법의 깊고 오묘한 뜻을 잘 통달하고 중생들의 죽고 사는 일과 죽은 뒤에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중생들의 마음의 움직임과 그 성향과 욕망과 취향까지 세세하게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남을 제도할 수 없다.
13), 열 가지 힘 등
近無等等의 佛自在慧와 十力無畏와 十八不共이며 누구와도 대등함이 없는 부처님 자재한 지혜와 열 가지 힘과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특별한 법[不共]에 가까이 하였다.
부처님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無比], 누구와도 대등함이 없는 분[無等等], 저절로 그러-히 깨달으신 분[自然覺者], 세간을 초월한 바른 지식을 가진 분[超世正知], 지혜의 바다[智海]등으로도 표현한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능력 중에 뛰어난 지혜를 가졌다는 의미가 가장 크다.
열 가지 힘[十力]이라는 것도 역시 지혜의 힘이다.
①,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도리와 이치가 옳고 그른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②,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일체중생의 삼세 업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여러 가지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④,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⑤,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중생의 여러 가지 지해(知解)를 아는 지혜의 힘. ⑥,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의 힘. ⑦,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아는 지혜의 힘. ⑧,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숙명통으로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아는 지혜의 힘. ⑨, 사생지력(死生智力), 천안통으로 중생이 죽어서 태어날 때와 선한 곳과 악한 곳을 걸림 없이 아는 지혜의 힘. ⑩, 누진지력(漏盡智力), 온갖 번뇌와 습기를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의 힘.
부처님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어떤 악한 사람을 만나거나 설법을 하더라도 전혀 의심하거나 두려울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이다. 자세히 말하면 사무소외(四無所畏)가 있다. ①,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 깨달아 정각에 오르는데 두려움이 없다, ②,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 온갖 번뇌를 끊어 두려움 없다. ③,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 설법하는데 비난을 받는 장애가 있어도 두려움 없다. ④,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 고통을 끊어 해탈에 이르는 사제와 팔정도를 설하는데 장애가 있어도 두려움이 없다.
열여덟 가지 특별한 법[十八不共法]이란 부처님께만 있는 열여덟 가지 공덕법이다. 이승이나 보살에게는 공통되지 아니하므로 불공법이라 한다. ①, 몸이 실수가 없고, ②, 입이 실수가 없고, ③, 생각이 실수가 없고, ④, 두 가지 생각이 없고, ⑤, 선정을 여읜 마음이 없고, ⑥, 알고서 버리지 않는 것이 없고, ⑦,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감함이 없고, ⑧, 정진이 감함이 없고, ⑨, 억념함이 감함이 없고, ⑩, 지혜가 감함이 없고, ⑪, 해탈이 감함이 없고, ⑫, 해탈지견이 감함이 없고, ⑬, 온갖 몸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⑭, 온갖 말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⑮, 온갖 뜻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⑯, 지혜로 지나간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⑰, 지혜로 이 다음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⑱, 지혜로 지금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는 것들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여래의 경지에 거의 가까워 졌다는 것은 큰 덕행이다.
14), 악한 갈레의 문들을 다 막아버렸으나
關閉一切諸惡趣門하되 而生五道하야 以現其身하며 일체의 모든 악한 갈레의 문들을 다 막아버렸으나 다섯 갈레의 길에 태어나서 그 몸을 나타낸다.
보살에게 악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악도의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우정 악도에 몸을 나타내야 한다. 지장보살이 자신에게 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지옥에 가서 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스스로 서원하기를,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섯 갈레[五道]란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지옥의 삶을 살기도 하고, 아귀가 되기도 하고, 축생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하루에도 온갖 곳을 윤회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15), 큰 의사가 되어
爲大醫王하야 善療衆病하되 應病與藥하야 令得服行하며 큰 의사가 되어 온갖 병을 잘 치료하는데 병에 맞추어 약을 주어 잘 복용하도록 한다.
부처님과 관음보살을 훌륭한 의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세상의 사표인 보살은 당연히 세상 사람들의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을 모두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불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중생들의 갖가지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불교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응병여약(應病與藥)하는 종교라고 한다. 유마경의 명언 중에 하나다.
16),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고
無量功德을 皆成就하고 無量佛土를 皆嚴淨하야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고 한량없는 국토를 다 청정하게 장엄한다.
불교적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보살로 사는 삶이다. 보살로 사는 삶이란 우선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여야 한다.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려면 자나 깨나 일체공덕을 모두 모두 다 닦고 지어야 한다. 보살이 지은 공덕으로 세상을 청정하게 장엄하게 된다. 신라 선덕왕 때 석장사에 살았던 양지(良志) 스님은 재주가 뛰어나서 영묘사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을 조성하였고 법당과 목탑의 기와 무늬도 새겼다. 또 천왕사의 목탑 밑에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삼존불과 좌우 금강역사도 조성하였다. 이러한 많은 불사를 하면서 함께 동참하여 흙을 나르고 기왓장을 운반하는 수많은 승속들에게 양지스님이 향가를 지어 부르게 하기도 하였는데, 그때 부른 향가는 불교의 인생관과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을 잘 표현하였다. 일종의 노동요와 같아서 매우 짧지만 뜻은 충분히 담겨있는 향가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이렇게 단 다섯 개의 낱말에 네 줄 뿐이지만 인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 영원히 온다는 불교적 삼세관(三世觀)과 이 세상에 와서 보면 인생은 서러운 것[苦海, 火宅]이라는 사실과 그 서러운 현실은 우리 모두가 다 같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서러운 현실이지만 미래를 위해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 부지런히 공덕을 닦으며 살아야 한다는 불교적 인생관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다. 불교는 한마디로 공덕을 닦으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내가 닦는 공덕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나아가서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17), 보고 듣는 사람이 다 이익을 얻고
其見聞者가 無不蒙益하고 諸有所作을 亦不唐捐하야 如是一切功德을 皆悉具足이니라 보고 듣는 사람들은 다 이익을 얻고 모든 하는 일들은 또한 헛되지 않아 이와 같은 일체공덕을 모두 모두 구족하였다.
이러한 보살은 그를 보는 사람도 그의 이름을 듣는 사람도 모두 이익을 얻게 된다. 그를 예배하고 공양하고 공경하면 역시 큰 공덕이 되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유마경을 설하는 법석에 모여 법문을 듣는 보살들의 그 덕행은 위에서 길게 설명한 바와 같다. 법문을 들으려고 모인 대중들의 수준을 보면 어떤 수준의 설법이 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가 있다. 설법은 언제나 청중들의 근기와 수준을 잘 살펴서 이익이 되도록 해야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는 설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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