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황금률은 유명한데 공자의 손자 자사가 썼다는 <중용>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은 부덕이라는 양극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라면서 예를 들어
용기는 비겁함과 조급하고 경솔함 중간이 위치하며 너그러움은 방탕함과 비열함 중간에 위치하고 고유한 자긍심은 허영심과 겸손 중간에 위치하며 기지 또는 재치있는 위트는 익살과 상스러움 중간에 위치하고 겸손하고 소박함은 수줍어함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함 중간에 위치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윤리는 오늘날 우리가 주장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고 정의는 평등이 실현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에게 있어 정의란 평등한 상태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분배proportion가 이루어질 때 가능한데 바른 분배란 때에 따라서는 불평등할 수가 있다.
불평등하기 때문에 정의가 가능한 경우를 그는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했다.
아버지의 정의는 노예와 아들 그리고 시민의 정의와는 다른데 아들이 사악하면 아버지는 그 아들과 인연을 끊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들은 어버지에게 빚이 많기 때문이며 특히 출생에 있어 빚이 있다.
이런 특수한 경우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이론에 반하는 것은데 그는 우수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을 구분하면서 우수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열등한 사람은 더욱 우수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내, 자녀, 종은 남편, 부모, 주인에 비하면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 그의 이론에 포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에 관한 세 가지 이론 중 두 가지는 그의 제자가 썼다고 하며, <니코마케안 윤리학>의 일부인 5, 6, 7장 역시 제자들의 이론이라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이런 견해를 따라 윤리를 구분하기보다는 저서의 모든 내용을 통털어 그의 윤리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에 있어 진보적인 태도를 취했고 당시 사람들의 경험과 학문적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론을 따로 정립했다.
그는 선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으면서 혼이 선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이 혼을 이성적인 점과 비이성적인 점으로 나눈 건 옳았다며 스승을 두둔하면서 비이성적인 점을 성장력vegetative과 식욕appetitive으로 구분했다.
그는 식욕에 이성적 요소가 있어 이성의 요구에 부응해서 대상을 찾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성Nous(또는 정신) 자체는 숙고적인데 식욕의 도움 없이는 어떠한 실질적인 행위도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미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면서 지성적인 점과 도덕적인 점인데 이것들은 혼의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와 관련이 있다면서 지성적 미덕은 가르침으로부터 기인하나 도덕적 미덕은 습관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억지로라도 좋은 습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좋은 행위를 하는 재미를 톡톡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