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는 그녀의 가족이 실제로 모두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기도했다. 그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하여 16년을 기도했다. 또한 그녀는 자녀를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훈하고 훈계하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아우구스티누스(st. Aurelius Augustinus, 354-430)를 위해 최고의 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교육의 목적은 아들이 이런 교육을 통하여 좀더 하나님께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음의 욕정과 자만을 경계하는 어머니의 교훈을무시하고 한 여인과 동거에 들어갔고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모니카는 아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사랑하는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한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는 장장 30년동안 계속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수로 로마에 갔을 때 모니카도 함께 동행하였다. 모니카는 밀란에서 암브로시우스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녀는 아들이 암브로시우스와 교류하기를 원했는데,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자신 수사학자로서 당시 밀란의 유명한 수사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던 설교자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찾아가곤 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수사학적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되는 한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만남이 지속되던 어느 날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돌아와 정원에서 묵상을 하던 중 회심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단순히 개인적인 결단의 결과가 아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모친 모니카는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위대한 어머니였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기동안 그녀의 단 한가지 관심은 아들의 영화로운 삶이 아니라 그 영혼의 사람다운 회복이었다. 후일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 "나의 어머니는 젖과 함께 구주 그리스도의 이름을 마시고 살게 하셨다"고 고백한 바 있다.
젊은 시절 진리를 찾아 마니교에 심취하였다가 33세에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정원에서의 체험을 통해 회심하고 후일 힙포의 주교가 되어 활동했던 위대한 서방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기도가 맺은 서방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값진 열매였던 것이다.
모니카는 387년 그녀의 나이 56세, 아우구스티누스의 나이 33세에, 회심한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도착한 오스티아 항구 근처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그 때의 심정을 회상하며 "그동안 눈물로 나를 지켜내신 어머니는 지금 내 시야에서 떠나가셨지만, 나는 하나님의 시야 안에서 살게될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모니카의 헌신과 기도는 이교도 남편을 신앙으로 인도한 것은 물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 성 어거스틴을 길러내었던 것이다.
근래에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운동"이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결코 좋은 아버지가 아니기에 늘 그런 기사를 읽을 때마다 두 아들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 짐을 느낀다.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이 없으셨고 "법 없이도 살 양반"이란 평을 들으셨지만 그런 아버지는 언제나 내게 있어 불만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의 삶이 결코 나의 것이 아니며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늘 마음을 다 잡았었다. 날마다 늦은 밤에 드리던 가정예배에서 아버지의 기도와 나의 기도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아버지의 못다 가신 그 길을 뒤따라 강단에 무릎을 꿇는다. 단지 한 차이가 있다면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으나 나는 늘 말하지 않고 못배기는 어설픈 목사인 것이며, 아버지는 법 없이도 능히 사셨지만 내 스스로 결코 실행도 못하면서 그 법에 매여 냉냉한 가슴이 된 것이다.
모니카를 생각하며 새삼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은 내가 써내려 가야 할 참회록의 무게가 한이 없는 까닭이다.
온 방을 뛰어다니며 애비의 마음을 조이게 하는 두 아들의 반란이 잠잠해질 무렵 가만히 아이들을 안아본다. 놈들의 몸무게가 늘어갈수록 내 아버지에 대한 씻어지지 않는 회한은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타고 내 가슴을 저민다.
"아버지! 저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운을 주일마다 입으며 "말없이 설교하는 법"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성경책에 쓰여진 낯익은 글씨체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나는 오늘 그 메모를 힘입어 한줄 한줄 설교를 채워갑니다. 아버지의 기도의 끈이 오늘 내 옷자락을 붙들어 맨 까닭에 나는 오늘 목사가 되었습니다. 진정 아버지처럼 나도 당신의 손자들에게 목사로 불리우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마치 그 옛날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 처럼 오늘도 늘상 새벽이고 낮이고 밤이고 할 것없이 기꺼이 못난 자식을 위해무릎을 꿇고 계시는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당대의 어머니들처럼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를 뵈러 방문하면 거실 앉은뱅이 책상에는 알이 굵은 돋보기와 모나미 볼펜 한자루가, 펼쳐진 성경책의 한 켠에 놓여 있다. 사실 일제시대에 받은 초등교육 이후 어머니께서 일평생 읽으신 책은 성경책 뿐이었다. 어머니의 성경책에서 나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맡을 수 없는 향기를 맡으며, 성경을 읽는 더듬거리는 어머니의 음성 속에서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천상의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기도와 함께 성경책 위로 떨어지는 눈물 방울에서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보석을 발견한다.
몇해전 겨울, 쇠약해진 몸으로 새벽기도를 위해 빙판을 걷다가 넘어져 얼굴과 팔과 다리 온 몸이 쓸려 상처로 뒤범벅이 된 어머니의 상처를 소독하면서 "이제는 몸도 생각하여 빙판에는 나서지 말고 집에서 기도하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다음 날 새벽에도 교회의 맨 앞좌석에 계셨다. 나는 결코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음을 안다. 어머니의 사랑, 그 사랑의 기도는 오늘도 나의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으로 있다.
첫댓글 모니카와 같으신 어머니를 뫼신 목사님은 참 행복 하십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님의 눈길이 천사의 보살핌이 되어서 항상 목사님을 보호 하고 계시니 목사님은 참 행복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