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나이, 인생의 중반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다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나의 삶은 긴 여행기라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삶을 여러 방향으로 나누어볼수 있겠지만 오늘은 신앙과 교회생활의 면에서 나를 들여다 보고자한다.
가장 최초로 기억에 남는 교회는 초등학교시절 전라도 시골의 한 천막교회에서 시작된다.
당시 우리마을 산 중턱에 있던 그 천막교회에는 지금은
돌아가신 막내 삼촌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로 계셨었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모두 신앙이 없는 관계로 막내삼촌은 형님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것으로 기억되는데
제일 맏형인 우리집에서 제사가 있는 날 아버지 형제분들이 다들 모이실때도 그분만이 오시지않고 본인의 신앙을 고집하셔서 모두에게 미움을 사곤 하셨다.
그 어린
나이에 무슨 특별한 신앙이 있던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매주 그곳에서 노래와 율동도 배우고 성경요절을 외웠다.
가마니 바닥에 앉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린 전도사님의 말씀들이 지금도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걸 느낄수 있어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아이들과 노는것이 좋았고 각종 선물과 맛있는 간식을 나누어주는 그곳이 당시에 시골 아이들에게는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교회가 조금 멀리 이전했지만 그시절에는 교회가 우리동네에 있기때문에 우리동네 아이들이 교회를 장악했던 것 같다.
강남마을에 살았었다는 서울에 사는 친구와
얼마전에 통화를 했는데 그때 내 전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있다니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손톱만큼의 전도상이
있으려나?
서울로 전학 온 중학교 시절, 나는 공부나 하라는 어머니 몰래 미아리 고개위에 있는 돈암장로교회에 부지런히 다녔다.
나는 몇년동안 떨어져 지내던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어 좋았고 또 교회를 통해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학습공부를 마치고 학습교인이 되었으며, 중등부 성가대에 서서 엘토파트의 한사람으로 열심히 찬양도 배웠다.
문학의 밤 행사에서
시낭송도 해보고 동네 길쓸기, 쓰레기 줍기등의 봉사활동과 거리 전도도 생전 처음으로 해 보았다.
얼마전에 옛생각이 나서 그 교회를 가 보았을때 당시에
학생회장과 부회장을 하던 친구들이 아직도 그 교회를 섬기며 생활하는것을 보고 반가왔던 한편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마음속에 불확실하나마 신앙이 잠재하던 처녀시절
그러나 그 때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사회생활 초년병이던 나는 결혼이라는 인연의 줄을 따라
미국행을 결심했다.
미국으로 떠나던 날, 장거리 비행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속에 무의식속에 남아있던 주님께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린 기억이 생생하다.
미국생활에
적응하면서 가까운 미국교회에 열심히 나가던 시절,
마치 나에게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시듯 미국인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고 매 주 감동으로 나를 인도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다른곳으로 이사한 후 들려온 목사님에대한 안 좋은 소식은 목사도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했다.
오랜 미국생활중에 교파를
초월해서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를 아침 저녁으로 동시에 섬기며 배우며,
더러는 생활에 찌들어 교회를 떠나기도했던 그시절에도 마음속 깊은곳에는
변함없이 주님이 존재해 계셨고
긴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가 제 멋대로 헤엄치다가 그 줄을 당기면 끌려오듯이 나의 삶은 방황중에도 언제나 교회로 돌아오곤했다.
남편의 직장을따라 사우디에서 생활하던 10년의 기간은 청개구리처럼 신앙의 자유가 없었기에 오히려 더많은 영적성장을 이루었던 것 같다.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여러가지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성경과 교회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주었고
한분의 목사님이
순교하시고 다른 목사님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시며 세번째 모신 목사님을 통해 성경의 깊이를 배우게 되었다.
여행이 자유스럽지 못한 나라에서
목사님과 몇몇 성도들과 함께 비행기로 날아가서 다른지역(카미스)에 선교하기도하고
사막이 꽃이피어 향내나리라 하는 찬송가 구절을 선교여행차 사막을 지나며(타이프지역)
실감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걸프전에 쫓겨 미국으로 되돌아오며 언젠가는 가 보아야 할 이스라엘을 눈앞에 두고도 그냥 떠난것이 못한것이 영 아쉬웠었다.
비록 몸은 미국에 있어도 마음이 항상 부모님이 계신 한국에 와 있으니 결국에는 마음이 있는곳에 몸이 따라가는 법이던가?
파란만장한 미국생활을
이혼과 함께 접고 귀국하여 대전에 정착했다.
미국에서 섬기던 목사님이 신학대 한국분교를 대전에 세울 계획으로 준비작업을 하고 계셨었다.
그분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하는 한편 조그마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영어학원에서 일하며
교회 봉사도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던중 정말 피치못할 사정으로
다시금 짐을 싸야하는 형편이 되었다.
아직 신학교가 자리잡기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이젠 이사라면 신물이 나는 또 거처를 옮겨야하는 심정이
복잡하기만 했다.
지금은 고향 가까운 광주로 내려와 삼년째 접어들고 있다.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할수
있는 평화로움이 있다 .
아직은 작지만 큰 포부가 있는 직장과 더욱 작지만 말씀이 살아있고 언제나 활기 찬 교회가 있어
쉴곳없는 새처럼
떠돌던 영혼이 이제는 제자리를 찾은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누가 미래를 알겠는가.
자의이든 타의이든 언제 또 짐을 싸야할 상황이
생길지도,,,
다만 현실에 충실하며 있는동안 최선을 다하고, 떠났을때 좋은 여운을 남긴다면 어차피 그것이 만족할만한 인생이라 하지않을까?
야곱은 바로왕의 물음에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라 대답했고 또 '인생은 나그네길' 이라는 노래가사에도 있지않는가.
내 신앙의 나그네길 가는동안 궂은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많겠지만 가야할때 가지않겠다 고집하는것
또한 정처없이 떠나기를 자주하는 것 만큼이나 바람직하지 못할것이다.
만사를 주관하시는 조물주께서 가라!하면 갈것이요 있으라!하면 있으면
될 것이다.
얼마전 미국에서 다녀간 딸아이의 말이 생각난다.
엄마는 만사에 낙천주의자라고-You are optimistic about
everyg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