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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연간의 한국 화단
한국 미술의 춘추전국시대에서 민족미술 꽃피우다
글_ 이규일월간Art in Culture 발행인 |
광복 직후 우리 미술계는 일본화의 청산과 민족미술 운동의 전개가 가장 큰 이슈였다. 일제 잔재를 쓸어내고, 민족미술을 중흥한다는 기치를 높이 들었을 뿐 그 속살은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鮮展)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제 강점기의 미술세력과 그 중심권에 서지 못한 소외계층 간의 갈등이 주도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다 이른바 민족·민주·사회·공산주의 이데올로기까지 겹쳐 난맥상을 이루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이 우리 미술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로 승화, 미술단체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그룹 활동도 왕성했다. 해방연간(1945∼1949)의 한국 미술은 1949년에 막을 올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國展)로 꽃을 피웠다.
미술계 변화를 주도한 조선미술전람회
1922년에 시작, 1944년까지 이어진 선전은 많은 미술 인사를 배출했다. 그 중에서도 선전의 심사위원(심사참여)을 역임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은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당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같은 제자들이 만든 미술단체 후소회(後素會)를 이끌었고, 청전은 제당(霽堂) 배렴(裵濂)·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같은 걸출한 제자를 배출했다. 선전에서 연 4회 특선으로 등용문에 오른 추천작가는 동양화 부문에서 운보와 월전, 서양화 부문에서 이인성(李仁星)·심형구(沈亨求)·김인승(金仁承)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선전을 통해 이름을 드높인 작가는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 향당(香塘) 백윤문(白潤文),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남농(南農) 허건(許楗),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현초(玄艸) 이유태(李惟台), 심원(心園) 조중현(趙重顯), 철마(鐵馬) 김중현(金重鉉), 박영선(朴泳善), 이봉상(李鳳商), 조병덕(趙炳悳), 구본웅(具本雄), 김종태(金鍾泰),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 정재(鼎齋) 최우석(崔禹錫), 강창원(姜菖園), 김경승(金景承), 손응성(孫應星),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 등이다. 대체로 선전에서 특선의 영광을 안은 작가들이다.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은 1915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서화협회를 창립해 미술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드는 바람에 작품의 인기는 떨어졌다. 미술지망생들이 모두 선전에 매달려 선전의 세력을 얻지 못한 춘곡은 선전 중심의 미술계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탈, 뒷방노인 노릇을 해야 했다. 신분이나 학력으로 볼 때 누구보다 앞서 있던 춘곡에게 잘 나가는 이당과 청전은 시새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화를 삭이면서 때만 기다리던 춘곡에게 있어 해방은 조국 독립의 기쁨 못지않게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계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광복 3일 만인 1945년 8월 18일에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결성되고 그 산하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창설되었다. 중앙협의회에는 의장 임화(林和), 서기장 김남천(金南天), 중앙의원 박태원(朴泰遠), 이기영(李箕永), 이태준(李泰俊)이 뽑혔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좌익색을 드러내다가 뒤에 월북한 문학인들로 중앙협의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좌익 일색은 아니었다. 위원장에 추대된 고희동은 민족진영의 중심이었던 미술계의 원로다. 서기장으로 조직을 관장한 정현웅(鄭玄雄)은 뒤에 월북한 사람이어서 중앙협의회 간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분과별 위원 명단을 보면‘동양화부’위원장 노수현(盧壽鉉), 위원 허백련·변관식(卞寬植)·김용준(金瑢俊), ‘서양화부’위원장 김주경(金周經), 위원 이종우(李鍾禹)·이병규(李昞圭)·오지호(吳之湖)·길진섭(吉鎭燮), ‘조각부’위원 김두일(金斗一)·문석오(文錫五), ‘공예부’위원 이순석(李順石), ‘아동미술부’위원장 이병규, ‘선전미술대’대장 길진섭, 대원 이순석이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는 북한지역까지 포함, 전국에서 185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다. 임원으로 뽑힌 미술인 중에서 뒤에 월북한 작가는 김용준·김주경·길진섭 등이었고, 문석오는 당시 평양에 있었던 조각가이다. 해방연간에 평양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한 작가는 많다. 해방이 되자마자 일본에서 귀향한 이득찬(李得燦)·윤중식(尹仲植)·정관철(鄭寬徹)·장이석(張利錫)·최영림(崔榮林)·황유엽(黃瑜燁)·차근호(車根鎬)·한봉덕(韓奉德) 등 평양미술연구소 출신들과 평양미술대학에 몸담아 있던 학장 김주경(월북), 교수 문학수(文學洙)·황헌영(黃憲永)·조규봉(曺圭奉)·김정수(金丁洙), 학생으로는 황용엽(黃用燁)·김찬식(金燦植)·안재후(安載厚)·김태(金泰) 등이 있었다. 평양에서 활동하다
가 1951년 1·4 후퇴를 전후해 최영림·장이석·홍건표·김병기·김학수·황염수·김원·계삼정·이득찬·윤중식·황유엽·송혜수·김태·김찬식·황용엽·안재후·홍종명 등이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이들이 평양에있던 해방연간의 미술활동은 북한의 미술동맹이 주관했다. 미술동맹 위원장은 정관철, 부위원장은 황헌영, 서기장은 김병기가 맡았었다. 평양 미술가들은 당시 정치사회 여건 때문에 공산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작품, 예를 들면 사회주의 건설상을 담은 그림을 그려야 했다. 8·15 해방을 기념하여 매년 국가미술전시회가 열렸는데 어느 핸가는 윤중식이 초가집이 있는 농촌 풍경을 출품, 당으로부터 기와집을 그려야 인민들이 잘사는 것처럼 보일 게 아니냐고 트집을 잡힌 일도 있다. 미술동맹이 관여했던 주요 사업의 하나는 김일성, 스탈린, 레닌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배가 고파 호구지책으로 20∼30호 크기 한 장에 600∼700원을 받는 일에 매달렸다. 이때 초상화 작업에 참여한 작가는 이득찬·홍건표·조규봉·문석오·김재선 등이었다. 정관철·최연해가 백두산에서 처녀가 태극기를 들고 뛰어나오는 장면을 그려 그 밑그림을 바탕으로 조규봉·문석오·김원이 합작한 조각작품으로 해방기념탑을 세우기도 했다. 해방기념탑의 전체 설계는 뒤에 서울로 내려와서 건축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김중업(金重業)이 맡았었다. 김중업은 서울 올림픽공원의〈평화의 문〉을 제작한 유명한 작가다.
정치적 중립의 조선미술협회
미술평론가 이구열(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은『계간미술』34호에‘해방 40년, 한국 미술’을 논하는 글에서 “해방 3일 만에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는 곧 진주하게 될 연합군의 환영에 필요한 대형 초상화와 국기를 그리는 데 힘을 합쳤다. 미·영·소·중 4개국 국가 원수와 그 나라 기를 그리는 작업에는 좌우익이 따로 없었다”고 기술, 해방 직후 미술계의 상황을 증언했다. 조선미술건설본부는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해방기념문화대축전 미술전람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에는 97명의 작가가 132점을 출품, 대성황을 이루었다. 아직 해방의 기쁨에 들떠 질서가 확립되지 않았던 터였지만 연합군, 특히 미군장병의 관람이 많아 그들에게 우리 미술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전시회를 성대히 끝낸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좌우익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지켜 예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직을 정비, 새로 조선미술협회를 발족시켰다. 이때의 회원구성은 준비모임에서 선임된 23명의 회원추천위원이 전국적으로 98명을 천거, 11월에 숙명여학교에서 발기총회를 갖고 회장에 고희동을 선출하고 15명의 평의원과 10명의 상무위원도 뽑았다. 이들은 1946년 6월에 민족미술 중흥을 목표로 제1회 회원작품전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1946년 2월 초에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를 중심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맥을 이은 비상국민회의가 결성될 때 고희동이 조선미술협회 회장으로 미술계를 대표하여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 발단이 되어 협회가 분열되었다. 좌파들이 협회 동의 없이 고희동 회장이 정치색이 짙은 모임에 참석한 것을 문제 삼아 인책사임을 요구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좌파회원들이 집단탈퇴, 1946년 2월 28일에 따로 조선조형예술동맹을 조직했다. 조선조형예술동맹은 위원장 윤희순(尹喜淳), 부위원장에 길진섭, 회화부 위원으로 김기창·김만형·이쾌대·정종여·정현웅·최재덕을 선임했다. 조선조형예술동맹보다 김주경에 의해 며칠 먼저 조직된 또 하나의 좌익주도 미술단체 조선 미술가동맹도 있었다. 조선미술가동맹은 조형예술동맹과 결합, 1946년 12월에 동화·화신 두 백화점 화랑에서 합동전을 갖고 조선미술동맹으로 합쳤다. 조선미술동맹을 중심으로 한 좌익노선에서 이탈, 1947년 8월에 창립전을 가진 조선미술문화협회는 진정한 민족예술을 건설한다는 기치를 내세워 좌파미술을 약화시켰다. 이때 조선미술문화협회를 만든 창립회원은 김인승·김재선·남관·박성규·박영선·손응성·신홍휴·엄도만·이규상·이봉상·이쾌대·이해성·임군홍·임완규·조병덕·한홍택·홍일표 등이다.
광복 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미술 그룹 중에서 최초로 민족미술을 전개한 그룹이‘단구(檀丘)미술원’이다. 단구미술원은 1946년 3월 1일부터 7일까지 중앙백화점(미도파) 화랑에서 3·1절을 기념해 창립전을 열었다. 창립회원은 청강(晴江) 김영기(金永基·회장), 고암 이응노, 석하(石下) 정진철(鄭鎭澈), 심원 조중현, 운당(芸堂) 조용승(曺龍承), 취당(翠堂) 장덕(張德), 월전 장우성, 제당 배렴, 현소(玄素) 정홍거(鄭弘巨) 등이다. 이들은 1947년 8월 15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충무로 대원화랑에서 광복절을 기해 제2회전을 열고는 해산했다.
1946년 6월에는 정치가와 서화가가 합작,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를 만들었다. 당시 멤버는 백범(白凡) 김구·우남(雩南) 이승만·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동강 정운면·고암 이응노·심당(心堂) 김제인(金齊仁) 등이었다.
서예·전각에 이름이 높았던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은 라이벌인 성재 김태석이 회장에 당선되는 바람에 대동한묵회에 불참했다. 대동한묵회가 주최한 제1회 전국한묵회전람회에는 많은 정치가들이 출품, 서예실력을 과시했다. 1946년 6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일주일간 덕수궁에서 열린 한묵전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임시정부 주석 김구, 독립운동가 유동열(柳東悅), 정치가 여운형, 법조인 허헌(許憲) 등이 서예작품을 내놓았다. 이 전시회에는 현재 서예계의 중진인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이 학생부(휘문중)에서 자유신문상을, 아동부에서 김덕중(전 서강대 교수)·김우중(전 대우그룹 회장) 형제가 당시 덕수초등학교 학생으로 작품을 내 대동한묵회장상과 가작상을 받았다. 김우중의 아버지 우당(愚堂) 김용하(金容河)도 붓글씨를 잘 썼다. 대동한묵회보다 1개월 먼저 소전 손재형(회장)이 주동, 고암 이응노·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청강 김영기 등이‘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를 만들어 덕수궁미술관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이렇듯 해방연간에는 서예가 민족미술의 뿌리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46년 1월에는 오지호·김주경·박영선·이인성·박상옥·정규 등 서양화가들이‘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고 7월에 동화화랑에서 딱 한 번 회원전을 열고 해산했다. 이 무렵, 다른 쪽에서도‘조선산업미술가협회’‘조선조각가협회’‘조선공예가협회’를 창립했다. 1946년 초에 한홍택·이완석·조병덕·권영휴·엄도만에 의해 세워진 조선산업미술가협회는 1월에 창립전을 열고, 내처 11월에 2회전(동화화랑)을 갖는 열의를 보였다. 이들은 해마다 회원작품전을 개최, 회원 수를 늘리고 협회의 발전을 도모해 나갔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는 모임을‘대한산업미회’로 바꾸었다. 김두일·김경승·윤효중·김종영·문석오·조규봉·이국전·김정수·윤승욱·백문기에 의해 1946년 3월에 창립된‘조선조각가협회’는 재료 궁핍 등 여러 가지 열악한 조건 때문에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고희동 중심의 조선미술협회는 1946년 11월에 동화화랑에서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갖고 결속을 다졌다. 좌우익이 충돌, 타격은 있었지만 고희동을 따르는 민족진영의 온건파 동양화가와 서예가·서양화가 들이 정통성을 지키려고 노력, 기반을 잡았다. 조선미협은 미군정청과 교섭, 경성구락부(미술품경매장) 건물을 협회회관으로 사용했고, 그 건물에‘조선미술연구원’간판을 걸고 민족미술중흥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7년 8월에는 송정훈(宋政勳)이 나서 자유롭고 개방적인‘앙데팡당전’을 조직했다. 송정훈은『경향신문』에“정치성과 사상을 통하여 예술창작의 의욕이 어떤 제약을 받고, 자유를 생명으로 삼는 예술가들이 협회·연맹·동맹 등등의 파당을 형성하고, 중상·분열·모략을 일삼으며 자파와 입장과 견해를 달리한다 하여 반박과 공격을 예술행동보다도 더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조선예술가의 타락과 몰락은 될지언정 진보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요컨대 앙데팡당전을 여는 것은 첫째로 신진작가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미술의 진정한 대중화를 도모함으로써 미력이나마 민족미술의 발전·향상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라고 썼다. 송정훈의 취지문으로 보아 그 당시 미술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송정훈의 관전기는 동양화의 이용우·이응노·배렴·정진철, 서양화의 박영선·박고석·배운성·이인성·이세득·백영수·조병현·박석호 등의 작품평으로 참신성을 보여줬다. 추상화가로 불리던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장욱진(張旭鎭) 등이‘신사실파’그룹을 만들어 현대적 순수조형을 추구한다는 정신과 이념으로 첫 작품 전(1948년 12월, 화신화랑)을 가진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였다. 해방연간의 미술은 1949년에 첫 삽을 뜬 국전으로 정리된다. 그 동안 이데올로기, 파벌 등으로 혼란을 겪었던 미술계의 헤게모니 싸움은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태동으로 판가름이 났다. 고희동은 일제 잔재 청산, 민족미술 중흥을 내세워 자파 세력을 규합, 국전의 실권을 장악했다. 고희동은 조선미술 건설 본부가 조직될 때 내세웠던 선전에서 우대받은 작가를 배제한다는 원칙을 국전에도 적용했다. 고희동은 동양화에서 김은호·이상범·김기창, 서양화에서 심형구·김인승을 국전 심사위원에서 제외시켰다. 미술건설 본부에서 배제되었던 공예의 강창원과 조각의 김경승은 국전 심사위원에 선정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선전에서 연 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되어 있었던 장우성(동양화)·이인성(서양화)을 국전 심사위원으로 발탁한 것은 당시로는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1회 국전은 1949년 9월 22일, 문교부 고시 제1호로 시행규정을 발표해 11월 21일부터 12월 11일까지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렸다. 국전은 1부 동양화, 2부 서양화, 3부 조각, 4부 공예, 5부 서예(사군자 포함)로 나누어 시행했다. 응모작은 모두 840점이었으며 입선작품은 243점, 특선작품은 21점이었다. 입선작(특선)은 동양화가 31점(5), 서양화가 116점(7), 조각이 22점(2), 공예가 36점(4), 서예가 38점(5)으로 수준도 높고 새로운 작품들이 많았다는 심사평이 나왔다. 심사위원은 동양화에 고희동·변관식·노수현·이용우·장우성, 서양화에 이종우·도상봉·장발·이인성·이병규·배운성·김환기, 조각은 김경승·이국전·윤승욱,공예는 강창원·김중현·김재석, 서예는 안종원·김용진·손재형이 선정되었다. 동·서양화를 넘나들던 만능 그 동안 이데올로기, 파벌 등으로 혼란을 겪었던 미술계의 헤게모니 싸움은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태동으로 판가름이 났다. 제1회 국전은 시행규정을 선전과 같이 만들었다는 비판은 있었지만, 민족미술의 축제로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미술인 김중현이 공예심사를 맡은 것은 그의 실력을 인정한 발탁이었다. 추천작가로는 동양화 쪽에서 고희동·변관식·김은호·이상범·허백련·노수현·최우석·박승무·이용우·배렴·김경원·이쾌대·장우성이, 서양화 쪽에서 이종우·도상봉·장발·이병규·이인성·김환기·심형구·김인승·박영선·구본웅·남관·조병덕·이마동·박득순, 조각 쪽에서 김경승·윤효중·김종영, 공예 쪽에서 강창원·김중현·김재석·이순석·장선희·장기명·김춘조, 서예 쪽에서 안종원·김용진·손재형·정대기·황용하·오일영·임청·김충현 등이 뽑혔다. 공모작 중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에는 당시 서울사범 교사이던 류경채(폐림지 근방),차석상인 국무총리상에는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학생인 서세옥(꽃장수)에게 돌아갔다. 각 분야별로 한 사람씩 뽑은 문교부장관상에는 동양화 조남수(추경), 서양화 한중근(시가전망), 조각 박승구(성관음상), 공예 박철주(건칠화병쌍), 서예 김기승(고시행서 2폭)이 차지했다. 특선은 서양화에 이동훈(목장의 아침)·최광진(석고 있는 정물)·김흥수(악)·이경희(포항의 부두), 조각에 백문기(L부인)·김세중(청년)·김만술(소녀), 공예에 박여옥(백제문양자수)·이초완(문갑), 서예에 정환섭(전서대련)·조수호(어부사)가 뽑혔다. 1회 국전 때는 입선도 하늘의 별 따기로 어려웠다. 입선작가로 지금도누구 하면 알 수 있는 유명 미술인은 동양화에 성재휴·박노수·장운상·정진철·박인경 등의 이름이 올라 있다. 서양화 쪽은 이의주·정진국·송정훈·임직순·김종하·최덕휴·박승근·정준용·이상욱·나혜군·이세득·이양로·원석연·이경희·류영필·박득순·전혁림·이인실·김종하·원대정·조국환·김훈 등이 입선했다. 조각에서는 한용진·최만린·윤영자·성낙인·김인자·유한원·박일훈 등의 이름이 보인다. 공예부문에서는 김태희·정성조·김기주·민종태·조정호·김정숙·천옥선·지순탁·백태원·이기훈·서영희 등이 뽑혔다. 서예는 송치헌·김응현·최현주·조동호·최중길·정현복·이경배·한규복·류영완·최재원·오동률 등이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제1회 국전은 시행규정을 선전과 같이 만들었다는 비판은 있었지만, 민족미술의 축제로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심사위원에서 배제된 동양화 부문의 김은호와 이상범은 추천작가로〈초보〉와〈효천보희(曉天報喜)〉를 출품했다. 서양화 부문의 심형구와 김인승도 추천작가로〈화실〉과〈조모상〉을 냈다. 동양화의 김기창은 추천작가에서도 배제되어 출품도 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
민족분단으로 스러져간 미술계의 거목들
해방연간의 우리 미술은 민족미술 중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과제 때문에 미술인 각자의 이해가 엇갈려 공통분모를 찾아내지 못했다. 미술인 대다수가 선전에 매달렸고, 또 일본 유학을 통해 미술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념과 실제 사이에 적잖은 괴리가 드러났다. 이런 와중에 해방연간에 일어난 사상논쟁으로 좌우 이데올로기 대결까지 맞물려 미술계도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던 것이다. 게다가 선전중심세력과 소외세력 간의 갈등으로 분열양상마저 보였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남북분단의 현실 때문에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작가들이 북으로 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방연간에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북으로 간 작가는 길진섭·김용준·김만형·김정수·김주경·이건영·이국전·이석호·이순종·이쾌대·이팔찬·임군홍·이해성·배운성·박문원·엄도만·윤자선·장석표·정관철·정종여·정현웅·조규봉·조양규·최재덕 등 부지기수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길선주 목사의 아들인 길진섭은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48년 8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으로 피선, 북으로 간 후 평양국립미술제작소장을 역임했다.
김용준도 서울대 미술학부에서 민족미술 중흥의 이론적 기틀을 잡았던 화가이자 이론가이다. 김주경은 1938년에 오지호와 함께 2인 화집을 출간한 녹향회 창립회원이다. 1946년 10월에 북으로 가 평양미술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청전 이상범의 장남으로 화명을 떨쳤던 이건영도 북으로 갔다. 제1회 국전의 추천작가로심사위원을 역임한 이국전은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쾌대도 1947년 조선미술문화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1회 국전의 추천작가로 참가했지만 한국전쟁 때 인민의용군에 입대, 국군포로가 되었다가 휴전 후 거제도수용소에서 북으로 갔다. 베를린미술학교를 졸업한 배운성은 1회 국전 때 추천작가가 되어 심사위원까지 역임했지만 한국전쟁으로 북으로 가 평양미술대학 출판화(판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김기창과 가장 친했던 정종여는 해방연간에 조선미술동맹 간부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강좌장을 역임했다.
위의 몇 작가의 예에서 보았듯이 자의든 자의가 아니었든 민족분단의 설움이 미술계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오랜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