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 서문
참되고 진정한 것은 그것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자들이 그것이 유행하는 것을 동시에 방해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보다 수월하게 세력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질식당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방해받고 제지당하는 이유는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나의 경우 내 나이 갓 서른에 이 책이 처음 나왔지만 일흔 둘이 되어서야 제3판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결과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 나는 “온종일 뛰어다니다가도 저녁이 되면 만족해 한다”는 페트라르카의 글에서 위안을 받는다. 나도 마침내 그런 나이에 도달하여, 이제 내 생애의 마지막에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만족을 느끼며, 옛날의 통례에 비추어 볼 때 뒤늦게 시작된 만큼 그것이 오래 지속될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독자는 제2판에 수록된 것이 제3판에 빠짐없이 들어 있고, 오히려 인쇄를 하며 추가로 보충된 것이 있어 136페이지나 더 많아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제2판이 나오고 7년 후에 나는 {소품과 부록} 두 권을 발간했다. 그 같은 명칭을 붙인 것은 나의 철학의 체계적인 서술을 보충한다는 의미이므로 이 책에 싣는 게 온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그런 식으로 책을 낸 것은 살아 생전에 내가 제3판을 볼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소품}의 제2권에 그런 내용이 있으며, 장의 표제를 보면 그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859년 9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이 책은 홍성광 역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을유문화사, 2009년)이며, 독자 여러분들 꼭 이 책을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의 예:
똑같은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번역하는 번역자와 그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하는 번역자의 문장은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나 그 차이가 크다. 사상과 이론에 대한 무지와 한국어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번역자의 실력이 나쁜 번역의 선례를 남긴다. 아래의 문장을 비교하면서 좋은 번역의 예와 나쁜 번역의 예를 독자 여러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비교 평가해 보기를 바란다.
“철학자가 공적인 입장이나 혹은 사적인 처지에서 완전히 도구로 사용되어 온 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러한 장해를 입지 않고 30년 이상이나 나의 사상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다만 본능적 충동에서 그렇게 밖에는 달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확신을 갖고 진실을 생각하고, 숨어 있는 빛을 밝게 드러낸 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어떤 지각 있는 사람이 알게 되어 그를 움직이고 희열을 느끼게 하며 마침내 마음의 평안을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저작은 정직과 공명을 이마에 써붙이고 쓴 것이라 칸트 이후 유명해진 세 사람의 궤변가의 저작과는 크게 다르다. 나의 입장은 언제나 사려, 즉 이성에 따르고 정직한 말로 일관되어 있으며 지적 직관이니 절대사유니 하는, 바른대로 말해서 허풍이나 사기와 같은 잘못된 영감을 주는 입장에는 서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정신으로 탐구했으며, 한편으로는 거짓과 사악이 널리 퍼지고 허풍(피히테와 셸링)이나 사기(헤겔)가 크게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하였다. 현대는 이 20년 동안 그 정신적 괴물 헤겔을 최대의 철학자로 떠들어대어 그 소리는 전유럽에 울려퍼지고 있다. 아마도 현대에는 사람에게 줄 월계관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찬미를 매음한 시대의 비난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철학이 이미 오랫동안 한편으로는 공적 목적을 위한,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봉사를 해오는 동안 나는 이에 구애받지 받고 않고 30년 이상 전부터 나의 독자적인 사상을 추구해 왔다. 나는 자신의 본능적인 성향에 따라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달리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래도누군가 참된 것을 생각하고 감춰진 것을 조명해 준다면 언젠가는 사색하는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어, 그에게 말을 걸고 그를 기쁘게 하며 위로해줄 거라는 확신으로부터 뒷받침을 받을 수 있어서였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리를 말하고, 그로 인해 이러한 삭막한 삶에서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듯이,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그 문제를 그 자체 때문에, 그 자신을 위해 추구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철학적인 성찰에서는 자신을 깊이 사색하고 탐구한 것만이 훗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지, 애당초부터 남을 생각해서 그렇게한 것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다. 알다시피 전자가 성격상 보통 솔직한 것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려 하지는 않는 법이고, 자신에게 알맹이 없는 호두를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궤변을 농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쓰인 모든 문장은 그것을 읽느라 들인 수고를 즉시 보상해 준다. 이와 같이 나의 저서는 솔직함과 공명함이 특징인데, 그것만으로도 칸트 이후 시기의 세 명의 유명한 궤변가들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반성, 즉 합리적인 사유와 솔직한 전달의 입장에 있으며, 지적인 직관으로 불리거나 절대적인 사유로도 불리는, 적당한 이름으로 부른다면 허풍과 협잡으로 불리는 영감의 입장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러한 정신으로 작업해 오면서, 그 동안 줄곧 그릇된 것과 나쁜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그리니까 허풍(피히테와 셸링)과 협잡(헤겔)이 최고로 존경받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나는 동시대인들의 갈채를 받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 20년 동안 헤겔과 같은 정신적인 괴물이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떠벌려져 왔고, 그 반향이 전 유럽에 크게 울려 퍼진 이 시대에 이러한 것을 보아온 사람으로서 그들의 갈채를 갈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시대는 수여할 명예의 화관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으며, 시대의 갈채는 더렵혀졌으므로 그것을 비난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게 나의 진심이라는 사실은, 내가 동시대인들의 갈채를 받으려고 했다면 그들의 모든 견해와 완전히 상반되는, 그러니까 부분적으로 그들의 불쾌감을 자아냈을 게 분명한 20군데의 구절을 삭제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갈채를 받으려고 단 한 개의 철자라도 희생시키는 것은 범죄 행위로 간주할 것이다. 나를 이끄는 별은 진정으로 진리였다. 그 별을 따르며 맨 처음 나는 나 자신의 갈채만 받으면 되었고, 보다 고상한 온갖 지적 노력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심각하게 타락한 시대, 그리고 고상한 말을 천박한 신념과 결합시키는 기술이 정점에 달한 문학,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타락한 국민문학을 완전히 외면해 버렸다. 누구나 다 그런 걸 갖고 있듯이, 물론 나는 내 본성에 필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결점과 약점을 결코 피할 수 없지만, 품위를 떨어뜨리는 순응을 하면서 그것을 증가시키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