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옥동네’라는 곳이 있는가?
이 말은 실제로 그러한 동네를 가상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상징적인 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대구에 그런 동네가 실제로 있었다. 말을 듣고 나면 아마도 대부분의 도시에 그런 동네나 부락이 존재했었다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지금 소설 속의 그 동네는 대구의 원대동(지금은 그 일대를 ‘고성동’이라고 하는 것 같다.)에 있었다. 팔달교에서 경부선 철로를 너머 시내로 들어오는 구 도로(지금은 그 도로가 폐쇄되다시피 되었다.)변 현재의 달성초등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 동네 가까운 곳, 현재 아마도 대구KT고성 빌딩이 있는 자리에 대구방송국이 있었다.
그 대구방송국이 개국될 당시(일제강점기 말) 방송국 직원의 사택으로서 왜식 주택 단지를 조성한 곳이 바로 왜옥동네이다. 일제시대에는 이 동네는 와야마찌[和屋町]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그것을 우리말로 직역한 것이 ‘왜옥동네’라고 한다.
대충 20여호의 꼭 같은 모양의 왜식 단독 주택을 반듯하게 줄 지어 조성한 이 동네의 주민들(왜인 방송국 직원, 일부 서울 쪽에 본가를 둔 조선인 직원 포함)이 해방과 함께 버리고 간 주택들을 미군정이 적산(敵産)으로 몰수 관리하다가 연고자 위주로 다시 불하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방송국 직원들에게 일부를 우선 배정하고, 거기 살던 일본인이 거느리고 있던 조선인 연고자가 일본인으로부터 물려받았음을 확인하면 그들에게 배정했다. 그럼에도 몇 채가 남자 대구 거주자로서 무주택 언론인과 목사들에게도 무상 불하했는데 그 덕분에 달구신보 편집국장 황현준에게도 한 채 불하되는 혜택을 받았다.
집 구조는 남향이면서 동서로 일(一)자 형으로 된 건조물로 방 세 칸, 마루와 변소가 한 칸이 차지하는 형국이다. 세 칸 중 동쪽 끝방이 안방, 서쪽 끝방이 건넌방, 가운뎃방과 부엌이 한 칸, 가운뎃방과 건넌방 사이에 마루, 현관, 변소로 조성되는 한 칸이 있었는데 방은 모두 다다미 방이다. 건물의 동쪽벽과 남쪽은 온통 유리창으로 둘렀다. 본채 뒤 쪽에 창고가 있었다.
동네는 다섯 채씩 한 줄로 넉 줄로 되어 있었는데, 두 줄이 한 단지를 형성해서 두 개의 단지 사이에 소방도로가 있었다. 이 단지와 바로 이웃하여 남선메리야스공장주식회사 공장이 있었는데 그 공장을 동네 사람들은 ‘다오루 공장’이라고 불렀다.
단지의 서쪽에 팔달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국도를 동네 사람들은 ‘행길’이라고 불렀다.
이 왜옥동네 주위에는 대부분 초가로 된 조선인 민가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해방 공간의 우리 민족은 마치 이 왜옥동네의 주민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이 동네 주민은 대체로 인텔리 계층이었다. 신문사 편집국장, 방송국 직원, 학교 교사, 목사, 약국 등. 그러나 그들은 왜식 교육을 받은 이들이고, 대부분의 주민이 태어날 때 이미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왜식 사고방식으로 감염된 상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독립국가의 자주적 민족 의식으로 이러한 자신들의 왜색 의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서 살아갔다.
그들은 군정기에 민족 국가를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고 지키고 선양하는데 있어서 어린이로부터 청소년과 청년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해 가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한반도 남과 북 삼천리 강산 어느 구석 할 것 없이 거기 터잡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왜색 문화라는 것은 하나의 굴레이며 치욕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바로 이러한 굴레에서 탈피하려는 몸부림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중요한 의도로 보아주기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