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그 신비한 분위기 또한 깊어지는 국화의 청초한 아름다움.
그때 진한 향기와 함께 국화는 최고의 영광을 발휘한다.
나는 국화의 그 청초함과 향기를 좋아한다. 들에 피는 소국 또한 마찬가지로.
그랬던 국화가 한 달 가량 피어있다가 늦가을에 들어설 무렵이면 미세하게 퇴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꽃잎이 윤택한 탄력을 상실하고 꽃대도 기운을 상실하는 듯.
시간은 한 잎 두 잎 꽃잎을 뜯어버리고 상큼함을 망가뜨린다. 그때 내 안에 애련한 긍휼이 작용한다.
그것은 저 윤택한 탄력을 자랑하던 때의 것과는 또 다른 마음으로서 그것도 사랑인 것이다.
주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던 중이었다.
그때 인파에 숨어서 몰래 뒤로 다가와 주님의 옷가를 만진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하혈이 멈추지 않던 혈루병을 앓던 여인인데 12년간 이 병을 앓는 동안
치료를 위해 가진 재산도 다 소모했지만 별 소득 없이 병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유대인 사회에서 이런 경우는 부정한 여인으로 규정되어 그녀를 만지는 것이 금지되고,
공중 모임에서 제외되고, 회당이나 성전에도 나가지 못하고, 대개는 남편에게 이혼까지 당했다.
한 마디로 육체적 질병으로 말미암아 심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뒤로 다가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이다. 그리고 완치됐다.
유대주의자들의 의식이라면 "너같은 게 감히 나를 만지다니!"라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주님은 모든 정황을 다 아시면서도 굳이 그녀를 자기와 대화의 장으로 불러내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막5:30)"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막5:32)"였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막5:33)"
그때 주님의 눈빛은 따뜻했고 음성은 온화했으며 배려는 깊었다는 것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5)"에서 읽을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여자를 자기에게로 불러내시고 무엇 때문에 이 여자를 보려고 하시는 것일까?
단 하나의 목적이다. 부서진 여인을 세워주시려는 사랑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가 사랑하는 라라에게 했던 말의 한 대목이 기억난다.
"당신이 슬픔이나 회한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토록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거요.
나는 한 번도 발을 헛디디거나 낙오하거나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런 사람의 미덕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가치도 없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은 인생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요."
우리가 더 이상의 개선과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그렇게 절실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시기에 창조주이시기에 자기 피조물에 대한 기본적 태도는 감안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그 심오하고 절실한 사랑은 죄와 고통으로 말미암아 부서진 존재에 대한 긍휼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죄와 고통에 부서졌었고 또 살아있는 동안 죄와 고통의 위험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에겐 우리 자체의 진선미가 없으며 고통의 방어책도 없다.
주님께서 우리의 미덕이나 완전함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거나
우리가 원래 사랑스러운 존재이기에 사랑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완전한 오해다.
우리가 사랑스럽게 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영적 미덕이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처절한 사랑의 결과이지 사랑의 조건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스럽지 못한 존재였지만, 우리는 망가진 존재였지만 그분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 사랑 안에서 의롭고 사랑스런 존재로 만들어져 간다는 이것이 복음의 진리다.
오늘도 내일도 이렇게 부서진 자에 대한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을 향해 우리는 변해가는 것이다.
2024. 4. 23
이 호 혁
첫댓글 주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의 기사는 늘 은혜롭습니다!!
아멘! 주님의 사랑으로...주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아멘! 그러기에 예수님이시죠. 은혜의 글 감사합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