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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갈라디아서2장11~21절
제목 :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고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른 소명을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할례자(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전도의 소명을 받았다면,
바울은 무할례자들, 곧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받았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부름을 받은 두 그룹 간에
어떤 경쟁이나 질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격려의 악수가 있어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도 바나바와 바울에게 친교의 악수를 함으로서,
사명자로서의 우정을 돈독히 하고,
각자 부름 받은 소명대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 잘 하는 분야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재능에 맞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과 베드로의 사역 중 무엇이 더 큰가?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이 맡기시고 역사하신 일에,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열정과 최선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결국 많은 영혼을 살리는 곳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복음에는 경쟁자가 없습니다. 오직 동역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바울의 증거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합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말씀합니다.
1. 사건의 전재와 바울의 질책(11~14절)
1) 책망 받는 게바(11절)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베드로가 바울이 목회하는 안디옥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베드로가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것에 대해서 바울이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아무리 어부 출신이라 해도 예수님의 수제자로
-3년이나 함께 지내면서 훈련받은 사람이요,
-한 때 예수님을 실망시켜 드렸지만 회개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 거듭나서
초대교회 지도자로 세움 받은 사도 중의 사도 아닙니까?
그런데 그에게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영적 지도자도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 중의 사도라고 손꼽히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뛰어난 지도자라도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그에게는 언제나 실수나 잘못, 또는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전에 충현교회 원로 목사인 김창인 목사가 자기실수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자회견에서 말 하였습니다.
자기가 목회생활하는 중에 큰 실수를 하였는데
자기 아들을 자기 후계자로 세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도 자기가 신사참배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위대하신 사람도 인간이기에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모세는 므리바에서 백성을 위하여 물을 낼 때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 내리 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 거민들과 화친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모든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복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우리아를 간교하게 살해하는 커다란 죄를 지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늘 겸손해야 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주변에 조언과 권면(때로는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세에게 장인 이드로가 있었고,
다윗에게는 선지자 나단과 같은 사람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늘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영적인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잘 못된 책망은 사람을 죽게 하십니다.
2) 게바가 책망 받을 내용(12절)
그러면 게바의 책망 받을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게바가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할례 받지 않은 이방 교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데, 마침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 야고보가 보내서 온 유대인들이 식사자리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였던 것입니다.
왜 피하였습니까?
본문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비난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지만,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고넬료 가정의 구원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이 허락되었음을 가장 먼저 알았던 사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을 보고 행동이 돌변하였습니다. 이유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한다’는 뒷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행동에서 당당하지 못한 모습,
어찌 보면 비굴한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이는 아직도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온 행동입니다.
물론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대하여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를 영접했다고 하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대다수가,
아직 모세의 율법과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보면,
공연한 오해를 살 수도 있기에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행동을 복음의 진리를 훼손할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의 수제자요 초대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행동을 책망하게 된 것입니다.
3) 리더의 영향력(13절)
또 하나 우리가 받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삶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심지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까지도 순간적으로 그 자리를 피함으로써 안디옥교회 교인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실수가 단지 그 사람 한사람만의 문제로 머물지 않고
그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결국 그의 그릇된 행위로 말미암아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그 그릇된 행위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더욱 말과 행동에서 더욱 신중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들이 더욱 온전하게 설 수 있도록 중보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4)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14절).
베드로의 행동을 본 바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유대인의 모든 규례와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서,
어찌 이방인에게 유대인처럼 살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복음마저도 제한시켜버리는
베드로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바울의 이런 행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 부탁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간곡한 말로 편지를 써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굳이 공개적으로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인 베드로를 망신 줄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질 않고 공개적으로 게바를 책망하였습니다.
왜냐면
(1) 개인적인 관계보다 ‘복음의 진리’를 바로세우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2) 다른 성도들 역시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를 공개적으로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될 일종의 사명감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공개적으로 책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베드로도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책망하는 용기보다 더 큰 용기는 책망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베드로는 이후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호의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보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울의 책망을 사심이나 감정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의롭게 되는 길(15~21절)
게바의 부주의한 행동을 책망했던 일을 상기시킨 바울은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배경)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원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참에 율법주의적 잔재를 뿌리째 뽑고자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본래 유대인(15절).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먼저 바울은 게바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유대인임을 밝힙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줄이고 자신의 주장의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바울도 유대인으로써 선택받은 선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구별방식이 더 이상 의미 없음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 이전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된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실은 스스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하찮게 여기며 조금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 교만한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의 한계(16절)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더 이상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지금은 유대인 이방인으로 나누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죄인으로 나눕니다.
바울은 율법의 한계를 분명히 합니다.
바울은 롬 3:20에서“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으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갈 3:23-24“[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3)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바울은 구원의 비밀을 확실하게 밝힙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만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이지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롬 3:20).
그러나 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인간의 윤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며 신적 표준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게 되는 수단 일뿐,
절대적인 자격이나 요건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롬 5:18,19).
*롬5:18,19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악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인간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할 수 있으며,
이를 신뢰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은 생명력이 있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역동적(力動的)인 삶을 살도록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믿음에다가 할례와 같은 율법적이요 외적인 조건을 더 하려고 하였습니다.
4)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한다면 세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17~19절).
(1) 그리스도를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17절)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① 그리스도 안에서-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말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로서,
그리스도와 성도 간에 누리는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시사합니다.
그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역을 강조하는 것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예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전파하는 것과 미래 세계에 대한 거룩한 소망을 가지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전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아담 안에서'(롬5:12-19)라고 표현과 대조를 이룹니다.
아담은 죄와 사망의 옛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유와 생명의 새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실현하신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연합하여(롬 8:39;14:7;빌 2:1)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빌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계명을 지키고, 죄를 범하지 않고, 주님을 본받습니다. 재림에 담력을 가지고, 열매를 맺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생명을 갔습니다.
② 죄인으로 드러나면은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속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죄악 된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히려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이 가진 의식법과 율법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역설입니다.
그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시인한다고 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8:1).
(2)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21절).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은혜.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바울 자신이 그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 신비적 연합의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은혜'('카린')은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과
우리로 아들을 믿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헛되이'.('도레안')은 '연고없이','이유나 목적이 없이','불필요하게'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애착심과 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정적인 잘못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 생활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범죄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입니다.
(3) 바울 자신을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18절).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 본문은 다분히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부터 떠나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2:11).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행 9:1-7)이후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아니한 일관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율법의 공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결단코 없음을 밝힙니다.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범법한 자'('파라바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정의 되는 '하마르톨로스'('죄인')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파라바텐'은 문자적으로 '배신자','이단자'를 뜻하며, 바울 자신이 다시 율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背信) 행위가 된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5) 바울사도의 고백(19절).
(1)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19절)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대하여 죽었나니” – 바울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향하여 '죽는다'는 표현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하며,
더 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설적으로 '율법을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했는데(롬 7:4),
이 두 표현은 모두 단순히 사변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고백한 말입니다.
(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20절)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줍ㄴ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냅니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습니다.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롬 6:4).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습니다(롬 8:18).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②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납니다.
❶ '나' 대신에 '그리스도',
❷ '율법' 대신에 '믿음',
❸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롬 8:4).
③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라고 말합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이 고백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신의 삶과 율법주의자들의 삶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예수님은 나의 대속자(Substitite)로서만이 아니라,
나의 대표자(Representative)로서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for me) 죽으셨을 뿐 아니라,
내가 되어(as me)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나의 옛 자아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되었을 때 나 역시 장사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영원히 나의 옛 자아가 제거된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for me),
아니 내가 되어(as me) 죽으셨음을 기억하고,
죄된 육체의 소욕, 자기 의와 자랑에 대하여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염려가 없어집니다.
걱정과 근심이 없어집니다.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구원의 원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의를 선물로 받으시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옛 자아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주장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은혜를 누리며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람을 의식하면 외식의 덫에 빠지기 쉽습니다.(11~14절)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지만(9절), 복음에 따라 처신하지 않은 베드로를 향해서는 공개적인 면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그들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이고, 복음이 훼손되어도 관용해야 할 상황은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두려워 이방인과의 교제를 회피한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의 진리보다 평판을 더 중요하게 여긴 위선입니다.
그의 외식은 복음의 본질을 희석했고, 또 다른 외식을 낳았습니다.
나는 믿는대로 살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믿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적은 없습니까?
2) 의롭게 되는 일에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15~16절)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도 없고, ‘의의 소망’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멸망의 길에 놓이 인류가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또 율법의 행위는 차별을 두지만(12절)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3:22)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허문 차별의 장벽을 우리 손으로 다시 쌓지 말아야 합니다.
3)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과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17,18절)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죄를 짓도록 조장한다는 비난에 대해 반박합니다.
그런 비난은 그리스도를 죄의 구속자에서 조성자로 폄훼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강조는 할례나 절기, 음식법과 같은 율법(의 행위)의 무가치 함을 드러내는 것이지 방종을 허용하거나 순종의 요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이유로 죄 짓는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4) 의롭게 되는 일이 율법의 행위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19~21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단지 신분의 변화만 가져오는 일이 아닙니다
내 소속을 바꾸고 주인을 바꾸는 일입니다.
과거의 죄뿐 아니라 죄를 지은 나도 주와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전의 내가 죽은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옛 자아가 살아나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길만이 내가 살고 남도 살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