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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신교인, 성장드라이브에 지쳐
들어가는 글
“돈, 돈, 돈 봤다” “돈, 돈, 돈 봤다”
“다윗 집에 돈 봤다”
“돈, 돈, 돈 봤다” “돈, 돈, 돈 봤다”
“다윗 집에 돈 봤다”
“동쪽에서 들어오고-,” ”서쪽에서 들어오고-,”
“남쪽에서 들어오고-,” “북쪽에서 들어오고-,”
위의 주술 같은 노랫말을 남도민요가락에 맞춰 반복하여 부르는 교회가 있다면 독자들은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야 다윗가문에 내린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로 풀었다지만 왕의 홀이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을 돈으로 풀어버리고 메시아대망사상도 돈타령에 휩쓸려간다면 기독교가 속된말로 예수주식회사란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한국개신교의 기복신앙이 이제 갈 데 까지 간 것이다.
부흥사는 교인들이 익숙할 때까지 시간 시간마다 위의 돈타령을 남도가락에 맞춰 몸을 흔들었고 교인들의 눈과 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교회를 잘 섬기는 기둥 같은 몇몇 제직을 차례로 불러 회중 앞에 세우고 10여분씩 맘몬신을 찬양하는 돈타령을 “돈, 돈, 돈 돈돈,”하며 몸을 흔들며 두 팔을 휘~ 저어가며 춤추게 하였다.
돈타령만 할 수 없으니 때로는 회중 앞에 세워놓고 방언기도하라하고 부흥사가 통역을 하며 압박하고, 불려나간 사람이 방언을 못하면 교인 중 방언이 유창한 사람을 함께 불러 옆에 세워 대신 방언기도하게하고 부흥사가 통역하고, 불려나간 집사가정의 공부 잘하는 아들의 장래를 예언하며 10년 후에 큰사람이 될 터인데 그 10년 안에 위기를 세 번 만날 것이고-, 해 가며 부모의 정성어린 기도가 있어야 한다고 액땜하는 방법으로 부모의 정성을 요구하는 강사의 협박성 칭찬에 집중공략을 당했다.
예언을 빙자한 장난질에 천진한 농촌할머니 교인들은 “맞아요. 맞아요." 감탄하며 ”그 집 아들 공부 잘해요“ 맞장구를 치니 부흥사 왈 ”내가 그 집에 그런 아들 있는 줄 알기나 했을까? “하며 능청을 떨며 쪽집게 무당노릇도 했다는 말에 분노가 아니라 치 떨리는 우리 개신교회악덕부흥사 모습을 본 것이다. 부흥회기간 수 없이 이름을 불러 칭찬도하고 겁도 주며 냉탕온탕 정신없이 집중공략을 당한 몇몇 집사님들은 정말 피곤하여 1천만원씩, 또는 자녀를 위해 백만원씩 헌금을 하고 말았다. 귀신에 홀린 듯 헌금을 한 것은 자원하는 마음보다 피곤할 정도로 공략하는 찰거머리작전에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상상의 글이 아니다. 전편에서 거론한 이웃 작은 농촌교회의 ‘신년 축복성회’ 모습이었다. 필자의 글이 너무 과격하지 않는가? 하는 우려의 말을 전해주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부흥회의 실상과 돈타령으로 일관된 한마당 무당굿이었음을 알게 된 필자가 어찌 그 정도의 글을 쓰지 않겠는가?
성전 뜰에서 장사하며 돈 바꾸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분노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유일무이한 모습일진대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인간으로 인내의 한계를 느낀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개신교회의 돈타령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한두 교회의 일이 아니며 전반적으로 고질병이 된지 오랜 것이다.
가시적 성장을 위하여 돈이 일차목표가 되었고 결국 헌금이 교인들을 피곤케 하는 제일 원인이 되었다.
개신교인, 성장드라이브에 지쳐
구랍(舊臘) 30일의 포럼에서 지적된 한국개신교의 문제점은 “교인의 머리 숫자와 헌금 액수, 교회당 건물의 크기 같은 세속적인 관심의 집중은 교회의 순정성과 성스러움을 잃었고-,” 라고 지적한다.
개신교성장드라이브가 건전하게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봉사와 희생을 통해서 주님을 닮아가는 길로 내실 있는 성장을 했다면 교인이 지치고 피곤할 이유가 없고, 도리어 신바람 나는 삶은 보람이어서 불평대신 자부심으로 설렐 일이다.
개신교인들을 지치고 피곤하게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게는 사전 통보도 없이 불쑥 불쑥 찾아오는 목사님의 예의 없는 심방으로부터 삶의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교회문턱을 넘는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한 말과 전혀 다른 현실이 다가온다.
교회일원이 되는 순간 건축헌금 십일조 월정헌금 감사헌금 특별헌금 등등 각종헌금의 짐을 지우고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100년 전 전기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의 교회시간표에 따라 살라는 요구에 심적 부담이 가증되고 결국 피곤하여 눈길을 돌리게 한다.
그 당시 교회에 자주 모이는 생활은 무지에서 탈출하는 길이었고 변화된 서양문화를 배우고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문맹을 퇴치하는 길이였으며 계급을 초월한 친교의 장이기에 당연히 밥만 먹으면 교회로 모였던 것이다. 그시대의 시간표에 현대 교인을 몰아넣고 새벽기도, 주일 오전, 오후와 수요예배를 비롯하여 구역예배까지 의무를 지우고 주일에도 근무를 해야 하는 특수직장의 교인을 배려하는 대안도 없이 주일성수를 요구하고. 따르지 못하면 안식일을 범 한다고 나무라며 주일근무를 피할 수 없는 직장인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다.
한발은 세상에 한발은 교회에 걸치고 살아야하는 교인의 입장에서 교회는 안식을 주는 곳이 아니라 심술궂은 시어머니로 다가오고 교회생각만 해도 정말피곤하다는 느낌만 들게 한다.
☉ 헌금은 교회와 신앙생활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 살지 않고 수단을 위해 살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빙빙 도는 양상이다 당연히 그런 교회는 피곤만 가증 된다
돈이 전제된 가시적 성장에 치중함으로 신자들의 신앙이 좋고 부족함이 당연히 그 신자의 헌금액수와 비례하고, 개신교 헌금의 80% 이상을 점한다는 십일조 문제로 자연 귀결된다.
율법 6백여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면서 율법전부를 필해도 오직 돈과 연관되는 십일조 하나만은 끝까지 부여잡고 지키라! 강조하는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필요하고 명쾌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온전한 십일조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교인을 늘 죄책감에 살게 한다면 십일조는 도리어 교인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진리 안에 참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족쇄가 되여 기독교복음이 주는 목적과 충돌하는 실제적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 .
한국개신교 양적성장의 동력이 되는 십일조 문제가 기복신앙의 도구로 전락하였다면 이 문제로 대다수의 교인이 부담으로 느끼고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구원사역의 걸림돌이 되고 가난한자는 드릴 십일조가 노동의 십일조와 시간과 현물의 십일조 밖에 드릴 것이 없는 가난한 교인은 봉사하는 삶을 살아도 머리를 들지 못하고 정죄 받은 자를 만든다.
속칭 은사자가 즐겨 사용하는 세 가지 족집게 질문은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 여성 어른일 때는 낙태한 범죄가 지금의 고난을 낳은 원인이라고 들이대면 여기서 자유 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온전한 십일조가 실생활에 불가능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과 기독교의 본질(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을 전도시키고 결과적으로 교회성장에 걸림돌로 교인의 피곤만 가증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부자에게만 복음을 잘 전하는 한국개신교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기 원한다면 십일조 문제는 전면검토를 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고 봐야 한다.
교회가 내적으로 성숙한 교인으로 양육하면 내 생활의 10의 1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고 오로지 자신은 청지기임을 깨닫고 늘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의 것 주를 위해 돌릴 수 있는 경지에 달할 것이고 강요에 의한 수동적 신앙에서 능동적 신앙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그런 교인이 넘쳐날 때 한국개신교의 성장이 건전한 성장일 것이다.
☉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교인 수고가 헛되니 당연히 피곤하다.
미주 동포사회에서 성공한 목사로 알려지고 서울강남의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 초청되어온 모 목사님은 "미국의 교인은 신앙은 버리고 생활은 있다, 한국의 교인은 이와 반대로 신앙은 있고 생활이 없다"라고 말한다. 웃기기 위해 하는 이야기로 받아드려야 할 줄 알지만 어느 것이 신앙의 본질인지 설명이 필요치 않다.
생활이 따르지 않는 한국개신교인의 신앙은 과거에 결정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00년 전 종교개혁자 말틴루터가 라틴어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신약 66권을 65권으로 만들고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빼버린 이유가 행위를 강조하는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비하하였던 그 전철을 정확히 밟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 정보혁명의 중심에 서서 패러다임 쉬프트를 깨닫지 못하여 젊은 세대가 적응을 못하여 피곤해 한다.
새로운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면 고문을 공부해야 이해가 가능한 100년전 번역본 성경으로 고집수레 일관하여 젊은 세대가 성경과 멀어지게 하고 있다. 이 어리석은 시대착오적 의식이 목회자와 교회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젊은 세대가 동화책 읽듯이 슬슬 읽을 수 있는 새 번역본은 어째 경망스럽고 권위가 없다한다)
1960년대 2차 바티칸 공의회가 20세기동안 고집했던 라틴어 미사 전례를 각국어로 바꿨고 기독교 토착화에 힘쓰며 새로운 경전의 번역을 끈임 없이 시도하였고 한국도 가톨릭과 개신교간 공동번역본을 인쇄하여 저들은 사용할 때 공동번역 사업에 반대할 명분이 없어 응한 개신교회는 공들여 번역한 공동번역을 외면하고 지금까지 한문 번역본을 텍스트로 한 성경을 사용하며- ,
"가라사대"란 말로 읽는 성경을 사용해야 이것이 교회의 권위라 생각함으로 자라나는 젊은 세대가 성경과 거리감을 갖게 하고 성경을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구시대의 고전으로 생각게 하면서도 기성세대가 만족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교회성장의 걸림돌일 뿐이란 것이다.
☉ 전기도 없고 방송도 없던 시절인 초대교회 시간표에 정보화시대의 교인을 억지로 맞추는 시스템은 교인을 피곤하게 한다.
다양한 문화와 늘 시간에 쫓기는 경쟁사회에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인 새벽기도와 주일저녁 예배 수요예배는 교인의 참석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예배자체를 폐 할 이유는 없고 시간여유가 있는 교인들만 자유롭게 참석함이 맞는 것이다.
주일 근무자를 위한 토요 직장인 예배를 개설하고 주일성수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탄력성 있게 교회가 대처하여야 한다.
주일저녁 예배에 참석자가 없다는 이유로 주일오후 1시경에 저녁예배를 당겨드림으로 바쁜 교인을 종일 잡아두고 외짝교인이 가정에서 믿지 않는 남편을 기러기아빠 만들고 당하는 아내의 어려움은 결과적으로 그 남편을 교회에서 점점 멀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물에 빠진 양을 건지기 위해 안식일을 범할 수 있다면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 주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음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은 믿는 아내보다 믿지 않는 그 남편을 더 사랑하시고 잃은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 양을 위험한 광야에 잠시 버려두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면 영적교만도 이에 준한다.
☉ 목사는 부요한 생활과 사회적으로 성공한 듯한 삶이 부끄러움임을 알아야 한다.
청빈서원 없이 부요한자로 사회의 스승 된 자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한국개신교의 목사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겸손의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는 한국개신교에 발붙일 자리가 없을 것이고 주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의 성장드라이브는 늘 교인들의 피곤을 불러올 것이다.
‘사치와 낭비는 물질로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는 말이 목사와 그 가족에는 멍에가 아니고 당연한 일상 생활신조로 받아드려야 한다.
근자에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가톨릭신자와 개신교신자간의 활발한 토론의 주제가 교회 헌금문제와 특히 십일조문제가 화두임을 아는가?
‘피곤한’ 개신교인들, ‘편안한’ 가톨릭으로 가고 있다는 항간의 이야기를 들을 귀가 과연 있는가?
교회가 몇 평 건물인가? 교인 수는 몇 명인가? 사례금은 얼마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어떤 종류인가? 등등이 목사들 간에 주고받는 질문이고 목회성공의 척도가 된다면 한국개신교의 마이너스 성장은 계속 될 것이다.
>계속<
<속편>
( 5 ) 한국개신교의 문제점과 회복의 길
한국개신교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인과 함께 가는가?
2007년 2월 4일
글 / 朴聖培
<참고>
** 새로운 물결 - 제2차 바티칸공의회 3부작 바로가기 **
첫댓글 상투스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제 홈에 옮겨가려고 합니다. (한 곳을 수정하십시오.)----> 아래의 100전을 100년 전으로...새로운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면 고문을 공부해야 이해가 가능한 100전 번역본 성경으로 고집수레 일관하여 젊은 세대가 성경과 멀어지게 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 되고 돈으로 안되는 일이 없는 요즘의 세상에 기독교도 같이 따라가는 세상이 됐습니다.세상 흐름에 따라 살아야 된다고 하지만 교회마져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 되였답니다.그러기 때문에 미국에도 젊은 교인은 별로 없고 나이든 사람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입니다.모든 부정부패는 돈에서 이루어집니다.너무나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조하면 젊은층이 눈을 돌립니다.그러나 십일조가 적으면 교회가 운영이 되지않기 때문에 목사님들도 알고 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례교인인데 정말공감이 갑니다. 감명있게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