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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개신교 쇄신을 논함에 있어서-,
들어가는 글
금번에 “한국개신교의 현주소”란 글을 준비하면서 가까운 친지와 몇 분의 목회자에게 검토를 부탁도 하고 젊은 목사가 운영하는 한 카페에 연재하면서 예측했던 대로 많은 저항에 부딪쳤다.
세상의 잣대로 성공했다는 목회자들은 내게 말하길 ‘글 쓰는 목사님이 가능하면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압박하며 한국개신교가 처한 심각성은 외면하고 반론은 차마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혹 무슨 자격으로 분수에 넘는 이런 만용을 저질러 평지풍파를 일으키는가? 하는 저들의 생각과 질책을 눈치로 엿보게 되고 그런 반응이 당연히 있을 것 이라고 예측도 했다.
그런가 하면 논조가 너무 강하다는 비판도 따른다.
필자가 한국개신교의 쇄신을 목적으로 글을 올리기 까지 많은 고뇌가 있었음을 첫 글 서두에 이미 언급했고 이 고뇌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고 필자에게는 평생의 고뇌였으며 그 해답을 찾는 방법의 일환으로 바람직한 목회자상으로 자신이 살며 합당한 길을 걷기위해 도시출신으로 살아보지 못한 농촌목회를 평생 선택하여야 했다.
현실교회의 속화된 모습으로 부터 가급적 멀리 떨어져 정말 나 하나만이라도 사명 감당하려는 심정으로 살기를 원했고 평시에 버릇처럼 말하던 “목사가 되면 나는 산골로 갈 것이다. 도시에 몰려 서로 교인쟁탈전을 하고 이웃하여 간판을 걸어 개척교회를 하며 눈살 찌푸리게 하는 저런 목사가 목사 맞는가?” 했던 내말의 책임을 지는 길이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인테리와 부자 그리고 도시에 복음을 잘 전해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농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못 전 한다”는 말을 하시며, 벽지목회자로 동역을 권하시는 예수원의 아쳐토레이 신부님의 권유를 나는 불평 없이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산속깊이 도시에서 더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한국개신교의 문제점은 더 크게 부각되어왔고 살아있는 성자로 칭함을 받는 신부님의 삶의 모습과 대비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를 대비하여 보게 될 때 한국개신교의 문제와 심각성은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 왔다.
놀랍게도 개신교의 문제를 일으킨 기복주의 신앙의 원조와 같은 모 교단에서 어머님 전도사님이 사역하고 계셨고 그로인해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말년에 어머님의 여생을 모시기 위해 기도원사역에 잠시 동참하였을 때도 필자의 신앙양심으로 수용되지 못하는 잡다한 문제와 봉착한다. 그러나 소천하신 어머님께 존경을 잃지 않은 것은 어머님의 사역은 늘 금전과 상관없는 순수성으로 일관된 삶이셨기에 정말 다행한 일이였다.
신비주의 신앙은 신앙의 초급단계에 유익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생활화 되었을 때 기본질서를 깨기를 원하는 무리한 욕구를 관철하려하고 특별은총 속에서 만 神을 만나고, 일반은총 속에 끈임 없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를 모르는 비이성적이고 늘 흥분상태의 신앙생활로 일관되기에 가정은 물론 그 인격마저 안정되지 못하는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극적인 삶이 스릴이 있고 멋져보여도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늘 잔잔한 물가로 양떼를 인도하시듯 일반은총 속에 우주를 운행하시고 우리의 삶도 안정되게 이끌어주심을 깨닫는 지혜가 올바른 神지식이란 것이다.
특별은총은 각자의 유기적요소의 과정을 거쳐 걸러진 신비체험을 일반화하려는 욕구는 하나님의 의도에 반한다는 점을 깨달아야한다. 중세시대에 수도원의 사제들이 신비의 체험을 늘 그리워하여 상시 마약을 복용하며 인위적인 방법으로 신비의 세계를 체험하려 했던 어리석은 과오가 방법만이 달라졌을 뿐 지금도 반복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일부 층에서 방언을 연습시키고 따라 배우는 웃지 못 할 작태가 지금도 곳곳에서 실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무리 은사를 거부하여도 당신의 종들이 꼭 필요로 할 때는 강권적으로 부어주시고 무장시키신다. 은사는 하나님 편에서 필요한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지 무조건 인간이 요구한다고 마구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받은 척 능력 있는 척이라도 해야 목회에 성공한다!”는 말이 자칭 은사 자들 사이에 오가는 말임을 안다. 저들은 속고 속이는 사술에 얽매인 종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거짓 목자들의 작태이다.
한국개신교가 처한 현실을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나의 생애를 인도하셨음을 깨닫는다. 백두대간과 같은 가톨릭의 역사와 교의신학을 청년기에 관심 갖고 공부하게 하셨고 개신교의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모습 속에 가족들이 사역하게 하시고 문제점을 비교 하며 고뇌하게 하셨다.
이런 모순을 가까이서 보게 하신 후 순수하게 평생을 사신 귀한 성자의 모습을 가까이 대하며 동역하게 하심으로 나의 신학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내기 미처 깨닫지 못할 때 나의 삶을 이리저리 옮기시며 훈련을 받게 하셨다. 그리고 시대의 변혁을 일직 깨닫게 하시고 모든 패러다임이 바뀌는 디지털 혁명에 급히 적응하도록 훈련 시켜주시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컴퓨터 도사 소릴 듣게 시대에 한발 앞서 훈련과정을 거쳐 한국개신교의 쇄신의 꿈을 잠시도 잊지 못하고 늘 공부하도록 몰아넣으신 손길이 있으셨다.
그러나 쇄신운동이란 이 일을 흔쾌히 할 수 없어 늘 고민하며 차일피일 미루기를 수년이었으나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한국개신교회가 노여 있음을 우리가 다 함께 아는 것이다.
이제 고희를 바라보는 이 나이에 더 늦기 전에 감당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같게 된 것이다.
나의 신앙여정
일찍 기독교를 받아드린 개화된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성장시켜 주셨고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신민정책에 아버님이 평신도 목회자로 평북 강계의 시골교회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시고 교회 문을 닫는 불행한 일이 가정의 안락을 깨는 원인이 되고 그래도 다행한 일은 신앙을 제일 먼저 받아드린 우리 가정의 신앙의 조상이신 외조부님 댁의 부요한 형편이 비록 청춘에 생과부가 되신 어머님의 한이 서렸어도 경제적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함경남도 원산 도시생활을 하며 성장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8살에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해방을 맞아 한글로 교육을 받게 되지 만 기독교를 탄압하는 북한에서 인민학교를 3학년 까지 다니고 월남하여 실향민이 된다. 일제 강점기 한번 문을 닫았던 교회를 외조부님이 해방과 동시에 사재를 털어 교회를 수리하고 공출 되었던 교회종을 찾아 다시 종각에 걸고 몇 년 만에 종을 크게 울리며 다시 예배를 드리는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정권은 유물사관에 의해 종교는 아편이라며 마을의 작은 교회는 문을 닫게 하고 저들이 다스리기 편하도록 도심의 큰 교회로 통합시킨다.
결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월남하시는 외가댁을 따라 어머님의 손에 이끌리어 어린 10살 나이에 걸어서 38선을 넘은 것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48년 여름 장마가 한참이던 8월 초순 이었다.
월남 후 불과 2년 만인 1950년 동족상쟁의 육이오 사변이 발발하고 북한공산군의 남침을 두려움에 떨며 월남한 기독교 가정으로 북한군의 서울탈환을 맞아 숨 가쁜 삶을 고스란히 잿더미가 된 서울 한복판 폭격 맞은 건물더미에 묻혀 인민군과 중공군과 살아야 했고 수복하는 유엔군의 폭격과 포화 속에서 다행히 북한으로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우리가정을 지탱해 준 것임을 어린나이에도 깊이 깨닫는다.
내 삶의 마디마디 마다 한번 도 좌절하지 않고 남다른 수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외조부님과 어머님의 굽힐 줄 모르는 그 뜨거운 신앙의 삶을 보며 자란 것이 나를 세워주신 힘이고 외가와 어머님에게 물려받은 믿음이 지금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을 늘 기억하게 하였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감리교회에서 태어나 장로교 장자교단이라 자부하는 영락교회 주일학교를 거쳐 재건파로부터 시작한 고신의 충현교회에서 보수주의 신앙으로 무장되고 청년시절 가톨릭으로 잠시 귀화하여 교회사의 백두대간을 두루 돌아보며 공부하게 되는 행운을 경험하게 된다. 배타적이던 청교도 근본주의 신앙으로 잔뼈가 굵은 내게 처음은 천주교의 교리가 거부반응이 많았으나 깊이 공부할수록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전수된 개신교가 미흡함을 알게 되고 어거스틴의 교회 론과 예배 론을 배제한 루터의 큰 실수를 깨닫게 되며 신앙의 혼돈 기를 거치게 된다. 결국 어머님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고 신학교 가는 길을 피하고 세상에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교회를 제직으로 섬긴다.
그 시절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틈바구니에서 나를 지배한 신앙은 정통보수주의라 부르는 장로교의 근본주의 신앙이었다.
여전도사님이신 어머님의 눈물어린 기도는 그때부터 20년간 때로는 산기도로 매주 금요 철야기도로 점철되고 멀쩡히 잘 사는 아들을 망하게 해달라고-. “저 고집은 하나님 밖에 꺽을 수 없으시니 건강만 때리지 말고 모조리 망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춘하추동 금요일 철야기도 제목이고 한주도 거르신 적이 없으시다. 1960년부터 1980년까지는 교회적으로 대중철야기도회를 갖기 전이라 어머님의 철야기도는 나 홀로 철야였고 어머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던 금호 감리교의 예배당 그 앞자리는 세월과 함께 마루의 색이 변한 흔적이 남았었다.
잘나가던 나의 삶이 결국 어머님의 눈물어린 기도에 붕괴되고 만다.
하나님의 방법은 자존심이 남달리 강한 나를 세상에서 도저히 머리 들고 살수 없도록 나의 아킬레스건을 끊어 버리신다.
부흥집회를 지방에서 인도하시던 어머니 부흥사는 집회중간에 급히 알려온 아들의 망한 소식을 들으시고 너무 좋고 감사해 춤을 덩실던실 추시고, 그 아들은 큰 고통의 짐을 안고 아킬레스건이 끊긴 채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그래도 하나님과 결단하기로 작정하고 기도원으로 들어가고 방황은 오래 가지 않고 결국 두 손 들고 나이 40에 신학교를 다시 시작한다.
청년기에 10여 년간 가톨릭에 심취했던 나의 신학은 개신교 신학의 허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고 개신교의 근본주의 신학이 마치 뿌리 없이 물에 떠있는 부평초 같음과 많은 독선과 미흡함을 깨닫는다.
인간의 사유의 산물인 철학과 신학이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도 완전함을 주장할 수 없으나 정립과정에 중요한 고리를 배제하고 엉뚱한 이론으로 치닫고 역사적 고찰을 의도적으로 외면함으로 자가당착에 머물며 무지함에서 더 나가 그렇게 가르치는 신학교의 용기에 놀란 것이다.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거두신다.
무너져 내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절뚝거리는 야곱처럼 다시선 나는 평상시 목사 되기를 강요하시는 어머님께 늘 항의하며 대답하던 말이 있었다.
“어머니가 태중에 저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신 일은 나의 동의를 얻고 하신일이 아니고, 만약 내가 목사가 된다면 산골로 갈 것입니다.
제가 산골에 가서 살 일도 없고 산골가기도 싫으니 저더러 제발 목사 되라 하지 말아주세요“.
도시에 몰려 여기 저기 교회 간판 걸기에 바쁜 개척교회의 모습과 대조되는 농촌교회의 실상은 서울에서 불과 4,50리만 떨어져도 목회자가 없어 신학생들의 설교 연습장이 되고, 서울은 목사가 넘쳐 버스를 동원해서 교인 쟁탈전을 벌리는 주일 아침의 아파트 단지의 모습은 참 교회모습이 아니고 돈벌이 하려는 삯군의 모습으로 비쳤다.
“만약 내가 목사가 된다면 산골로 갈 것입니다.”했던 그 말이 결국 씨가 되고 신학교 졸업 전에 경상북도 군위군의 한 시골교회를 돕기 위해 부름에 잠시 응한다고 생각한 일이 점점 더 깊은 산골로 옮겨가게 되고 시골목회 7년을 경험한 후 개신교의 목회자들의 삶과 차별된 수도원 예수원의 공동체생활을 경험하고 아쳐토레이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드리고 오지목회 동역하면서 또 한번 산골생활 7년을 더하여 그분의 신학을 배우게 된 것이다.
아쳐토레이 신부님을 가까이 모시고 벽지목회를 하는 동안 가장 교만하고 배타적이며 근본주의 보수신앙으로 똘똘 뭉친 나의 신앙과 나의 영적 교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천지창조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고 죄를 범한 인간을 구원하려 오시는 인카네이션[도성인신]이 인간구원과 복락원의 길을 보여주시는 한 과정 중에 천국백성의 삶의 훈련장으로 지상의 교회가 잠시 필요하다면 교회는 당연히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맞다. 목자를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양을 섬기는 목자의 상으로 정립되어야 하고 교회의 모든 제도는 인간구원을 위해 사람을 섬기는 자세로 바뀌고 교회와 목회자는 모든 권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제 한국개신교가 쇄신되지 못한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 하시던 주님의 말씀은 구원이 떠나고 없는 이 시대 한국개신교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될 것이다.
>계속<
<속편>
( 6 ) 한국개신교의 문제점과 회복의 길
한국개신교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인과 함께 가는가?
2007년 2월 21일
글 / 朴聖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