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한국개신교의 문제점과 회복의 길
한국개신교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인과 함께 가는가?
들어가는 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고 자리를 굳힌 독재체제가 총통제를 연구하며 장기집권을 꿈꾸던 1970년대 한국개신교의 지도자들은 벙어리가 되어 독재자에게 축복의 조찬기도회를 열어주며 아부하기에 바빴다.
개발독재에 항거하는 의식이 있는 이 나라 지성인들과 청년의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은 가톨릭교회가 일관된 모습의 시국관을 보여 주었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 일에 앞장서셨다. 안타깝게도 개신교의 성직자 중에는 시국관에 투철한 지도자가 없었고, 단지 무교회주의자가 되신 함석헌 옹이 유일하게 항거하신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경유학을 하고 평양 오산중학교 교사 출신으로 젊은 시절 기독교인이 되고 조만식 장로의 사랑을 받던 무교회주의 신앙을 가지신 함석헌 옹의 뒤를 이어 서양사를 전공한 김동길 교수가 같은 무교회주의 신앙의 길을 가는 두 분이 청년시절 나의 신앙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신체제의 서술 퍼런 총칼 아래 살던 시절 왜 두 분이 기성교회를 멀리하고 평신도 끼리 모여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지 청년시절의 필자는 그 진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가 정보에 어두웠기에 교회의 품을 떠난 두 분의 행로가 괴이해 보였던 것이다. 두 지성인은 당시 교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한국개신교의 문제점을 일찍 보신 것이다.
한국개신교는 그때부터 이미 지성인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도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드러낸 것이고 장차 한국개신교회의 정체성과 입지를 예단하는 사건임을 뒤늦게 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러간 오늘 정보혁명이 도래하였고 청소년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국민이 인터넷을 즐기며 사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식층과 청소년은 정보의 물결을 유영하는 삶이 생활화되어 자각이 뚜렷한 지성인들로 성장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한국개신교의 권위는 엄했었다. 대부분의 국민이 무지할 때 교회 지도자들은 시국관이 투철했고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면서 끝까지 이 민족의 광복의 꿈을 잃지 않도록 믿음으로 기도하며 민중을 이끌던 유일한 단체였다. 나라 잃고 방황하는 국민들에게 교회는 당연히 교인의 실생활에 깊이 관여하며 인도 하였고 삶의 마디마디 마다 교회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며 함께 동행 하는 진실성을 보여준 것이다.
교인들이 이사 갈 때 당연히 교적을 옮겨야 했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식만이 신식결혼식이라 불리던 시절로 면사포를 쓰고 웨딩마취에 발마추어 입장하고 퇴장을 하는 교회의 결혼식이 선남선녀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교회 살림을 맡아 하는 제직은 큰 명예였고 지금처럼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직책이 아니다.
교인으로서 합당치 못한 생활이 드러나면 장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직과 교인에게 필히 치리가 따랐고 치리 받은 교인이 다른 교회로 이적을 하여도 그 치리는 유효하였다. 교인의 가정생활 속에 가정예배를 아침저녁 드리는 것이 당연한 교인의 의무였다. 목사가 되기 위해 지망하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신학교를 간다하면 지원자가 출석하는 교회와 교단이 그 비용을 부담했다.
교회일원이며 신앙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부심이 대단했기에 일상생활 속에 의무가 당연히 따랐다. 이와 같이 코이노니아(공동체적 삶)가 기본이 되어 교회와 교인이 다 같이 건강하게 성장한 것이다.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인과 함께 가는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과연 교회가 어떤 지침을 가지고 인도하는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는 지도자로서 바른 길로 안내하는가?
무속신앙도 천지신명의 이름을 빌려 삶의 지침을 제시하는데 고등종교이며 인류의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장중에 달렸다 가르치는 기독교가 이 문제를 간과한다면 과연 기독교의 존재이유가 어디 있다 할 것인가?
첫 울음을 터뜨리면서부터 시작되는 교회공동체 일원으로 한번 발을 들여놓은 신자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겠다는 의지마저 없는 개신교의 현실은 복음을 선포한 수세후의 삶을 교회가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으며 결혼제도를 관장하지 못하는 실상이 과연 교인을 가정 공동체로 그리스도 공동체로 복음화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데 얼마나 기여하는가? 그 과정을 거쳐 평화의 공동체로 간다는 것을 간과하고 복음만 선포하고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방치하고 마지막 임종과 장례절차도 의무화 하지 않음으로 개신교는 속화되었단 비난을 받고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이 현실을 뭐라 변명할 수 있겠는가?
천주교는 7성사를 비롯하여 조가, 만가와 삼종기도에서 구체화된 삶의 이정표를 교리 화하여 공동체 삶의 마디마디 마다 교인을 세세히 돌보며 평생을 함께한다. u
반면 개신교회는 고등종교로서 가치와 책임감을 상실하였다. 모든 것이 경제논리에 본질을 유보 하였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과 상반된 방향을 향해 성공의 성장드라이브로 매진하면서 심지어 교단의 종교지도자 후보생 양성도 교단이 책임지지 않고 비용을 개인부담 시키며 고급인력의 후보생 양성교육을 포기한지 오래다. 교단이 부담하지 않는 신학생 양성은 신학교가 장사수단으로 전락하였고 목사후보생의 머리수가 돈으로 계산되고 돈벌이가 짭짤한 신학교 운영권 쟁탈이 결국 교단의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교단의 신학교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수익성에 초점을 맞추고 돈과 연관되어 수없는 무인가 신학교 사업이 번창함으로 세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 연장선상에 이권다툼이 교단분열의 원인이 된 현실은 장로교단만 40여개가 탄생하는 개신교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심지어 돈 벌기위해 재미동포사회에서도 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한국개신교의 병든 현상은 지구촌 끝 간 데를 모른다.
세상의 어느 종교단체가 그 교단의 성직자 양성비용을 본인부담으로 훈련과 교육을 받으라하며 무자격자 까지 무차별 입학을 허가한단 말인가? 엄밀히 말하여 이는 성직을 팔고 있다는 것이다. 돈만 가지고 오면 얼마든지 목사후보생이 되고 교육받고 적당히 안수주고 수준미달의 목사를 다다익선으로 양성하여 여기저기 필요이상의 교회를 개척하여 집단화하고 힘을 키우는 이런 양태가 과연 성직자로서 양심에도 거슬리지 않는다면 이런 종교가 양산한 종교지도자의 수준이 어떠하리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결국 오늘날 민중으로 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 인간으로서 기본이 되지 않은 큰 도둑도 깡패두목도 돈만 가져오면 누구든지 목사 후보생으로 교육받을 수 있고 장차 지도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고등종교로소 입지를 스스로 버린 것이다.
1960년대 한국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문명의 발달로 일취월장하는 커뮤니케이션 매체 중에 새로 등장하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 심지어는 ‘마귀상자’라 부르면서 텔레비전을 부엌바닥에 내 동댕이쳐 부셔버린 이야기를 간증하는 설교를 많이 들었다. 그 이후 컴퓨터의 발명으로 디지털 혁명이 도래하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전 준비가 전무한 상태로 떠밀려 금일에 이르렀다.
반면 로마 가톨릭은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으로 놀라운 기술(INTER MIRIFICA) 이란 칙령을 44년 전인 1963년 12월 4일자로 발표한다. 1947년 컴퓨터의 발명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사실을 간파하고 연구하고 대처한 공의회의 교부들은 “출판물과 영상물을 위한 사무국”에 대한 희망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교황에게 이 사무국의 임무와 관할권을 출판물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확대하고 평신도를 포함하여 여러 나라 출신의 전문가들을 임명하도록 정중하게 요청한다.
반면 한국개신교는 인생행로에 의와 진리로 인도하는 로드맵하나도 제시 못하고 오로지 성공으로 달려가기 위해 교인을 도구로 이용하고 돈과 명예를 추구하고 있다
금번 포럼의 발표를 전후하여 한국개신교 지도자들의 나름대로 자가진단의 발표가 뒤따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두가 한 결 같이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로 대책을 제시하지만 사실 문제는 의외로 간다하다.
개신교회가 하나님을 뒷전으로 하고 돈을 섬긴다는 것이다. 돈을 섬기면서 권력의 눈치를 보고 교인의 재산정도를 가늠하고 그 가늠에 합당한 대접을 하며 교인을 선별하여 대접한다. 당연히 교회와 교단이 비용을 부담하고 목사후보생 양육을 하여야 질 높은 신학생을 선별 교육할 수 있음에도 제살 깍 아 먹듯 신학생 교육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그렇게 양산된 지도자가 추구하는 것이 돈이되는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D. 죌레는 ‘현대신학의 패러다임’이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기독교가 얼마나 자신의 일을 심도 있게 하느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낮은 차원에서 함께 일하고 더불어 고통당하면서 하느님이 "그 안에"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급진적인 내재성에서 먼저 가능한 것이다. 급진적 내재성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생활을 기록하게 하신다는 것이고, 우리가 "증오"로써 우리의 커미트먼트를 파괴하고 그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가장하고 무관심으로 살지 않는 한, 하느님은 우리의 이 세상적인 삶 "안에"계신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에 대한 확실성은 종당에는 우리가 옳다고 하는 권위주의적인 힘에 대한 확실성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혁명적인 힘에 대한 확실성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있는 위험성의 하나는 가끔 삶의 의미를 성공과 혼동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으로 자본주의 안에 머물게 되는데, 자본주의야말로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원수들이 창조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진실이라는 것은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살아 있는 교회는 케리그마(선포)와 디아코니아(봉사) 그리고 코이노니아(공동체적 삶)를 기본 요소로 가지고 있다
교회는 이 세 가지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개신교회의 특징처럼 단지 선포만을 중시한다면 교회는 단지 좋은 말을 들으러 가는 장소에 불과 할 것이다. 교회가 제3세계의 가난과 기아의 문제를 간과하고 여성의 차별적 상황에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면 이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는 교회가 아니다. 참된 선포는 교제에서 생긴다. 자신의 소유와 지위를 지키기 워한 대립과 분리는 종으로써의 사제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었다. 진정한 교회는 힘을 가진 자들에게 같이 살아가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곳이 여야 한다. 그들의 권위적이고 독점적인 권리행사에 맞서 진리를 말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진정한 선포이며 과제인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정보에 어둡던 유신시절 독재에 항거하면서 험한 세파를 헤쳐 가야하는 이생에서 큰 힘이 되어 줄 교회의 품을 떠나 외롭게 투쟁하던 함석헌선생 같은 무교회주의자가 매우 두문 현상이었으나 디지털 혁명으로 정보가 일반화된 이 시절에 한국개신교회가 거듭나지 못한다면 많은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앞으로 수 없이 발생할 것이다.
정보의 바다를 마음대로 유영하는 신세대가 아음만 먹으면 고급정보를 얼마든지 전문가수준으로 받아드린다. 다시 말하여 정보화된 지금세대는 모두가 최고의 지성인이란 것이고 희생이 없는 교회는 국가에 해악을 끼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는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이 깊이 연구하고 교파를 초월하여 합동으로 헌장을 만들어 구체적으로 교인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정보에 밝은 신세대는 지금과 같은 교회제도에 몸담기를 거부할 것이다.
로만칼라를 즐기면서도 로마가톨릭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심지어 교황을 사탄 운운하는 개신교 일부목사들의 무지와 독선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개신교의 목사들이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로마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을 사탄이라 거침없이 칭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들여다 보고 비교할 수 있는 가톨릭의 접근을 원천 차단하는 수법으로 사용 하는 무식한 목사들이 개신교의 교권을 지고 있는 한 개신교의 내일은 기대할 수 없다.
인류사에 도도히 흐르는 기독교의 큰 흐름은 늘 백두대간과 같은 교회사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이 주도한다는 것이다 그 흐름을 주도하는 매체가 한때 실수하고 범죄 했어도 신의 수임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했어도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구원사역에서 제외할 수 없어 돌이켜 제 자리에 세우고 그 저지른 잘못을 통해서 더 완벽한 자리에 올려놓는 신의 속성 되로 선택되고 결정된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종교란 교육현장을 통해 불완전한 인류를 인도하시려는 신의 뜻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안다면 기독교의 큰 물줄기를 시대에 따라 어떻게 돌리시며 시대적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부인하고 도그마에 빠진 무지한 지도자가 언필칭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남을 정죄한다. 한마디로 무지의 소치이며 부끄러운 일이다
욕망과 기만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는 한국개신교의 현상이 지도자들의 의식 속에 나타난다.
지나친 형식의 배제가 종교의식과 전례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지 못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거듭난 후에 다시 세속에 방치하는 무책임한 종교로 가게 된 것이다.,
반세기전 이 나라의 최고 지성이 습득했던 지식과 고급정보가 지금은 일반화 된 정보혁명의 시대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한국개신교가 잿밥에 마음을 뺏겨 본연의 사명을 외면한다면 40년 전 무교회주의자로 외로운 길을 택했던 이 나라 최고의 지성인의 뒤를 밟는 수많은 무 교회 주의자를 수도 없이 양산할 것이다.
>계속<
<속편>
( 7 ) 한국개신교의 문제점과 회복의 길
2007년 3월 5일
글 / 朴聖培
<참고>
** 총탄 속에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 바로가기 **
**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 ; 놀라운 기술 바로가기 **
** 7 성사
|
동방교회의 7성사 / 세례, 견진, 신품, 성체성혈, 결혼, 고백, 성유.
로마가톨릭 7성사 / 세례, 견진, 신품, 성체, 혼배, 고해, 종부.
입문성사 |
세례성사 |
그리스도교 입문성사, Ө의 자녀,교회의 일원이 된다.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음 |
탄생 |
일생 한번 |
견진성사 |
성령의 힘으로 굳건한 신앙을 갖는다. 주교가 성유를 바른다. |
성인식 |
일생 한번 | |
성체성사 |
성자의 몸과 피인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고 이를 받아 모심으로써 주님과 일치 |
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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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성사 |
고해성사 |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는다. 천국의 열쇄를 맏긴 것. |
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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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성사 |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주는 성사. |
장례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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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하는 성사 |
혼인성사 |
사제 앞에서 혼인의 약속을 하는 성사. 혼인장애(조당). |
혼인식 |
일생 한번 |
성품성사 |
사제의 품을 받을 때 주는 성사 |
봉사 |
일생 한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