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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각 대제학 전빈 묘지[寶文閣 大提學 全賓 墓誌]
[1329년-1404년]
조선국 간의대부 보문각 대제학 평강백 묘지
[朝鮮國 諫議大夫 寶文閣 大提學 平康伯 墓誌]
공(公)의 성은 전씨(全氏)요, 휘(諱)는 빈(賓)이며 자는 여공(汝恭)이니 백제공신 섭(聶)의 후손으로 가계(家系)를 강원도 정선군으로부터 이어 나왔고 대개 삼한(三韓)으로부터 세(世)를 이어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있었으니 태사공(太師公) 이갑(以甲) 같은 분이 공의 선조(先祖)이다.
고려태조를 도와 개국에 훈공(勳功)을 세우고 견훤의 난(亂)에 태조를 호위(護衛)하고 그 난(亂)을 평정(平定)하려다가 장절공 신숭겸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니 태조가 환궁(還宮)하여 삼한 벽상공신 태사 문하시중(三韓 壁上功臣 太師 門下侍中) 정선군 개국공신(旌善君 開國功臣)에 책봉(冊封)하고 시(諡)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다.
그 자(子) 보인(輔仁)은 문장가(文章家)로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관(官)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좌복야(左僕射)에 이르고 시호(諡號)를 문근(文謹)이라 하였으며 2전(二傳)하여 함정(咸正)은 삼중대광 판도판서(三重大匡 版圖判書)에 시호(諡號)는 공의(恭毅)이고 또 7전(七傳)하여 휘(諱) 보문(普門)이니 관(官)이 삼중대광 판삼사사(三重大匡 判三司事)하고 시호(諡號)는 안경(安敬)이며 휘(諱) 우화(遇和)를 두시니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에 이르고 고(考)의 휘(諱)는 승(雨+承)이니 문화시중(門下侍中)이요 비(妣)는 밀성부인(密城夫人) 박씨(朴氏)니 밀직부사(密直副使) 근(根)의 따님이다.
지순(至順) 기사(己巳) 2월 초4일에 정선 서운산하(瑞雲山下) 상촌(祥村)에서 공(公)이 태어났다. 아시(兒時)로부터 능히 어버이의 뜻을 살펴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잘 봉양할 줄 알았으며 어버이 곁에서는 유쾌한 얼굴로 부모 뜻에 순종함이 어김이 없었다.
시중공(侍中公)이 하세(下世)하자 공(公)이 관곽(棺槨)을 호위하여 반장(返葬)하고 피눈물로 여막(廬幕)을 지키면서 미음과 소금에 절인 나물을 먹으면서 날마다 묘정(墓庭)에서 울부짖으니 애처로움이 심하여 먹과 같이 새까매지거늘 사람들이 차마 볼 수 없었다.
공(公)은 신해(辛亥)에 문과에 급제하여 숙천군수(肅川郡守)로 보직되었고 조선 태종조에 와서는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에 이르렀을 때 공(功)을 세워 평강(平康)을 식읍(食邑)으로 받으므로 인(因)하여 자손들이 적(籍)을 평강(平康)으로 옮겼다.
공(公)은 기질(氣質)이 청백(淸白)하고 어려서부터 성균관에서 유학할 때 제생(諸生)들이 그의 높은 식견(識見)에 모두 탄복하였다.
사당(祠堂)과 묘소(墓所)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매양 초하루 보름이 되면 뒷산에 올라가 별도(別途)로 잔 올리는 곳을 마련하여 살아 계실 때와 같은 성심(誠心)을 다하였다.
이로써 평강(平康)에서 살아온 지 20년에 덕(德)이 온 고을에 덥혔고 행의(行誼)는 사방에 알려졌으니 붕우(朋友)간에는 그 믿음에 감복(感服)하였으며 사대부(士大夫) 또한 공경(恭敬)하고 믿어왔다.
대사(大事)가 있으면 반드시 물어서 시행하였고 수령(守令)이 비록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도 예우(禮遇)를 아니한 적이 없었으니 이 모두가 효우(孝友)의 소감(所感)이라 하겠다.
아! 갑신(甲申) 10월 초5일 신시(申時)에 졸(卒)하시니 향연(享年)이 76세이었다. 이듬해 2월 26일에 평강현 고암산 계향(平康縣 高岩山 癸向)의 언덕에 장사(葬事)하였으며 배(配)는 정열부인(貞烈夫人) 동복오씨(同福吳氏)니 병부시랑(兵部侍郎) 언규(彦圭)의 따님으로 곧고 조용한 행실(行實)과 성실(誠實)하고 심원(深遠)한 덕(德)은 가히 군자(君子)의 좋은 짝이라 할 수 있겠다. 공(公의) 상(喪)에 성(城)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이기지 못하다가 익년(翌年) 2월 16일 이어서 하세(下世)하시니 옛날 소위(所謂) 절부(節婦)가 무엇으로 이보다 더하겠는가? 향년 56세이니 공(公)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1남(男)이 있으니 휘(諱) 후백(厚伯)으로 음사(蔭仕) 초계군수(草溪郡守)하시었고 참의(參議) 남양(南陽) 홍경우(洪慶遇)의 여(女)를 맞이하여 1남(男) 수산(壽山)을 두니 대호군(大護軍)이고 도승지 조득문(趙得文)의 여(女)에게 장가드니 무후(無后)요 재취(再娶)에 의령(宜寧) 남두명(南斗明)의 여(女)를 맞아 2남(男)을 두시니 맏이는 성노(誠老)이며 둘째는 경노(敬老)이니 삼방지출(三房之出) 이하는 다 기록을 할 수 없다.
공(公)은 명문화주(名門華胄)로 공이 있어 채읍(采邑)을 받아 먼 타향(他鄕)에서 살다가 돌아가시니 어찌 명(命)이 아니겠는가?
正德(조선조 중종) 6년 辛未(서기 1511년) 4월 일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찬(撰)
◎ 고려사(高麗史)
공양왕 2년(1390) 경오년
• 3월
초하루 갑자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소를 올려,
“가짜 왕 때 임명된 탐관오리들이 토지와 노비를 권세가에게 바치는 바람에 나쁜 소문이 명나라에까지 들리게 되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관직을 삭탈하고 주었던 토지를 회수함으로써 후대에 본보기를 보이소서.”
라고 건의했으나 왕이 회답을 주지 않았다.
경오일.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우현보(禹玄寶)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왕안덕(王安德)을 강원군(江原君)으로, 우인열(禹仁烈)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이근(李懃)과 정홍(鄭洪)21)을 좌·우상시(左右常侍)로, 이황(李滉)22)을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 김약항(金若恒)을 기복(起復)시켜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 전빈(全賓)을 좌정언(左正言)으로 각각 임명했다.
[原本]
三月 甲子朔 司憲府上曰, “僞朝貪汚之徒, 以土田臧獲, 要納權勢, 使惡聲, 聞於上國, 不可不懲. 請削其職, 不許給田, 以戒後來.” 不報. 庚午 以洪永通領三司事, 禹玄寶判三司事, 王安德爲江原君, 禹仁烈爲雞林尹, 李懃·鄭洪爲左右常侍, 李滉爲門下舍人, 金若恒起復, 爲司憲掌令, 全賓爲左正言. 丙子 將幸長湍, 諫官李舒等諫止之. 己卯 謁陽陵, 遂次于禮成江, 觀戰艦習火戰. 庚辰 謁昌·顯·玄三陵, 還宮. 辛巳 前判事金貴妻, 與僧通, 俱立市五日, 決杖. 甲申 放禮曹判書尹紹宗于錦州. 庚寅 我太祖以疾辭.
• 윤4월
신미일. 우사의(右司議) 이서(李舒)를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좌천시키고, 겸 집의(執義) 남재(南在)를 철원부사(鐵原府使)로, 집의(執義) 전백영(全伯英)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장령(掌令) 권담(權湛)을 남원부사(南原府使)로, 김약항(金若恒)을 지곡주군사(知谷州郡事)로, 기거사인(起居舍人) 서언(徐彦)을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로, 지평(持平) 송우(宋愚)를 지성주군사(知成州郡事)로, 경습(慶習)을 지수안군사(知遂安郡事)로, 헌납(獻納) 함부림(咸傅霖)을 지춘주군사(知春州郡事)로, 장자숭(張子崇)을 평양판관(平壤判官)으로, 정언(正言) 전빈(全賓)을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로, 이정보(李廷輔)를 좌상시(左常侍)로, 김진양(金震陽)과 이확(李擴)을 좌·우사의(左右司議)로, 이실(李室)을 좌헌납(左獻納)으로, 정탁(鄭擢)을 좌정언(左正言)으로, 최원(崔遠)을 겸 집의(執義)로, 안경검(安景儉)을 집의(執義)로, 허주(許周)와 최긍(崔兢)을 장령(掌令)으로, 조용(趙庸)과 조겸(趙謙)을 지평(持平)으로, 또 민개(閔開)를 지신사(知申事)로 각각 임명했다.
[原本]
辛未 左遷右司議李舒, 爲光州牧使, 兼執義南在爲鐵原府使, 執義全伯英爲水原府使, 掌令權湛爲南原府使, 金若恒知谷州郡事, 起居舍人徐彦知淳昌郡事, 持平宋愚知成州郡事, 慶習知遂安郡事, 獻納咸傅霖知春州郡事, 張子崇爲平壤判官, 正言全賓知肅州郡事, 以李廷輔爲左常侍, 金震陽·李擴爲左右司議, 李室爲左獻納, 鄭擢爲左正言, 崔遠兼執義, 安景儉爲執義, 許周·崔兢爲掌令, 趙庸·趙謙爲持平, 又以閔開爲知申事.
◎ 정언[正言]
고려시대에는 국가 행정을 총관하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조칙(詔勅)을 심의하고 왕에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게 하는 간쟁을 맡아보던 낭사(郞舍)로서, 1116년(예종 11) 종6품의 좌습유(左拾遺) ·우습유(右拾遺)를 좌정언(左正言) ·우정언(右正言)으로 개칭, 각 1명씩을 두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언 [正言] (두산백과)
◎ 숙주[肅州]
(지금의 평안남도 숙천군)
본래 고려의 평원군(平原郡)이다. 태조 11년(928)에 진국성(鎭國城)을 옮겨 쌓고 이름을 통덕진(通德鎭)으로 고쳤다. 성종 2년(983)에 지금 이름으로 부르면서 방어사로 했다가 뒤에 지군사로 바꾸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숙주 [肅州] - (지금의 평안남도 숙천군) (국역 고려사: 지, 2011. 10. 20.경인문화사)
◎ 전빈(?~?)
본관은 연산(連山)이며, 공민왕 20년(1371) 3월 지공거 이색(李穡)과 동지공거 전녹생(田祿生)이 주관한 과거에 김잠(金潛)·오의(吳毅)·박원소(朴元素) 등과 함께 급제한 이후 좌정언(左正言)·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99~504쪽.
[네이버 지식백과] 공양왕 2년(1390) 경오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 신숭겸[申崇謙]
요약
고려 초의 무신.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고 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그를 구하고 전사했다.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생으로, 《고려사》에는 광해주(光海州: 春川)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表忠祠),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숭겸 [申崇謙] (두산백과)
◎ 전보인[全輔仁]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명경과 출신으로 여러 차례 학관을 지내면서 성실히 후학을 가르쳐 칭송을 들었다.
◎ 고려사(高麗史)
문종 29년(1075) 을묘년
• 여름 4월
병인일. 형부시랑(刑部侍郞) 최석(崔奭)2)을 요나라에 보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게 하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전함정(全咸正)은 곤녕절(坤寧節)을 축하하게 했으며,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조유부(趙惟阜)는 신년을 하례하게 하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허충(許忠)은 토산물을 바치게 했다.
[原本]
夏四月 丙寅 遣刑部侍郞崔奭如遼, 賀天安節, 殿中內給事全咸正賀坤寧節, 都官員外郞趙惟阜賀正, 殿中侍御史許忠進方物.
[네이버 지식백과] 문종 29년(1075) 을묘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 곤녕절 : 요나라 도종(道宗) 때 태후의 생일을 말한다.
◎ 고려사(高麗史)
공민왕 14년(1365) 을사년
• 윤 10월
정사일. 전보문(全普門)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최백(崔伯)을 밀직사상의(密直使商議)로 각각 임명했다.
[原本]
閏月 丁巳 以全普門判三司事, 崔伯爲密直使商議.
◎ 至順 己巳
충숙왕 16년 1329년으로 추측합니다. 원나라 문종은 천력(天曆)과 지순(至順)이란 연호를 썼음. 천력은 1328년-1329년, 지순은 1329년-1332년
◎ 신해(辛亥)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공민왕 20년, 신해년(辛亥年), 1371년
◎ 숙천[肅川]
평안남도 평원 지역의 옛 지명.
[네이버 지식백과] 숙천 [肅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아! 갑신 10월 초5일 신시에 졸하시니
조선 태종 4년, 갑신년(甲申年), 1404년
◎ 초계[草溪]
경상남도 합천지역의 옛 지명.
[네이버 지식백과] 초계 [草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華胄(화주)
왕족(王族)이나 귀족(貴族)의 자손(子孫)
◎ 조광조[趙光祖]
요약
조선 중종 때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천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를 주장하여 사림 28명을 선발했으며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정치를 서둘러 단행하였다. 사흘 후 기묘사화가 일어나 능주로 귀양갔으며 한달만에 사사되었다.
출생 및 관직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사림파의 거두로 역할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파와 정쟁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조광조의 사상과 영향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 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 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광조 [趙光祖]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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