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재집 제1권 / 시(詩)
죽도시 2수 병서 〔二首 幷序〕
무오년(1258, 고종45) 병란 때 북방 열두 성의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보전하고 있었다. 이때에 대장군(大將軍) 신집평(愼執平)이 지병마사(知兵馬使)가 되고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전량(全諒)이 참모가 되었다.
성안에 식량이 떨어지자 전량(全諒)이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구휼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집평(執平)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며 따르지 않아 성안의 사람들 중에 원망하고 성을 내는 사람이 많았다.
아전 중에 조휘(趙暉)와 탁정(卓正) 두 사람은 평소 딴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군중이 성을 내는 것을 틈타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래서 성을 넘어가서 적을 끌어들여 지병마사(知兵馬使)와 열두 성의 수령, 일반 백성 중에서 반란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백성을 몰아서 적에게 투항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성이 모두 무너졌지만, 전량(全諒)은 구휼할 것을 건의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후에 몰래 도망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자들을 거두어들여 등주(登州 함경도 안변(安邊)의 옛 땅에 함께 살게 하였다. 화주(和州 함경도 영흥(永興))의 여러 성과 해자(垓子/垓字) 중에 무너지고 없어진 것은 지금도 모두 복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웃 나라 병사들이 변방을 침범하니 / 隣境兵塵犯塞垣
삭방의 백성들이 이곳으로 도망왔네 / 朔方民物此來奔
원수가 보살필 계책을 스스로 잃어서 / 元戎自失懷綏策
간악한 아전이 패망의 근원을 이루었네 / 姦吏因成亂敗根
세 집의 자손 중 누가 치욕을 씻을까 / 三戶子孫誰雪恥
백년 된 해골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있네 / 百年骸骨尙含冤
지나는 사람이 당시의 일을 물으니 / 行人爲問當時事
노인은 마음 아파 차마 말을 못 하네 / 古老傷心不忍言
곡식과 재물 쌓는 것이 어찌 먼 계책이랴 / 儲粟屯膏豈遠圖
굶주린 백성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 阻飢民命在須臾
만약 고락을 함께하고 은혜를 베푼다면 / 若分甘苦盡仁惠
죽을지라도 나를 원망할 사람 없으리라 / 雖死人無怨及吾
[주-D001] 죽도(竹島) : 함경도 덕원도호부(德源都護府)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때 정주(定州) 이남 12개 성(城)의 인물이 모두 이 섬으로 들어와서 몽고의 군병을 피하였다. 당시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이 여진(女眞)의 포지원(布只員)과 모의하여 도병마사(都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살해하고 적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관사(館舍)와 민가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9 咸鏡道 德源都護府》
하지만 조휘와 탁청이 투항한 것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와 차이가 있다. 이에 의하면 조휘와 탁청이 몽고병을 이끌고 와서 신집평 등을 죽이고 인민을 노략질한 뒤에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몽고에 붙였고, 몽고에서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화주에 설치하여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고 한다. 《高麗史節要 卷17 戊午》
[주-D002] 탁정(卓正) : 《고려사절요》 권17과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9 덕원도호부에는 ‘탁청(卓靑)’으로 되어 있다.
[주-D003] 세 집 : 적은 호수(戶數)를 가리키지만, 원수를 갚는다는 말로 주로 사용된다. 전국 시대 말년에 초 회왕(楚懷王)이 진(秦)나라에 들어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자 초나라 사람들이 진나라를 원망한 것과 관련하여, 초 남공(楚南公)이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어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분명히 초나라 사람들일 것이다.〔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고 말하였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7 項羽本紀》
ⓒ 한국고전번역원 | 서정화 안득용 안세현 (공역) | 2013
근재집 제1권 / 시(詩)
등주 옛 성에서 옛날을 생각하다〔登州古城懷古〕
저물녘 성 머리에 서서 옛날을 생각하자니 / 暮天懷古立城頭
단풍과 국화가 눈에 가득한 가을일세 / 赤葉黃花滿眼秋
담장 안에 가까운 재앙 감춰진 줄 모르고 / 不覺蕭墻藏近禍
바닷섬만 믿는 것을 깊은 계책으로 삼았구나 / 惟憑海島作深謀
백년 된 무덤 위에는 무정한 풀이요 / 百年丘隴無情草
십 리 바람과 안개엔 신의 있는 갈매기라 / 十里風煙有信鷗
멀리 변방을 바라보니 공연히 탄식만 나는데 / 遙望朔方空歎息
한 줄기 강적 소리가 근심을 자아내네 / 一聲羌笛使人愁
[주-D001] 등주(登州) …… 생각하다 : 1258년(고종45)에 몽고의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화주(和州) 즉 함경도 영흥(永興) 지역에 진(陣)을 치자, 당시 대장군(大將軍) 신집평(愼執平)이 백성을 데리고 죽도(竹島)로 피신하였다.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곡식을 내어 백성을 구휼하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이 컸는데, 이때 아전이던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이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투항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근재집》 권1 〈죽도시(竹島詩)〉 서문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주-D002] 담장 : 원문의 소장(蕭墻)은 내적인 요인으로 발생하는 우환을 말하는데, 재앙이나 근심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소장지화(蕭墻之禍) 또는 소장지우(蕭墻之憂)라고 한다. 소장은 원래 임금과 신하가 회견하는 곳에 설치하는 병풍으로, 노(魯)나라의 계씨(季氏)가 부용국인 전유(顓臾)를 치려 하자 공자가 염유(冉有)와 계로(季路)를 꾸짖으며 “나는 계손의 근심이 전유에 있지 않고 병풍 안에 있을까 두렵노라.〔吾恐季孫之憂 不在顓臾而在蕭墻之內也〕” 하였다. 《論語 季氏》
[주-D003] 백년 …… 갈매기라 :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권3 조신(曺伸) 조에서는 이 구절에 대해 “시어(詩語)가 침통(沈痛)하다.”라고 평가하였다.